사도 15,1-2.22-29; 묵시 21,10-14.22-23; 요한 14,23ㄴ-29
+ 오소서 성령님
오늘 우리 성당에 귀한 분들이 오셨습니다. 예비신자들께서 오셨는데요, 한분 한분 성함을 주님 제단 앞에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오늘 성당 들어오시면서 아브라함 성화 보셨지요? 지난주에 공지드린 대로, 어떤 어르신께서 봉헌해 주셔서, 심순화 카타리나 화백님께 의뢰를 드려 어제 아브라함 성화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성화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어떤 분이 김대건 신부님이냐고 물어보셔서 아브라함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한국적인 아브라함입니다.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 씨와 헛갈리실까봐 걱정되네요? 우리 본당 주보이신 성조 아브라함을 이렇게 성전 입구에 모시게 되어 영광이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수요일 성모의 밤 좋으셨죠? 우리 공동체가 성모님 품 안에서 하나 되는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음 주 주님 승천 대축일과 그 다음 주 성령강림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더욱 주님께로 향하도록 모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가르치면서 시작됩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다인의 율법을 먼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리는데, 이 회의를 초대 교회 최초의 공의회라 부릅니다.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의 핵심을 이루는데요, 왜냐하면 이 회의를 기점으로, 교회가 유다 그리스도교에서 세계 그리스도교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계획을 따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사도들과 원로들은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던 까닭은, 성령께서 하고 계신 일과,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에로 이끄시는지를 함께 식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이어 레오 교황님도 강조하고 계신 ‘시노달리타스’라는 단어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구절이 바로 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이라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수결’과는 다른 의미인데요, 성령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시는 말씀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인 끝에 할 수 있는 말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비롯한 구약의 다른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 등 네 가지를 멀리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레위기(17-18장)에서 유다인과 섞여 사는 이방인들에게 주었던 모세의 율법이기도 한데요, 결국 모세 시대에도 존중되었던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존중하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로 여기자는 이야기입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은 성령께 사로잡혀 마지막 날에 완성될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를 봅니다. 인상적인 것은 그곳에는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별도의 장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이 완전히 실현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보다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는데요, 두 말씀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2년 반 전에 아버지를 하느님 품으로 떠나 보내드리고 나서, 아버지가 많이 그립습니다. 재작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스위스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스위스 여행을 두 번 이상 다녀온 사람과는 꼭 친구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라네요? 물가가 무척 비쌌습니다.
저는 멀리서 마터호른 산을 보면서, 그곳이 하늘과 가깝기에,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를 ‘저기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산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문득 아버지가 제 안에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DNA를 갖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외모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말, 느낌이 비슷할 때가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께 받았던 예의범절에 대한 교육, 가치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아버지의 습관 등 아버지의 모습이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러 밖에서 헤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아버지의 모든 말씀이 당신 안에 있고, 아버지의 사랑이 전부 당신 안에 있으며,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 성령강림 대축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사십니다. 하느님께서 이 성전과. 성전에서 거행되는 전례 안에, 말씀 안에, 사람들 안에, 당신의 피조물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피조물인 내 안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우리 안에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아듣고 오늘 예비자들께서는 우리 본당에 오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찾은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해 아버지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내가 주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만,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통로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주자 가운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라는 분이 계신데요, 어느 지휘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연주할 때 세상은 더욱 빛났다.”
내가 살아감으로 인해 이 세상은 더욱 빛날까요? 내가 기도하고 봉사함으로써 세상은 더욱 환해질까요? 나의 실천을 통해 세상은 더욱 정의로울까요?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해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당신 모습을,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느님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주님 말씀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아가야겠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https://youtu.be/MGIvw7Mz2dY?si=yAIfWrmxwsqP80ST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1악장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레프 오보린(피아노)
노은동 성당 주보 아브라함, 심순화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