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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과 남농허건

작성자뜨락|작성시간06.04.15|조회수102 목록 댓글 1
 


                            유달산과 남농허건




  2006년 1월 7일 유달산과 남농미술관을 가기위해 고속철도인 KTX를 타고 목포에 갔다 . 3-4정도 서울보다 기온이 높아 별 춥지는 않고  오히려 산뜻한 초봄을 느끼는 것 같아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다른선생님들이 워낙 좋은 글과 내용을 올려 글쓰기가 쑥스럽고 망설여지지만 일단은 숙제이고 이러한 과정도 훈련이라 생각하며 미숙하지만 글을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유달산


  유달산은 높이 228m의 낮은 산이지만 기암 기봉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산이다. 특히 유달산 어느 곳에 오르든 목포 시가지와 항구와 푸른 물결에 그림처럼 떠있는 다도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아름다운 산이다. 그런데 삼학도는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 옛날의 모습이 없어졌다고 한다. 전에는 헤엄을 쳐서 거기까지 갔다고 한다. 공원이 조성되어 산이라 할 수도 없으나, 한 편으로 1등봉과 2등봉 자락의 험준한 바위봉과 천인 단애의 벼랑을 거느린 산 줄기는 '호남의 개골산(금강산의 겨울이름)'이라 일컬을 만큼 빼어난 산악미를 드러낸다.

  주차장 차에서 내리면서 마주한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의 군량미 일화로 유명한 바위봉이 형태의 절묘함과 아름다움으로 탄성을 발하게 한다. 이 노적봉은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께서 적은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봉우리에 이엉을 둘러 아군의 군량미로 위장함으로써 우리의 군사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겁을 먹은 왜군의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진짜 시골에서 볏단을 쌓아 둘러 놓은 것 같았다. 역시 전략, 전술이 뛰어난 대단한 이순신 장군이었다.

  노적봉을 돌아 계단을 오르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남해 앞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는 공원이다. 그리고 정자 들,이 산에는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등 5개의 정자가 있으며, 유달산 일주도로를 타고 어느 곳에서나 산에 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공원과 난공원 등이 조성되어 목포의 휴식처이며,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목포시가와 다도해의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농 허건


  남농 허건(南農 許建)은 1925년 진도에서 이 땅에 남화를 심은 허소치의 손자이며 미산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주로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남도화를 발전시켰다(1925-1987). 한국의 전통산수가 남도지방에서 그 고유의 정신과 기법을 계승 발전시켜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회화사적으로도 정설이 돼 있다. 이것은 남도화가 서울 화단과는 달리 수입 파이프라인을 타고 밀어오는 일본화풍을 멀리하고 전통묵수에 일관하는 자세를 가졌다는 특별한 뜻을 지닌다. 그런데 이때 광주,목포를 중심으로 한 남도지방이 일본화풍을 멀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방이 임진란이후로 견지해온, 갑오동학농민운동이라든지 항일의병, 광주학생운동과 같은 역사속에 흐르는 반일의 주체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라기 보다 진도에서 발아된 허씨가문의 화업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할것이다.

  소치이후 남화의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 남도화에서 분명히 의재산파와 남농산파으로 구별되고 있는데 의제화풍이 전형적인 한국적 남종화를 고수하고 있다면 남농의 그림은 전통적인 남종화를 현대감각에 맞게 변형시켰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남농의 화풍은 중국청말에서 신문인화를 발전시킨 오창석(吳昌碩;1844∼1927)의 영향으로 한국적인 신문인화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남농산수의 맑은 묵색(墨色)에서 느낄 수 있는 현대적 감각에 맞는 문기(文氣)에서 김청강(金晴江)이 표현한 신문인화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남농산수에서의 문기는 소치나 의제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전통적 남종문인화의 문기화는 차이가 있는데 전통적인 문기와 거리가 있는 것은 역시 남농그림에 일본화풍의 현대감각에 맞는 섬세한 회화미적인 문기가 가미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농의 그림에서 철저하게 일본화풍의 냄새가 짙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지 초기 작품 즉 선전(鮮展)이나 문전(文展)에 입상할 때까지는 일본화풍의 일면이 강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이후의 작품에서는 청말 오창석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일필일사(一筆一寫)로 대담하고 흠벅진 신문인화풍의 필선과, 이조 김수철(李朝 金秀哲)의 선미(禪味)깊은 순수한 우리 한국적인 문기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묵색(특히 사군자)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사실상 선을 적게 쓰고 태점(笞點)을 많이 쓰는 화풍에서 신문인화풍의 문기를 느끼기는 아주 힘들고 또 담묵(淡墨)과 농묵(濃墨)을 겹쳐 써 전면전(全面的)으로 그림이 어둡고 칙칙하게 되기 쉽지만 남농산수에서는 칙칙하게 느껴지지 않고 아주 맑은 묵색으로 조화로운데 이것은 고격의 묵법을 체득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남농은 현대적인 감각에 알맞은 묵법의 기법을 누구보다도 잘 익혔다고 할 수가 있다. 이와같이 맑은 묵색의 조화를 보여주는 남농의 산수는 마치 『초서체의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처음부터 화제의 서체에 화·서·각에 뛰어난 오창석의 글씨를 썼으며 후에 차츰 남농 스타일로 고정되었다. 또한 그는 사생에서 우리그림에 최초로 실경산수를 시도한 겸재 정선과 오원 장승업의 호방한 필선(특히 화조)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데, 때때로 후기작품에서 오원의 필선을 찾아볼 수도 있으며 초기작품에서는 화조에서 오원의 일면이 발견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남농의 그림은 소치영향시대의 아주 초기 문전스타일의 초기, 남농스타일의 모색기, 남농스타일의 정립기로 구분할 수가 있으며, 남농스타일의 세필 사생화풍은 40대초까지 계속되고, 40대 후기 필선이 강해지고 현대감각에 맞는 신문인화풍의 문기를 가미시키면서부터 남농스타일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남농스타일로 고정되면서부터는 화제의 서체까지도 오창석의 영향을 벗어나 그림 전체가 맑은 묵색으로 새로운 문기를 보여주는 독창적인 작품세계가 전개된다. 또한 산수에 나오는 인물도 전통적인 남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쓰는 개자원식의 중국인물을 그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한국사람 그것도 한국농촌사람을 그렸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그의 산수에 나오는 농촌의 실경에서 인물은 지게에 쟁기를 지고 소를 몰고 가는 한국농촌의 정서를 가득히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해방직후의 그림에서, 한국의 초가에 박이 덩굴진 지붕, 고추가 빨갛게 널린 지붕, 태극기가 펄럭이는 사립문, 거기에 담소하는 노부부의 인물도 틀림없는 한국적인 정서가 넘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농촌의 실경은 문전적인 일본화풍식, 진채사생화에서도 그대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떤 전문적인 직업에서 3대에 걸쳐 같은 직종의 일을 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남농집안에서는 현재 5대에 걸쳐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이를 자랑스럽게 말하며 하나라도 더 우리에게 작품을 알려주려고 애쓰시는 모습에 남농미술관 허씨 종친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다.



         

                                 문인화


  중국에서는 글씨와 그림이 다 같이 필묵(筆墨)을 사용하고 또 필법(筆法)이 공통되므로 문인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특히 수묵화(水墨畵)가 유행하자 많은 문인들이 화필을 들고 이에 시문(詩文)을 덧붙이는 등 문인화는 시·서예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발전하여 시·서·화에 뛰어난 3절(三絶)이 많이 배출되었다. 본래 남종과 북종의 구분은 명말 동기창 등의 남북종론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남종화란 왕유를 기조로 하여 형호, 관동, 이성, 범관, 미불부자, 목계, 옥간, 원사대가 명대의 오파로 이어지는 문인화계를 말하고 북종화란 이사훈을 기조로 하여 곽희, 이당, 마원, 하규, 명대의 절파로 이어지는 채색 공필화의 직업화가들의 그림을 말한다. 이것이 중국에서는 계통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을 하였지만 조선사회에 전래되어 수용될 때에는 그 계통이 어느정도 무시화 되고 그 표면적인 외형의 표현들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문인화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회화관 형성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조선초기에 남종화풍에 속하는 미법산수를 받아들인 이들은 서문보, 이장손, 최숙창 등 화원 종심이였고, 반면 당대의 문인이요 지식인 강희안은 절파계의(북종에 속하는)을 따랐다. 한편 남종화풍과 절파풍은 함께 따른 심사정은 북종과 남종의 절충화법을 구사한 이인문, 화원으로서 조선후기 남종화를 그린 김유성, 이재관 등 그 내용은 자뭇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남종화풍의 수용과 유행은 큰 줄기로 볼 때에 조선 중기에 소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여 당시 유행하던 진경산수의 모태가 되었고, 말기에 더욱 형식화, 전형화 되었으며 김정희에 의해 드디어 체계화 된 이론을 갖게 되었다. 특히 겸재파의 진경산수 화풍의 발전에 화법상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남종화풍의 중대한 의의이기도 하다.


운림산방



  정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조선시대 말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말년에 기거하던 화실을 당호로 정한 것으로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소치는 1809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 (현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밑에서 공재 윤두서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2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秋史)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했다. 추사가 소치의 예술세계를 이룩하여준 스승이라면 초의는 서화에 길을 잡아주고 인생의 눈을 틔어준 스승이라 하겠다. 1856년 추사가 이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49세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개와 아름다운 첨찰산 밑 쌍계사를 연접한 동편에 자리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려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녘으로 연무가 운림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이란 당호가 잘 맞었을 것이다. 소치는 이곳에서 미산 허영을 낳았고 미산이 그림을 그렸으며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서 처음으로 그림을 읽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미산-남농-임전 등이 4대에 걸처 정통남화를 이어준 한국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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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bequeen | 작성시간 06.04.16 잘 읽고 가요. 나도 유달산에 가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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