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華嚴寺)
소재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언제인지는 모르나 연기(烟起)가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1936년 찬술된 <대화엄사사적>등 모든 사적기들은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의 승려 연기가 세웠다고 한다. 더불어 <구례속지(求禮續誌)>에는 백제 법왕(재위 599-600)이 3천 명의 승려를 입주하게 했으며,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 자장(慈藏)이 증축하고, 문무왕(661-681)때에 의상이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79년 경덕왕(742-765) 때의 <화엄경> 사경(寫經)이 발견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역사가 밝혀졌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면,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경덕왕 13년(754) 8월부터 <화엄경> 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 완성시켰던 실존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절은 신라 진흥왕 때가 아닌 경덕왕 때 창건했으며, 아울러 자장과 의상이 증수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이 입증된다. 그 뒤 신라 말 연기 도선(烟起 道詵827-898)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신라 말 화엄학이 남악과 북악으로 나뉘어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의 복전(福田)인 관혜(觀惠)는 이 절을 중심으로 고려 왕건의 복전인 해인사의 희랑(希郞)과 대립된 학파를 형성했다. 고려 광종(949-975) 때 선사 홍경(洪慶)은 퇴락한 건물을 증수했다. 이어 문종(1046-1083)이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했다. 숙종(1095-1105) 때에는 왕사 조형(祖衡)이 대대적인 보수를 했으며, 인종(1123-1146)은 왕사 정인(定仁)으로 하여금 중수하게 하고 도선 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세종 6년(1424)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지만,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탔다. 이에 벽암 각성(碧巖 覺性)이 인조 8년(1630)에 중건을 시작하여 1636년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했고, 이듬해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시켰다. 숙종 28년(1702) 각성의 뜻을 이어 받은 계파 성능(桂坡 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했는데, 숙종은 이것을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하고 선교양종 대가람으로 격을 더욱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화엄종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 온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큰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화엄 사상의 구현에 애써왔다. 이 절의 부속 암자는 상당히 많았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구층암(九層庵)을 비롯한 금정암(金井庵)과 지장암(地藏庵)만이 남았다.
화엄사 각황전(華嚴寺 覺皇殿)
국보 제 67호
조선중기의 목조불전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팔작지붕 다포집이다. 현존 건물은 숙종 23년(1703)에 재건한 것으로 중앙의 5칸 3면에 높이 4.5m의 기둥을 세웠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華嚴寺 覺皇殿-石燈)
국보 제 12호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큰 이 석등은 신라석등의 기본형인 8각을 따르고 있으나 간석(竿石)을 고동형(鼓胴形)으로 만들어 전라도지방 석등간석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등의 간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8각 하대석 각 면에는 예리한 안상(眼象)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귀꽃이 있는 복련8엽(覆蓮八葉)이 크게 조각되었으며 상면의 얕은 굄 위에 운문이 조각된 하단과 8각 소루형(小累形)인 상단에 2단의 높직한 간석 굄이 마련되었다. 간석은 얕고 배가 불러서 일견 장구를 연상하게 하며 중앙에 2조 횡대(橫帶)가 있고 8각의 면마다 꽃모양이 횡대위에 장식되었다. 이 중간부상하는 일단 가늘어졌다가 다시 넓어지면서도 8각의 기본형을 지키고 있다. 상대석은 평박한데 밑에는 거의 수평에 가깝게 복련8엽이 조각되고 위에는 소로형의 8각 화사석(火舍石) 굄이 있다. 옥개석은 얇은 편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위에는 귀꽃이 크게 표현되었다. 상륜부는 사다리꼴의 노반과 8각 앙화(仰花)를 얹고 그 위에 보륜(寶輪)을 사이에 두고 귀꽃이 달린 보개를 얹었으며 정상에는 연화가 장식된 보주를 얹어 완형을 이루었다. 간주 이하가 상층부에 비하여 빈약한 감을 주나 당당한 위풍을 보이며 뒤의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화엄사 대웅전(華嚴寺 大雄殿)
보물 제 299호
조선중기의 목조불전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엄사 경내에서 각황전 다음 가는 큰 건물이며 그 전면에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대석단(大石壇)과 대석계(大石階)가 있는데, 대웅전은 이 대석단 위에 남향으로 서 있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모두 동일하게 하고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주열(柱列)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전면 주간(柱間)에는 각각 세짝식으로 된 문작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만들었다. 공포(供包)는 내외 3출목의 작은 포작으로 외부에서는 쇠서를 윗부분에 조각한 장식적인 요소가 증가되고,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친 공포의 산미첨차(山彌詹遮)가 한 몸으로 합쳐져서 장식판처럼 변형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주위의 외둘레간을 중앙부분보다 한층 낮게 만들었다. 불단 위에는 각각 J자형의 처마를 이룬 정교한 닫집을 3개 달았는데 전체가 매우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14년(1636)에 각성(覺性)이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규모뿐만 아니라 외관도 훌륭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으로서는 가장 우수한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을 수 있다.
화엄사 동오층석탑(華嚴寺 東五層石塔)
보물 제 132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 있는 동서 쌍탑 가운데 동편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높이가 6.4m 이다 남향한 대웅전과 동향한 각황전의 높은 석단 아래 서탑과 대립하여 건립되었다. 서탑은 각 면에 조각상의 장엄이 가득한 데 비하여 이 탑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또 서탑이 2층기단임에 비하여 이 탑은 단층기단이다. 5층 고준한 석탑이면서 단층기단을 형성하였으며 세부수법에도 간략화된 양식이 보여 이 탑의 조성연대는 서탑에 준하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화엄사 서오층석탑(華嚴寺 西五層石塔)
보물 제 133호
높이 6.4m의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동탑과는 달리 기단과 탑신부에 장식이 가득하다. 탑의 구조는 2층기단 위에 5층의 방형탑신을 건립하였다. 기단은 수매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같은 돌로붙여서 만들고 각 면에는 안상(眼象)속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다. 하층기단의 갑석은 4매 판석이고 상면에는 호형(弧形:활의 모양) 과 각형의 굄이 있어 상층기단을 받게 하였다. 중석도 4매로 짜였고 각면 2구씩 팔부신증(八部神衆) 입상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초층 옥신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을 배치하였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각 층 모두 5단이며 추녀 밑은 수평이다. 석탑의 조성연대는 조각상이 가미된 점, 또는 옥개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신라 하대인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 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 35호
통일신라시대의 이형석탑으로 높이 5.5m이다. 전체부재를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사자탑은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우수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기본조형은 2층기단 위에 3층탑신을 얹고 그 정상에 상륜부를 놓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위에 각형과 원호와 또 하나의 각형굄 순서로 높직한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하층기단을 받고 있다. 하층기단면석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각출되었을 뿐 중간에는 탱주가 없다. 상층기단은 우주를 대신하여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두쌍의 사자를 한 마리씩 지주(支柱)로 삼아 네 귀에 배치하고 정상에도 하대와 대칭 되게 연화대를 얹어 널찍한 갑석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또한 찰주(擦柱)대신 연화대 위에 합장한 대덕(大德)의 입상을 안치하고 갑석의 하면 중앙에도 연화문을 장식하여 천개(天蓋)를 삼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네 귀에 앉은 석사자상과 중앙에 서 있는 대덕의 모습인데 네 마리의 석사자는 상하 앙복련화대(仰覆蓮花臺)위에 앞발을 뻗고 뒷발을 구부려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 곧 불국사다보탑의 석사자상을 연상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원각(圓覺)한 대덕의 입상은 얼굴의 인상이나 몸에 걸친 가사의 의문과 균정한 체구 등이 당시의 불상과도 같은 조성수법을 보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상층기단 갑석은 1매석으로 만들어지고 그 상면에는 2단의 굄을 각출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곧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서 일반형 석탑의 탑신부와 같으나 초층옥신석 4면에 각기 문비형(門扉形)을 모각하고 그 좌우로 여러 가지 존상을 조각하였다. 극 정면에는 인왕상, 양측면에는 사천왕상, 그리고 뒷면에는 보살상을 양각하여 장엄하게 하였다. 이 위의 2,3층 옥신석은 초층과는 전혀 달리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을 뿐 아무런 장식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초층부터 3층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서 처마의 받침이 5단씩이고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을 각출하여 그 위에 부재를 받게 되어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 전각의 반전이 예리하여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음은 신라성대(盛大)의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며, 상륜부는 노반석 위에 복발만이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의 건립연대는 각 부의 조각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성대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신라시대의 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覺性. 부처의 원만한 깨달음.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華嚴寺 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 300호
통일신라시대의 이형석탑으로 높이가 3m이고 일명 노주(露柱)라고 불리는 탑형의 건조물로서 갑석을 4구의 사자가 받치고 있다. 탑의 형태는 2층기단위에 탑신을 받고 있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결구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가 높였다. 상층기단의 구성은 네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였는데 밑에는 복련석을 놓아 그 위에 앉아 있고 머리 위에는 앙련석을 얹어놓았다. 하층기단은 방형 불단(佛壇)의 형식으로 되어있고 갑석은 작은 각형 1단으로 부연(副椽)을 삼았다. 중석은 무문석재(無文石材)의 형태를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