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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생활

잃어버린 우리의 얼을 찾아서 1

작성자샘물|작성시간06.08.16|조회수62 목록 댓글 0
잃어버린 우리의 얼을 찾아서 <1>
아힘나 평화학교 아이들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선발진 활동기
     김종수(kcse21) 기자   
아힘나 평화학교 (경기도 안성 소재) 학생들이 2006년 1학기 교육과정에 있는 한국 근대사를 배우면서 재일동포들의 삶을 만나게 되었다. 아힘나의 아이들은 일제시대 때부터 일본으로 넘어가 살게 된 우리들의 동포들이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오고 있는 삶을 배우며, 또한 동포들의 삶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굳게 지켜 와야만 했을 잃어버린 우리의 얼을 만나게 되었다.

아힘나의 아이들은 지난 봄부터 동아방송대학 학생들의 도움으로 동영상카메라 촬영법과 편집을 배우고 익혀 왔으며,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의 정소희 실장으로부터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을 배워왔다.

6월 27일부터 9박 10일간의 일정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아이들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70~80여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로 시모노세키로 향해 이 검푸른 현해탄을 건넜다. 7명의 아이들도 우리 선조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기 위하여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배에 올랐다.

바람도 세었고, 파도도 높았지만 배가 출항하는 데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수행해야할 미션의 무게 때문인지 아이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세 시간 정도 지나 후쿠오카 항에 도착하였고, 후쿠오카의 시내를 그저 눈으로만 관광하며 연수원(후레아이노 이에)로 이동하였다.

▲ 후꾸오까조선초급학교 아이들 (증)조부모의 고향이 표시된 지도
ⓒ 김종수
다음 날에는 주문홍 목사(아힘나 일본지부의 이사)의 주선으로 키타큐슈시 고쿠라 남구에 있는 대안학교인 '히라오다이 사계의 언덕 소학교'를 찾았다. 아이들의 환대와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잔뜩 긴장해 있는 아힘나 아이들의 얼굴을 풀어 주었으며 함께 하는 놀이를 통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참으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워가는 아이들 간의 첫 만남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부드러웠다.

6월 30일과 7월 1일에는 다큐멘터리의 전체 내용 중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교육의 현장인 재일조선학교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방문한 학교는 후꾸오까조선초급학교와 규슈 조선중고급학교, 그리고 올해 폐교된 지꾸호 조선초급학교였다.

아힘나의 아이들은 재일조선학교를 방문하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아이들의 방문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 규슈 조선중고급학교 아이들과 아힘나 평화학교 아이들
ⓒ 김종수
우리의 얼을 지켜나가요 - 임수진(아힘나평화학교 중등과정)

"우리의 얼을 찾으러 가요"라는 주제를 가지고, 아힘나 평화학교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일본에 갔다. 일본여행 기간 동안 후꾸오까 조선 초급학교와 규슈 중고급학교, 그리고 지금은 폐교가 되어버린 지꾸호 조선학교에도 가보았다.

규슈 중고급학교에서는 선생님들께서 저고리를 입고 수업을 하고 계셨다. 말로만 들었었는데, 저고리를 입으신 선생님들을 보니 약간 놀랐다. 민족학교의 학생들은 지나갈 때 우리들을 보고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해주었다. 우리도 "안녕하세요"라는 말로 대답을 해주었다.

규슈 중고급학교에는 가야금부가 있었다. 가야금 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비록 짧은 연주였지만, 잊지 못할 것 같다. 또, 규슈 중고급학교는 뛰어난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시설도 아주 좋았고 체육관도 아주 넓었다.

그런데 선생님들께서 모든 민족학교의 시설이 이렇게 좋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실제로 후꾸오까 조선 초급학교에 가보니 그랬다. 밖에서 보기에 허름해 보였다. 규슈 중고급학교는 가장 최근에 지어진 학교라 그렇게 좋은 시설이라고 한다.

후꾸오까 조선 초급학교에 가서 아이들이 수업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몇 학급은 학생들이 몇 명밖에 없었다. 수업에 열심히 참가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민족학교들은 학교 꾸미기가 참 잘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반마다 붙어 있는 학급 게시물들…, 복도도 잘 꾸며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꾸호 조선학교는 올 3월에 폐교가 되어버린 학교이다. 그래서 학교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다녀온 민족학교들에는 교무실에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북한에서 재일동포들에게 매년 교육 원조비를 지원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민족학교에 교육원조비를 지원해준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한다. 단 한 푼도 말이다.

일본에서, 우리의 얼을 지키기 위해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하는 재일동포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다니. 남한이 고향인 재일동포들은 얼마나 섭섭했을까? 우리의 얼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는 재일동포들은 아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지금 재일동포가 5세까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6세, 7세가 태어날 때도 우리의 얼을 지키려는 후손들이 있겠지?

지금 한국에서는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외국어(영어)를 배우는 데 열성을 다한다. 한글을 다 떼기도 전에 영어를 가르치려 하는 부모들이 많다. 이런 일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 우리의 글을, 우리의 얼을 지키려는 재일동포들…, 자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극성인 한국의 학부모들…, 물론 두 가지 다 수많은 사람들의 일부분이겠지만.

우리의 얼을 지키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을 잃게 된다면, 나라를 잃게 되는 것이다. 민족학교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 재일동포들…, 지금 민족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 민족학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 모두 아주 소중한 존재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여행을 통해서 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우리의 얼은 영원히 지켜져야 한다. 우리의 얼을 지켜나가요!'

우리 민족은 참으로 대단하다 - 전지용(아힘나평화학교 중등과정)

6월 30일 금요일, 규슈 조선중고급학교에 갔다 왔다. 민족학교 중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정말 시설 좋다, 민족학교만이 아니라 다른 학교와 비교해도 오히려 일본학교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시설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학교도 지을 때는 정말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연못과 산이 있는 거의 학교를 지을 수 없는 땅을 사서 당시 재일동포들의 비판도 받았었다고 한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모두 산을 '삽'으로만 파서 연못을 메우고, 그 작업을 반복해 땅을 확보하고 참으로 공을 들여세운 학교라 한다.

학생들은 모두 모국어인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족심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높은 것을 느낀다.

소조(방과후 활동)는 가야금도 있고 스포츠도 많다. 그곳에서 학생들과 교류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농구부 애들과 농구도 해보고 얘기도 나누어봤다.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보성에 아힘나 학교를 지을 때 실내체육관이 이곳처럼 지어졌으면 좋겠다.

7월 3일, 조종태·김광배 할아버지와 인터뷰 전에 우리는 후꾸오까 조선초급학교를 방문, 견학하였다. 지난번에 갔던 규슈 조선중고급학교와는 한눈에 비교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30대 교장선생님이 계셨다. 정말로 젊은 선생님이셨다. 교실도 적고 학생도 적었다. 1학년들까지도 모두 조선어를 할 수 있었다.

"차를 셀 때 뭐라고 할까?" 선생님이 문제를 내자, 아이 한 명이 나와 푸는데 잘 모르자 다른 아이들이 가르쳐주면서 활발한 수업이 진행되었다. 다른 반도 마찬가지로 열심이었다. 전교생을 보아도 활발하였고 우리말을 배우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으며 모두 다 우리 조국을 배우며 자라고 있었다. 다시 한번 민족심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던 거 같다.

잃어버린 우리의 얼을 찾아서 <2>
일본은 지꾸호에 묻힌 강제연행 조선인들의 신원을 밝혀내라!
   
야하타 제철소 굴뚝에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 김종수
7월의 첫 날, 아힘나의 평화학교의 학생들이 조선인 강제연행 유적지를 찾아갔다. 일본은 이 때 장마철이었는데 밤에만 비가 오고 낮에는 비가 오지 않고 잔뜩 흐리기만 하였다. 잔뜩 흐린 하늘 아래 태평양전쟁 당시 군수물자를 공급했던 야하타 제철소가 보인다. 일제시대에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현해탄을 너머 이 곳으로 끌려와 강제노역을 당했다. 이른 아침에 본 이 제철소의 굴뚝에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죽은 이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이누까이 목사님

ⓒ 김종수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힘나 아이들은 후꾸요시 전도소에서 사역하시는 이누까이 목사님을 찾아나섰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 이누까이 목사님 부부의 얼굴이 무척 밝다. 아이들을 만나기 때문이었을까?

이누까이 목사님은 대학시절 탄광으로 봉사활동을 하다가 그 지역 어린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빠져 탄광지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점점 이 지역으로부터 선교과제를 찾게 되면서 지금까지 민중선교를 해오시는 목사님이셨다. 그러다가 이 지역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숨져간 조선노동자들의 넋과 만나게 되었고, 이 곳에서 죽은 이들의 인권을 생각하며 매일 이 곳을 찾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으며 강제연행 역사유적지들을 안내하고 있다.

ⓒ 김종수

70세 가까이 되시는 이누까이 목사님은 언제나처럼 앞장서서 석탄박물관으로 아이들을 인도하였다. 석탄박물관에는 지꾸호지역에 있던 탄광의 수와 규모, 그리고 당시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등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편, 현 일본 외상인 아소의 조부가 운영했었던 아소탄광도 이 지꾸호에 있었다. 그 곳에서도 역시 강제연행되었던 조선노동자들이 있었다.

석탄자료관에는 지꾸호에 있었던 대기업 탄광에서의 채탄과정과 운반과정이 매우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 김종수

하지만 이누까이 목사님의 설명은 전혀 달랐다. 이것은 눈속임이었다는 것이다.

ⓒ 김종수

명치유신 때의 탄광내부 모습이라고 설명하는 사진의 이 모습이 반세기가 지난 당시 실제 탄광내부 가장 아래층에는 여전히 존재하였다는 것이었으며, 그 열악한 작업환경에 바로 강제연행된 우리 조선노동자들이 혹독한 노동을 강요 당했고, 최소한의 인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휴우가 묘소 뒤 후미진 곳에 묻힌 강제연행 조선노동자들의 한

이렇게 혹독한 노동현장에서 견디다 못해 죽어나간 조선인들은 얼마였을까? 이누까이 목사님과 고꾸라 교회의 주문홍 목사님은 일본의 한 개인가족묘인 휴우가(日向)묘소로 아이들을 인도하였다. 휴우가 묘소 옆에는 묻힌 이들이 평소에 기르던 애완동물의 무덤까지 가지런하게 있었다.

ⓒ 김종수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자 뒤쪽 후미진 곳에 봉분도 묘비도 없고 그저 돌덩이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언제 어떻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조선노동자들의 무덤'이 있었다.

▲ 지꾸호 곳곳에는 이렇게 탄광에서 죽어간 조선인들의 무덤이 널려 있다.
ⓒ 김종수

필자가 이 곳을 찾아 온 것이 벌써 다섯 번째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곳을 다녀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곳에 묻혀 있는 조선인들의 수가 얼마인지, 누가 묻혀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수 있었겠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 누구도 조사하겠다고 나선 이가 없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묻힌 이들의 신원을 밝혀내는 것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인권을 회복하는 길

아힘나의 아이들은 재일조선인도 아닌 일본인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하여 물었다. 이누까이 목사님은 얼마 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인 아우슈비츠수용소를 방문하고는 심히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 부끄러움 이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사망자 명단은 있는데, 나는 이 곳에 조선인노동자들이 묻혀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얼마나 묻혀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어찌 그 뿐인가?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강제연행 조선노동자들의 산재*사망기록을 숨겨버렸으며, 그리고 원자폭탄으로 숨졌거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의 기록, 그리고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고간 조선여성들의 명단을 은폐하였고, 관동대지진 때 극심한 혼란을 안정시키려고 온갖 유언비어를 날조해 국민들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향하도록 하여 소위 마을 자경단들이 아무런 죄없는 조선인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6000여명 이상을 학살하도록 조장했던 그 기록 역시, 그 어디에도 남겨 놓지 않았다.

▲ 아힘나 임수진 기자의 질문을 받고 있는 이누까이 목사(오른쪽)
ⓒ 김종수

그래서 이누까이 목사님은 휴우가묘소에 묻혀있는 조선인들의 신원을 밝혀내는 일이 남은 여생에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들이 억울하게 숨져간 조선노동자들의 인권이 회복되는 길이며, 또한 이 일이 바로 나의 인권이 회복되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어찌 한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랴? 반가운 것은 이 지꾸호의 양심적 일본인들도 지꾸호에 묻힌 수많은 조선인들의 인권을 위해 그들의 신원을 밝혀내는 일에 나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양쪽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역사를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말고 강제연행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의 신원만이라도 밝혀 주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한국정부 역시 기민정책으로 일관했던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식민지 백성으로서 당해야만 했던 재일동포들의 서러움과 그 맺힌 恨을 풀어드리기 위해 지금이라도 일제의 만행을 드러내는 일에 조금더 주저해서는 안될 일이다.

▲ 한국에서 가져간 흙을 무덤 주변에 뿌리고 있다.
ⓒ 김종수

ⓒ 김종수

아힘나의 아이들은 미리 준비해 간 고국의 흙을 무덤 주위에 뿌리고 한반도기와 태극기를 꽂고, 이 곳에 묻힌 우리 선조들의 恨과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의 미래에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역사에 대한 책임과 현재 우리가 해야할 책임을 다하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미래의 역사를 스스로 써 나가기를 다짐하면서 아린 가슴을 안고 휴우가 묘소를 내려왔다.
아힘나 평화학교(대표 조진경)는 경기도 안성에 위치해 있으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하여 세워진 비인가 중고등과정의 작은 학교이다. (031-674-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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