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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희의 조선 왕릉

단릉(單陵)<1>"내 고향 함흥에 나를 묻어다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1.06.30|조회수332 목록 댓글 0

 

 

“내 고향 함흥이 그립구나. 내가 죽거든 함흥땅에 묻어주겠나….”
태조 이성계는1408년 5월 24일 새벽 창덕궁 광연루 아래 별전에서 7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그는 사후 한양 땅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한양 도성은 이미 그에게는 정 떨어진 곳이었다.

1398년 8월 25일,
급보를 접한 태조 이성계는 억장이 무너졌다.
다섯째 왕자 '방원'(芳遠·후일 태종대왕)이 배 다른 형제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이고
왕조 개국 일등공신들인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을 철퇴로 주살했다는 것이다.
평소 지니고 다니던 신궁(神弓) '백우전(白羽箭)'을 얼른 집어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 이미 태조는 병이 깊었던 것이다.  조선을 개국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태조는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왕위를 둘째 왕자 '방과'(芳果·정종대왕)에게 물려주고 왕사인 무학대사와 양주 회암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대체 임금 자리가 무엇이기에 어린 동생들까지 죽여야 한단 말인가.
내 이럴 줄 알았으면 호랑이 같은 방원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건데….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걸 어찌 하겠는가."
얼핏 태조의 독백을 들은 무학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상왕 전하, 부디 마음을 내려놓으소서. 돌이켜 보면 인간사 모두가 공망한 것 아니겠사옵니까.
이제부터는 난마같이 얽힌 정사를 모두 잊으시고 남은 여생을 편히 쉬소서."

이방원이 제1,2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끔찍하게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혈제들간에 그 끔찍한 유혈의 권력투쟁이 벌어졌던 한양이 싫었다.

자식들의 피로 얼룩진 한양을 훌쩍 떠나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편하게 잠들고 싶었다.

그가 묻히고 싶었던 곳은 오로지 고향 땅 함흥이었다.

"내 고향 함흥에 나를 붇어달라"

태조는 아들 방원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그는 간절한 유언을 남긴 것이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고향 땅 함흥에 모실 수 없었다.

조선의 도성 왕궁은 한양에 있는데 어떻게 태조의 왕릉을 함흥에 모신다는 말인가.

해마다 가야 하는 수 천리 능행길이 난감하였다. 왕권통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태종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검암산儉巖山) 자락 명당에 태조의 유택을 결정한다.

“이제는 근심 걱정이 다 없어졌다”

태종은 검암산 아래 아버지 태조의 유택을 확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으면서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태조가 조성한 수릉을 번복한 뒤 태종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오늘날 망우리(忘憂里) 고개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그렇다고 태종의 근심이 완전하게 풀린 것은 아니였다.

"내고향 함흥에 날 묻어달라!"

그토록 절실하였던 아버지 유언이었다. 잠시도 잊을 없었다.

비록 태조의 왕릉은 어쩔 수 없이 한양 가까운 곳에 모셨다.

아버지가 그토록 가 묻히고 싶어했던 함흥 땅에서 나는 억새를 가져와 태조의 봉분 위에 심었다. 

태조의 건원릉은 다른 능과는 달리 벌초를 일 년에 단 한 번만 한다. 

억새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다. 
억새는 해마다 뿌리를 내리고 다시 피어나 꾸준히 이성계의 곁에서 그의 한 어린 향수를 달래고 있다. 
그래도 태조 이성계는 외로워 보였다. 그 두 명의 부인도 지금 그의 곁에는 없었다.
그 큰 현궁(玄宮)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단릉(單陵)이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다.

태조 왕후능이라면 그에 맞는 위의가 있어야 할 텐데 초라하고 외롭게 느껴진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두었다.
강씨는 당시 개성에 이성계와 함께 살던 경처였다. 강씨는 조선 개국과 함께 현비(顯妃)로 책봉되었다.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혔다.

태조는 한양 도성 안 경복궁 서남방의 황화방(皇華坊 정동 영국대사관 일대)에 신덕왕후의 능침을 만들었다.

그는 강씨 능침 우측에 자신의 능침인 수릉(壽陵:생전에 미리 정해놓는 무덤) 우허제(右虛題)까지 마련했다.
수릉의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

태조가 정성 껏 조성한 정릉은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방원이 즉위하면서부터

경기도 양주(서울 정릉동)으로 천장, 최악의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그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게 했다.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돌다리)에 사용하였다.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썼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함흥 칩거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잡아 놓은 수릉지역이 심하게  훼손돠어 버린 데 눈물을 흘린다.

그 태조 이성계가 승하했다.

당장 태조를 모실 마땅한 왕릉 터가 없었다.

태종은 창덕궁 동남쪽에 있는 왕자의 독서실에 여막을 정하고 날마다 ‘주자가례’의 예를 보았다.

태종은 풍수에 능한 조정대신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한양 백리 안에서는 태조의 왕릉 터 잡기가 벌어졌다.

태조의 국장 총책임자인 총호사는 태종의 풍수고문인 영의정부사 하륜(河崙)이 맡았다. 

하륜은 국풍들을 대동하고 왕릉택지에 골몰하였다.

"내가 사는 검암(儉巖)에 길지가 있다."

조정대신 김귀인이 천거한 것이다.
하륜은 김귀인의 천거를 듣고  양주의 검암(儉巖)으로 달려갔다.

과연 검암은 명당 중 명당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태조의 왕릉 능역 건설은 당시 최고의 기술자 박자청(朴子靑)이 담당했다. 

박자청은 왕실 내시 출신으로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청계천의 살곶이다리 등을

명작으로 남긴 조선 최고의 건축가이다.
산릉 건설에는 충청 황해 강원도에서 6000여 명의 기술자가 동원됐다. 
건원릉의 석실은 회격실과 전실 등이 논의됐지만 석실로 최종 조성됐다. 
유교를 국시로 했으나 태종은 산릉 재궁에 개경사를 세우고 

검암산 아래 지금의 재실 위쪽에 원찰을 조성했다. 
태조의 조문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와 임관 등이 건원릉 능침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 것인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형 같다”고 감탄했다. 
태조가 조성한 수릉을 번복한 뒤 태종은 참으로 마음을 꽤 졸였던 것으로 전한다. 
태조 승하 2개월 뒤인 6월 28일에야 산역을 시작했다.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5월 24일 승하한 태조의 장례는 9월 9일 치렀다. 
태조가 승하하자 왕릉택지에서 장례까지 태종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곳곳에 알 수 있다. 

 

 


탁 트인 열린 건원릉의 경관이다.

신하가 읍조리는 능선 건원릉은 능침을 둘러싼 송림과 능침 앞으로 시야가 탁 트인 경관이 아름답다. 

풍수사들은 앞에 펼쳐진 능선들은 신하가 읍조리는 형상이라고 했다.

여러 겹의 능선을 꽃잎, 능침을 꽃심으로 보았다. 

그 명당에 묻힌 이는 깊디 깊은 사연을 안고 그 땅에 잠들어 있다.

역성혁명의 기회 앞에서는 무자비하게 피 흘리며 왕조를 창업한 그다.

그는  권력의 정상에서는 자식들의 골육상쟁으로 필부필부(匹夫匹婦)만도 못한 고통과 회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찍이 정적 관계였던 '포은 정몽주'는 태조를 일컬어 "풍채는 헌걸차고 씩씩하여 화산(華山)의 용골매요,
지략은 깊숙하고 두드러져 남양(南陽)의 와룡(臥龍)이다" 라고 했다.
태조는 한평생 군인으로 팔도강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지만 늘 함흥 고향땅을 잊지 못했다.

태조는 74세를 향수하는 동안 2명의 왕후에게서 8남 3녀, 1명의 후궁에게서 2녀를 두었다.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은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했고

현재 북한의 개성군 판문면 상도리에 있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정릉(貞陵)은 서울 정릉동에 홀로 있다.   

그 곳은 그토록 사랑했던 경처 강씨의 정릉 곁에도 아니다.

또 몹시 그리던 함흥 땅도 아닌 한양 근처 검암 자락이다.

그 건원릉으로 홀로 가게 된 사연은 오늘도 그의 능침 위의 억새 풀이 되어 계속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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