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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희의 조선 왕릉

능침공간의 석물(1) 병풍석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1.07.06|조회수1,791 목록 댓글 0

 

 

조선의 왕릉은 봉분 둘레에 병풍석과 석난간을 둘렀으며 그앞에 석양과 석호 등 석수를 배치하였다.
유교와 풍수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장묘문화의 공간으로서 왕실의 장례와 제례 등을 조명할 수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풍부한 것으로 유네스코는 높게 평가했다.
조선왕조의 왕릉은 기본적으로 태조의 건원릉의 배치 방식을 따랐다. 이를 정형화시켜 놓은 것이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議)>이다. 건원릉의 형식은 중국의 성왕(城王)의 무덤 형식이다.

무척 웅장하지만 황제의 능에는 못 미친다. 감히 중국대륙을 다스리는 황제의 능과 맞먹을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 때 몽고의 지배 아래서는 이런 왕릉의 형식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으며 고려 말에 자주국가를 선언한

공민황 때에 이르러 비슷한 형태가 갖춰졌다.건원릉은 고려 공민왕의 현릉과 정릉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며

고려왕릉에 영향을 준 신라왕릉의 병풍석 역시 능침을 보호하기 위하여 큼직믐직한 자연석을 능침둘레 군데군데

박아 놓은 고구려왕릉의 호석(護石)제도를 이어받은 제도이다.

 

 

 

능침 공간은 장대석으로 구분하여 3개의 단층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위로부터 상계(上階)·중계(中階)·하계(下階)라고 부른다. 상계는 초계(初階)라고도 한다.
이렇게 능침공간을 3단으로 나누는 것은 도교에서 유래된 태계(泰階) 즉 하늘에 있는 3계에 비유된 구조이다.
상계는 천자(天子), 중계는 제후(諸侯)와 공경(公卿), 하계는 서인(庶人)으로 그 타고난 자질을 구분한 것과

견주어 상계는 봉분 중계는 문석인 하계는 무석인이 배치되어 3계의 조화로 천하가 평안해 진다는 의미이다.
상계에는 여러 상설이 배설되어 있다. 상계에는 왕릉의 핵심으로 봉분의 좌우와 뒷면 3면에 곡장이 둘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어 위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내룡(來龍)으로 이어진 것으로 북현무에

해당하는 산세와 조산으로 이어져 지기를 받게 되어있다. 능침인 봉분은 보통 방위를 나타내는 12면의 병풍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병풍석에는 12지(十二支)의 그림과 글자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 주변으로는 양석·호석·혼유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이 능침공간 역시 봉분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는 생기(生氣)를 조절하는 풍수장치로 작동하게 조영한 것이다.

 

 

억울하게 숨저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하는 정조의 생각이 융릉 곳곳에 묻어난다.
능상의 곡장안에 봉분과 병풍석 각종 석물이 장엄하고 화려한 게 최고의 왕릉으로 꾸미고 싶어한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같은 격의 어느 원보다도 훌륭히 꾸며

능 주위에 병풍석을 돌리고 혼유석과 팔각 장명등 문무인석을 세웠다.

융릉에만 소나무 45만 그루를 심었다.
궁궐의 세련된 의장과 최고 석물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
“난간석이나 병풍석 등에 대하여 선조(先朝)의 금령(禁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지 최고의 제도를 쓰려다 보니 준수하지 못하였다"

정조가 아버지 묘역을 조성하면서 실토한 말이다.
당시로사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에게는 병풍석이나 난간 등은 조성할 수 없는 것이다.
융릉 봉분의 병풍석과 석물.융릉 봉분의 병풍석은 목단(牧丹)과 연화문(蓮花紋) 등
화려한 문양을 하고 있으며 석물의 조각 역시 정교하다.

 





 

 

 

 

 

 

 

 

 

 

 

 

병풍석은 사대석(莎臺石)이라고도 한다. 사(莎)는 왕릉을 호위하는 사성(莎城)이다.

왕릉은 죽은 왕의 궁궐 현궁(玄宮)이라고 했다. 병풍석은 3부분으로 되어있다.

가장 아랫 쪽 돌은 지대석(地臺石)이다. 윗부문은 만석(滿石)이다.

만석과 지대석 사이에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큰 돌은 면석(面石)이다.

정사각형 모양의 작은 부분은 우석(隅石)이다.

면석과 면석을 이어주는 각이 진 불쑥 튀어나온 석물을 인석(引石)이라고 한다.

맨 아래바닥을 두른 넓은 돌은 박석(薄石)이다.

오른쪽 사진은 면석에 12지 신상을 그려넣은 모양이다.

 

 

융릉은 병풍석이 있으나 난간석이 없다. 조선 왕릉으로는 유일한 형식이다.
능침을 둘러싼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이곳의 인석(引石·병풍석 위에 얹은 돌) 끝에 조각된 연꽃은 조선시대 최고의 연꽃 조각으로 평가된다.

융릉의 석물은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40기의 조선왕릉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
세조의 유언에 따라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성됐다. 세조의 능은 우람하지 않다.

석곽을 쓰지 않고 관을 구덩이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졌다.
무덤 둘레에 병풍석도 없다. 병풍석에 새겼던 12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얼핏보면 여느 왕릉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조금만 잘 둘러보면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3대 태종의 헌릉과 불과 4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광릉이다.
이 두 왕릉을 조성할 때  든 인력은 6천 명이나 차이가 난다.
왕릉 조성은 인적. 물적 대역사다. 그중에 석실을 만드는 데는 그만큼백성의 부담이 컸다.
기록에 의하면 태종의 석실을 만드는데 부상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헌릉을 조성하면서) 만 오천명이 부역하고 백 여 명이 죽었다."   <세종실록>
세조의 광릉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이 석실 아닌 회격릉 형식으로 바뀐 것을

한영우교수(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유교사회에 애민, 민본사상과 관련 있습니다.

백성을 위한 정치, 왕실의 사치는 용납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검소하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왕릉의 사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후 조선왕릉에서는 병풍석에 대해서는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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