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마지막 왕 순종의 유릉은 참으로 특이하다.
조선왕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으로 배치된다.
홍살문과 정자각이 엇갈린 경우는 있으나 대부분 정자각과 봉분은 일직선을 이룬다.
유릉은 침전에서 왼쪽으로 치우진 쪽에 봉분이 보인다. 침전에서 윗쪽에서 'ㄱ'자로 껵였다.
유릉은 능침-침전-홍살문 등이 직선으로 배치된 홍릉과도 다르다.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의 축이 각기 다르게 배치됐다는 점이 눈에 드는 대목이다.
이런 모양은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장릉이 유일하다.
유릉은 풍수가 사이에서 길지(吉地)니, 흉지(凶地)니 의견이 분분한 곳이기도 하다.
홍유릉의 주산 묘적산(백봉)에서 흐르고 있는 맥세다.
능에서 바라보이는 청룡의 한 가지는 잘 감아준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은 그저 피상적일 뿐이라는 지적이다.그야말로 지엽에 불과한 것이다
청룡의 본신 (ㄴ)은 앞쪽으로 달려 나가서 순종의 유릉에 이르고 있다.
이 흐름은 능(陵)과는 아무 관계없이 곧게 도망가는 형태라는 것이다.
유릉의 앞뒤에 형성된 4개의 가지 역시 아무런 원칙도 규칙도 없이 제각각 행동할 따름이다.
홍릉에서 보면 비주사(飛走砂)다. 유릉에서는 산산사(散山砂라고 할 수 있다
비주사는 산이 달아나기 바쁜 형상이고 산산사는 산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형태를 말한다.
유릉은 산의 끝 부근이 아닌 산줄기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주산에서 내려오던 산줄기가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생긴 약간 두툼한 곳을 혈장이라고 판단하여
능을 조성한 것이다. 유릉은 산줄기가 재실의 뒤를 지나 주차장까지 흘러나가 5대 불가장지의 하나인
과산(過山)이라고 한다. 산의 기운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산이 과산인 것이다.
홍유릉에서는 백호까지도 안으로 감아주지를 못하고 밖으로 휘어지고 있어
기를 안으로 죄어주지 못해 5대 불가장지의 하나인 과산을 이루고 있다는 진단이다.
"과산은 주산에서 내려오는 좋은 기운이 유골에 전해지지 못하고 앞으로 흘러내려가며
주산에서 내려오는 강하고 딱딱하고 거친 기운의 영향만 미친다는 불가장지다." -최낙기 선문대 교수-
조선의 풍수를 멋대로 재단하고 훼손하는 데 앞장 선 일본인 무라야마 지쥰의 흉계가 잘 들어난다.
유릉 비각의 비도 다른 왕릉의 비와 다르다.
비문은 대한(大韓)이라는 두 자가 빠졌다.
순종 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좌라고 전서체로 음각되었다.
유릉의 능침공간이다. 저멀리 주산 묘적산(백봉)이 유릉을 지켜주고 있다.
주산 묘적산과 유릉의 혈자리가 너무 멀고 맥세가 감싸고 도는 감이 없어 흠이라고 했다.
기세 좋게 치고 뻗어가는 용맥의 기세가 아니라 힘없이 축 늘어진 죽은 뱀과 같다는 혹평이다.
유릉은 순종과 비 순명효황후 민씨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를 합장한 조선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이다
유릉은 황제와 황후 2명의 현궁이 함께 있는 합장릉으로 이제까지 지켜졌던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제일 왼편에
황제의 재궁이 있어야 하나, 이곳은 다르다. 가운데 순종 우측에 순정효황후 좌측에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두어 우
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중국 황제릉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평소 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된 상태이다. 순종이 남긴이 유언이다.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순종은 그 해 6월 10일 발인하였다.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조선의 마지막 왕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