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연미와 가장 잘 어울리는 한국적인 건축미를 자랑하는 궁궐 창덕궁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등지고 벌판에 우람하게 건물을 일자로 배치한 경복궁과는 아주 다르다.
창덕궁은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흐름을 타고 아담한 건물을 배치했다.
우선 정문 돈화문이 중앙에서 비켜서 서쪽 끝자락에 배치한 점이 시선을 '확!' 끌고 있다.
건물 배치가 인위적이지 않고 그 산세를 타고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루고 있다.
창덕궁을 지을 때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매봉에서 치고 내려오는 지맥이 강하고 산줄기
기운도 세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선대왕의 신위가 있는 종묘로 들어가는 지맥을 건드릴
위험도 있다. 지맥을 훼손시키면서 경복궁처럼
일자형으로 전각을 배치할 수 없었다.
자연지형을 살리고 지맥에 손상을 주지않게
지그재그형으로 건물을 배치할 수 없었다.
돈화문을 들어서 제 1마당을 지나 금천교에서
오른쪽으로 꺽어 진선문을 통과하도록 하고 있다.
진선문을 통과해 제 2마당에서는 인정문 앞에서
또 왼쪽으로 꺽어야 인정전을 입장할 수 있도록
궁궐을 설계 건축하였다. 또 인정전에서 선정전을
가려면 오른쪽으로 꺽어야만 되는 철저하게
지그재그형의 건물배치를 한 것이 바로 창덕궁
이다. 정문 돈화문에 들어서서는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90도 꺽어 금천교를 건너서도 마찬가지다.인정문을 지나야 주요 건물들이
눈에 들기 시작한다.여기서 창덕궁의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나고 인간미가 묻어난다.
이렇게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고 한국적인 자연의
멋을 한껏 살려 지은 인간미 넘치는 궁궐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자연과의 어울림과 개성을 가진 가장 멋진 한국의 궁궐로 꼽히고 있다.
사학자 한영우는 그의 책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에서 동궐을 아래와 같이 예찬한다.
“창덕궁과 창경궁에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인공을 최대한 줄이면서 생활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한국 정원의 특색이 가장 전형적으로 발휘되어 있다. 위압은 주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극히 인간적이고 안락한
궁전이랄까. 이는 중국의 자금성이나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등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우리 궁궐의 독특한 미(美)다.”
창덕궁에는 주변의 산세가 화려하게 넘실댄다. 풍수가들은 최고의 명당에 들어선 창덕궁이라고 예찬한다.
삼각산을 지나 보현봉에서 움틀거리는 기세가 힘차고 아름답다. 그 세찬 지맥선은 응봉자락에서 살아나
창덕궁으로 꿈틀대며 들고 있다. 힘차게 뻗어내려온 기의 흐름을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건물을 자연 속에
집어넣은 지혜가 돋보이는 창덕궁이다. 그래서 세종은 그의 아드님 문종에게 " 이 도성(都城)의 바른 명당
(明堂)은 바로 창덕궁이다."고 하셨는지 모른다. 창덕궁관리소장을 역임한 최종덕 문화재청 국제교류과장은
그의 책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에서 창덕궁을 말한다.
"창덕궁은 산자락에 지어진 '산중 궁궐'이다.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5천여평의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기하학적으로 궁궐의 배치를 통제하는 인위적인 축이 없다. 지형이 생긴 대로 건물이 놓인 가운데 건물 사이의
관계는 엄정한 질서와 균형을 가지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잘 짜인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창덕궁은 궁궐 건축이라는 원칙에 근거한 권위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한 선조들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응봉의 자연 지세를 그대로 살려 지은 창덕궁은 특히 후원의 아름다움이 그 빛을 더욱 발하며
건축과 조경이 조화로움이 세계 제일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조선의 여러 임금들도 창덕궁을 사랑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 때문에 명당이 아니기 때문에 북악산과 인왕산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등등
왕들이 경복궁을 기피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500년이 넘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임금들이
오랫동안 거처한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조선의 임금들 또한 자연과 함께 한 창덕궁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을 것이다. 자연 경관이나 생김새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건물을 짓고 부수어 버리는 요즘
창덕궁의 건축미는 우리에게 더욱 감동을 창덕궁은 자연과의 어울림과 개성을 가진 멋진 한국의 궁궐이다.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다.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가 자리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모습이다
인정전 북쪽에 힘차게 불쑥 솟은 잉(孕)이 기세 좋게 형성되어있다. 그 지맥 태식은 종묘로 힘차게 뻗어가고 있다.
인정전과 선정전은 건물 축을 같게 나란히 배치되어있다. 그러나 대조전과 희정당은 축을 약간 다르게 두고 있다.
이는 종묘로 가는 지맥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로 본다. 동궐도를 보면 임금의 침전은 확실히 인정전 뒷쪽에 있다.
대조전은 아니다. 임금이 주무시던 공간이 대조전은 아니다. 건물구조나 기능으로 볼 때 집상전(集祥殿)이 임금의
침전이다. 태종은 즉위하면서 바로 태조의 뜻을 받들어 한양으로 재천도를 강력하게 추진 하였다.
신료들의 반대도 만만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집요하게 재천도를 추진하던 끝에 1404년 (태종4) 10월에는 직접
재천도의 후보지의 하나였던 무악을 둘러보러 나섰다.이때 태종은 마음속으로 이미 한양으로 갈 것을 정해 놓았기에
무악을 둘러본 것은 단지 반대 의견을 재압하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태종은 종묘에 들어가서 세 후보지
곧 개경 한양 무악의 길흉을 점쳐 정할 것이니 결정된 뒤에는 이의를 달지 말라고 뒷다짐을 하고 측근 다섯사람만을
데리고 종묘에 들어가 동전을 던져 점을 쳤다. 결과는 한양이 2길 1흉, 개경과 무악이 모두 1길 2흉이었다.
태종은 의논이 정해졌다고 발표하였다. 마침내 향교동 동변 종묘 뒤쪽에 궁궐자리를 정하고 새 궁궐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였다. 사당 종묘도 명당 집을 유지해야 했다. 이궁 창덕궁도 명당 집으로 만들어야 했다.
풍수상으로 응봉에서 흘러내린 지맥선을 해치지 않게 건축물을 배치한 창덕궁이다. 산줄기의 기운을 온전히 받기위해
뒤산을 손대지 않고 자연속에 배치된 창덕궁이기에 조선의 왕들이 가장 좋아하였던 궁궐이 된다.
성종은 풍수상 문제가 많은 경복궁을 아예 떠나 창덕궁으로 완전히 이어한다. 풍수학자 장영훈의 말이다.
"제 9대 성종은 경복궁 풍수지맥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통째로 피접해온 것이 창덕궁 이어(移御)였다.
창덕궁이 경복궁을 제치고서 실질적인 권력 왕궁이 된 것은 풍수덕택이다. 그것은 지맥선이 워낙 출중했던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