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궁궐에도 궁녀(宮女)가 있었다.
궁녀란 궁중 여관(女官)’의 줄임말로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공무원이다.
궁녀는 조선시대의 최고급문화인 궁중음식 궁중복식 궁중자수 궁중육아 등 궁중생활문화를 전승하고
창조한 주역이었다. 왕의 사적 생활과 밤 생활은 궁녀에게 달려 있었기에 궁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컸다.
궁녀가 정치적 야심가들의 표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며 왕의 최측근인 지밀궁녀와 제조상궁이
야심가들의 표적이었다. 왕의 사생활을 조종하거나 왕의 동정을 염탐하려는 권력에 치부하려는 자들은
지밀궁녀나 제조상궁을 포섭하려고 했다. 지밀(至密)에서 근무하는 궁녀들이 지밀궁녀였다.
지밀궁녀 중에서 최고궁녀가 제조상궁이었다.
침실에서 근무하는 지밀궁녀야 말로 왕의 밤 생활을 지키는 측근 중의 측근이었으니
이들이 야심가의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궁녀는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결혼을 하지 못한다.
조선 시대 궁궐에 사는 모든 여자는 왕의 여자로서 살아야 하니까.
조선시대 궁녀의 수는 적을 때에는 300 정도, 많을 때는 700이상이었다고 한다.
그 많은 궁녀 중에서 왕의 눈에 들어서 왕의 잠자리 수청을 들었던 궁녀는 10명도 채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궁녀의 일이 편하지도 않았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왕실의 예법에 규제된 생활만을 해야했다.
평생을 질시와 투기가 만연하는 궁전안에서 살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조선시대의 일반 백성출신인 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왕궁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궁녀는 국가에서 강제로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의사를 물어서 입궁시킨다.
그럼 왜 자신의 딸들을 궁녀로 보내려고 했을까?
이유는 보릿고개조차 넘기기 힘든 가난 때문이다. 가난한 백성은 자신의 딸을 궁으로 보내어 얼마안되는
국록이라도 받고 딸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궁녀들은 어릴 때는 5-6살, 보통은 10살 정도에 궁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 궁에 들어온 궁녀들은 견습생 신분이다. 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왕실의 예법과 서법 다도 등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견습 나인들을 <생각시>이라고 한다. 견습 나인이 지나면 성년식을 거쳐 정식 궁녀가 된다.
정식 궁녀를 <나인>이라고 한다. 나인이 되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견습나인들이 나인을 부르는 명칭은 <항아님>이라는 칭호다.<나인>은 자신의 독립된 방을 가질 수 있고,
하녀도 둘 수 있다. 나인의 하녀를 <방아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때 궁녀가 되기 위해 입궁하려면 가장 먼저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앵무새 피를 이용하여 처녀 유무를 단정짓는 "금사미단" 이 바로 그것이다.
궁에서 의술을 보조하는 의녀가 앵무새 피를 궁녀가 되려는 아이의 팔목에 한방울 떨어뜨려
흘러내리지 않고 그대로 잘 묻게되면 처녀라고 단정지어 궁녀가 될 자격을 주었다.
앵무새 피가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여겨져 가차없이 내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렇게 금사미단에서 처녀로 단정지어져 궁녀가 되면 나랏님이라고 일컫는 하늘보다 더 어려운
임금님의 생활공간에서 오르지 임금님을 모시는 궁녀로서 궁안에서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궁녀가 갖추어야 할 도덕 하나부터 열까지의 모든 면과 또한 몸가짐부터 마음가짐까지
철저하게 교육을 받게된다. 이 두가지 과정을 통과한 후에서야 궁녀다운 일을 하게된다.
보직상궁으로부터 자기가 해야할 임무를 명 받아 정해진 각 처소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렇게 일을 시작하면 궁녀들은 대부분 궁궐안에서 격일제로 임무를 맡아서 일하게 된다.

야간 당번을 서야했던 지밀(至密)같은 경우에는 하루를 주야로 나누어 두 교대로 맡은 일을 다해야 했다.
이를 흔히 "번(番)살이" 라고 한다.이 번살이는 이미 궁녀들의 견습나인 시절부터 시작한다.
견습시절에는 야간근무는 하지 않고 낮에만 나인들의 보조자로서 일을 맡아서 하였다.
지밀에서 일하는 궁녀들의 번살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는 관례를 올린후부터 시작된다.
번은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두 명씩 네 명이 밤낮으로 교체되었으며 일정기간이 지나면 낮과
밤의 담당자들이 서로 교체된다. 교대 시간은 오후 3시 또는 4시 그리고 새벽이었으나 계절에 따라 다소 달랐다.
그밖에 지밀 이외의 다른 곳에서 일하는 궁녀들은 격일제로 근무하였으며 비번일 때는 자신들의 처소에서
개인 생활을 영위하였다.수많은 궁녀들은 정해진 처소에서 일을 하였다.
특별히 보직을 받지 못한 흔히 일반상궁이라고 하는 이 상궁들이 각 처소에 배치되어 궁녀들을 통솔하였다.
그러면서 보직 상궁들의 지시를 받아업무를 처리하였다.보직 상궁이 대개 5품직을 받은 고참이다.
일반상궁들은 6품 벼슬을 받은 상궁들로서 궁녀들은 이들을 "마마님" 이라고 불렀다.
그런가 하면 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던 관습으로 궁녀들에게는 또 다른 슬품이 있었다.
이는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나거나 홍수 또는 지독한 가뭄이 일어나면 궁녀들을 궁에서 내치는 출궁제도가 있었다.
일부 궁녀들은 어찌 할 수 없이 궁에서 나가는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은 고대 중국에서 생긴 풍습이 전해진 것으로 조선에서도 곧잘 중국의 이 풍습을 들먹이며
종실과 신료들로 하여금 궁녀들을 내보곤 하였다.
출궁제도에 의해 내 보내진 궁녀들 중에서 거처가 마땅치 않다거나 세월이 좋아지면 다시 불러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의 궁녀들에게는 자신이 언제 희생될지 모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럼에도 정해진 처소에서 맡은 바 소임을 쉴새없이 다하며 삶을 살았다.
이는 임금님의 사랑 즉 승은을 입는 것이 하나의바램으로써 그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지내는 궁녀들의 최대 희망은 임금님의 승은이었고
승은을 입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신분이 높아지는 의미이기도 하다.
왕자나 옹주를 낳는다면 후궁이 되고 또 혹여 권력을 잡을 수만 있다면 왕비 못지 않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왕비의 지라에 오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바로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는 것이다.
승은을 입은 궁녀라 하더라도 모두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승은을 입더라도 임금의 눈길을 받지 못해 왕자나
옹주를 낳지 못하면 내명부의 품계 작위를 받을 수 없도록 내명부 규칙이 정해져 있어 후궁에 오르지 못하였다,
대신 승은을 입었기에 궁녀라는 신분에서는 벗어나 새로운 자리에 오르는데 바로 특별상궁이란 자리이다.
이 특별상궁은 흔히 마마님이라고 불리는 일반상궁과는 차별화된 대우를 받은 상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궁녀에서 후궁에 오른다는 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