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는 여인네들의 머리모양을 단속하고 규정해 놓은 기록이 있다
나라에서 직접 여성들의 머리모양까지 규제를 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당시 조선에서는 풍성하고 높은 머리모양이 아름다워 보였는지 가체(加髢)가 크게 유행했다
가체는 부녀자가 성장 할 때 머리 숱이 많아보이게 덧드리는 다른 머리이다.
흔히 다래 또는 다레라고 하나, 표준어는 다리다. 한자로는 체(髢)라 하고, 월자(月子)라고도 한다.
가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가체는 지금의 용도와는 달랐다.
지금은 머리 숱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발을 이용하고있다.조선시대에는 부의 상징이 바로 이 가체였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부귀할 수록 이 가체가 더욱 컸다.크면 클 수록 자신의 부를 과시할수 있었다.
지금식으로 말하자면 명품 가방이나 안경 같은 조선시대 여인들의 사치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체는 신라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성덕왕22년(723) 여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과하마 한 필과 우황 인삼 다리 조하주 어아주
매를 아로새긴 방울 바다표범 가죽 금은 등을 바쳤다."
"여성의 두발을 대량으로 보냈다." 가체에 관한 다른 기록도 있다.
가체가 일반화 되고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고려시대 였다.
몽골도 '가체의 풍습' 이 있어서 우리나라에 몽고식 가체가 전래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체가 이때부터
일반화 되고 많은 여인들이 쓰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여인들에게 가체는 절대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가체가 사치품으로 크게 사용 되면서 그만큼 폐해도 많이 잇따랐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가체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지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머리장신구의 발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가체금지령이다.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무거워져 사치의 원인이 되는 가체 풍속을 없애고자 영조와 정조 때에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얹은 머리 대신 쪽진 머리가 일반화 되었으며 다양한 재료의
비녀와 뒤꽂이가 유행했다. 궁중에서도 예장시 큰머리에 얹는 가체대신 목제 가발인 떠구지를 사용하게 되었다.
점차 화관과 족두리를 착용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왕비를 비롯하여 내외명부가 머리를 치장할 때 사용하던
장신구인 첩지는 이러한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왼쪽 사진은 떠구지이다.
떠구지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비빈들이
큰머리를 틀 때 사용하던 머리틀이다.
사대부가에서도 혼례 시 떠구지를 사용하여
큰머리를 올렸다. 큰 머리를 올릴 때 예전에는 머리카락으로 만든 다리(月子)를 사용하여
큰머리를 만들어 얹었다. 정조 때 가체(加髢)가 금지되면서 나무로 만든 떠구지를 사용하게
되었다. 떠구지는 나무 표면을 머릿결처럼
조각하고 검은칠을 한다. 아랫부분에는 비녀를 꽂을 수 있는 2개의 구멍이 뚫려있다.
왼쪽 사진은 첩지이다.
첩지는 조선시대 왕비를 비롯한 내외명부
(內外命婦)가 사용하던 머리 장신구이다.
궁중에서는 신분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해 평상시에도 첩지를 사용했으나 사대부 부녀들은
예장(禮狀)을 갖출 때만 사용하였다.
첩지는 화관이나 족두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장식과 재료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왕비는 도금한 용(龍)첩지를 쓰고
비.빈은 도금한 봉황(鳳)첩지, 내외명부는 신분에 따라 도금하거나 흑각(黑角)으로 만든 개구리 첩지를 사용하였다.
첩지는 머리 중앙의 가르마 앞부분에 얹고 양쪽 다리(月子)를 귀 뒤로 넘겨 쪽을 쪘다.
조선시대 머리의 종류는 큰머리 어여머리 얹은머리 새앙머리 첩지머리 쪽진머리 땋은머리 등이 있어 지체와 때에 따라 달리 하였다. 가체는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부녀자 수식의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고 영조 때를 전후 크게 성행 사회문제화되자 영조 32년 족두리를 사용토록 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8년 만에 중단된다.
1788년(정조 12)에 다시 금지령을 내렸으나 이루어지지 않다가 순조 때에 비로소 사라졌다.
자기머리만으로 쪽진머리는 순조(1800. 7-1834. 11) 중엽에 가서야 정착되었다.
지체 높은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쓰는 가체는 가격이 7~8만 냥이 기본으로
이는 중인(中人)들이 사는 집 10채 값과 맞먹는 것으로 집 10채를 머리에 이고 산 셈이다.
이 가체를 크고 화려하게 치장하다보니 그 무게 때문에 13살 먹은 신부가 목이 부러져죽는 믿거나
말거나한 사건도 있었다. 조선의 풍속화에 나타난 그림에서도 가체의 크기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머리단장에 각종 보석류로 만든 현란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많은 머리카락이 필요했기에 머리카락이나
각종 보석류의 가격은 물론 다른 물건값까지도 덩달아 천정부지로 치솟아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가난한 유생들 집에서는 며느리를 얻어도 최소 60-70냥, 모양을 갖춘 물건은 수 백 냥이나 하여
가체를 살수가 없어 시집 온지 6, 7년이 넘도록 정식으로 시부모를 뵙는 예를 행하지 못하는 일이 수 없이 많았다.
가체가 사회문제화 되자 정조 12년(1788. 10) 국법으로 가체를 쓰지 못 하도록 하고 대신 족두리(원래는 원나라에서
부인들이 나들이할 때 머리에 쓰던 모자)를 쓰도록 하였다. 그것도 또 치장을 할까봐 족두리는 검은 천으로만
싸도록 하고 결혼시라도 칠보 등으로 장식한 족두리 사용을 금하고 포도청에서 규찰토록 하여 어기는 자는
엄하게 다스려 유배토록 하였지만 구한말까지도 가체를 사용하였다.
1970년대 정부의 대대적인 장발단속도 여성의 헤어스타일 단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