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대처분'하기로 결심한 그날 창덕궁 인정전 뒤쪽 선원전에 들린다.
선원전 아버지 숙종의 어진 앞에 '아들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고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정성왕후의 휘령전으로 사도세자를 불러 '반란죄'를 추궁하고 끝내 뒤주 속에 가둬 죽게한다.
EBS TV 평생대학 <역사이야기>에서 정병설교수(서울대)가 강의한 '사도세자, 그는 왜 죽었나?'를
중심으로 사도세자의 '대처분' 상황을 정리 재구성해본다.
1762년(영조 38) 5월 22일. 윤급의 청지기인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십 여 가지 조항의 상소를 올린다. 영조실록에 남아있는 6개의 조항을 보면, 후궁 빙애를 죽인 일, 여승을 궁으로 끌어들인 일, 궁을 함부로 떠나 평양을 다녀온 일, 북한산성으로 놀러 다닌 일, 세자가 서울 시정에 빚을 진 일, 그리고 반란혐의가 기술되어 있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을 듣고 반란혐의에 관해 걱정하긴 했으나 사도세자를 공격하려는 세력의 모략일 것이라고 보았고
무엇보다 평소 사도세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경언의 고변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조실록을 보면 나경언의 고변을 듣고 세자를 폐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영조가 어떤 ‘유언비어’를 듣고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유언비어란, 뒤주에 갇히기 이틀 전날 밤에 사도세자가 무장한 수하들과 함께 창덕궁 물길을 통해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간 일을 말한다. 사도세자는 그 전부터 ‘칼을 차고 가서 아무리나 하고 싶다’는 등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 ‘유언비어’는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결단을 내린 후, 죽은 부인 정성왕후의 혼전에 세자를 불러 놓고 대뜸 “경들도 들리는가?
정성왕후가 변란이 호흡지간에 있다고 하지 않소” 라고 말하며 사도세자의 반란혐의를 은연중에 기정사실화하게 된다.
이렇듯 나경언이 고했던 사도세자의 반란죄가 실제적인 위협으로 나타나자,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어젯밤 소문은 더욱 무서우니 일이 이왕 이리 된 바에는내가 죽어 모르거나
살면 종사를 붙들어야 옳고 세손을 구하는 일이 옳으니 내살아 빈공을 다시 볼 줄 모르겠노라"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 영빈 이씨가 며느리 혜경궁에게 보낸 편지다.
영빈 이씨는 경희궁으로 영조를 찾아 사도세자를 '대처분'할 것을 주청한다.
"동궁의 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없으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정리에 못 할 일이나 옥체를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평안히 하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소서"
바로 영조는 창덕궁에 선원전으로 간다. 그 선원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두개 있다.
영조는 좋은 일을 할 때는 만한문으로 들어갔고 나쁜일을 벌일 때는 경화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혜경궁은 영조의 창덕궁 거둥소식을 듣고 왕이 어느 문으로 선원전에 들었는지를 살피게 한다.
"경화문으로 선원전에 드셨사옵니다."혜경궁은 불길함을 느낀다.
사도세자는 이 무렵 혜경궁을 마지막으로 부른다. 이 내용은 세세하게 한중록에 기록하고 있다.
"어제 내가 수구(물길..)를 다녀와서 쉬고 있는데 통명전에 ..우직끈한 소리를 들었다
내가 죽으려나 보다." 사도세자가 부인 혜경궁에게 말한다.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영조에게 불려가기 전 세손 정조(당시 11살)이 쓰던 방한구 모자를
가져오도록 한다. 오뉴월에 방한모자를 쓰고 아버지 앞에 몸이 아픔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혜경궁은 이를 거절하고 사도세자의 모자를 쓰고 갈 것을 청한다.
"참 모진 사람일세!자네는 아들꺼 쓰고 갔다가 세손까지 잘못될까봐 그런거지?
됐어..내꺼 쓰고 갈래."
영조는 아버지 숙종에게 선원전에서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고하고
휘령전으로 급히 이동한다. 휘령전은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지금의 문정전이다.
바로 사도세자를 지금의 문정전으로 끌고 왔다.
아들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읍소한 어머니 영빈 이씨는 그의 생모다.
정성왕후는 사도세자의 법적인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 혼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대처분'이 진행된다.
휘령전에 끌려간 사도세자는 죄인이기에 곤룡포를 벗는다.속옷으로 오생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부모 상 당할 때 입는 옷이다..
사도세자는 법적인 어머니 정성왕후가 돌아가신 후 이 옷을 계속 입고 있었다고 한다.
영조는 자기가 죽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이 옷을 입고 다녔다고 여겨 더 화를 냈다고 한다.
"죽어라.. 니가 죽으면 400년 종사가 산다." 영조의 호령이다.
세자는 처음엔 저항했지만 포기하고.
"아버님 아버님...원하시는 책도 읽고...살려만 주십시오." 읍소한다.
영조는 막무가내 아들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거듭 독촉한다.
사도세자는 칼을 들어서 죽으려 한다.
사도세자가 자신을 찌르려고 자결을 시도 한다. 신하들은 칼을 빼앗고 막는다.
세자는 옷으로 목메려고 한다. 신하들은 또 막는다.
세자는 돌바닥에 이마를 찧는다. 신하가 손으로 막 세자머리에 피가 흐른다.
이때 뒤주가 들어온다.사도세자는 좀 뚱뚱한이었다.
소주방의 뒤주가 처음에 들어왔으나 작아서 들어갈수 없었다.
군대에서 쓰는 대형 뒤주를 갖고 오도록 한다.
결국 옥신각신하다가 사도세자는 뒤주에 들어갔다.
"사도세자는 그속에서 죽으리라는 생각은 안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나를 꺼내주겠지.. 그래서 뒤주에 들어 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사도세자는 밤에 뒤주 판을 깨고 나와 돌아다녔다.
다시 뒤주에 들어가게 함하고 곳곳에 못을 치고 완전히 봉한다.
왕이 직접 못질을 한다.아무도 할사람이 없기에.
그 뒤주는 선인문과 금천 사이에 공간에 있었다.
지금 그 곳에는 아주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힘겹게 서 있다.
그 나무는 뒤주 안에서 참담하게 죽어가는 사도세자 참사 현장을 지켰다.
그 나무의 역사와 스토리는 현장에 마련한 설명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영조는 13일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감시하다 19일날 경희궁으로 돌아갔다.
뒤주 구멍으로 음식을 줬다. 그 얘길듣고 영조가 이 구멍을 막아버렸다.
뒤주한 쪽에 돌을 괴어놓고 흔들었다. 그 기척에 사도세자는 반응한다.
"누구냐? 아버지가 날 끄내주시려고 그러느냐?"
윤 5월 20일 오후 3시경
폭우가 쏟지고 천둥번개가 치던 날 사도세자는 운명한다
사도세자가 워낙 천둥번개를 무서워 했다고 한다.
광증이 몰고 온 파국 그 반란은 도대체 무엇인가?
죽기 전전날 사도세자가 밤늦게 수구를 통해서 경희궁에 가려한 일을 말한다.
사도세자는 그전에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했다..
"칼을 차고 가서 아모리나 하련다."
세자가 혼자 갔겠나?
무인들 몇명을 데리고 늦은 밤에 수구를 통해 가다가 돌아온 것이다.
혼자간게 아니기에 소문이 안날수가 없다.
이것이 사도세자의 역모. 반란 혐의다.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비록 영조를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제정신으로 한게 아니다.죄는 나쁘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니 용서해야한다.
이런 관점을 보이기 위해 세자의 광증에 대해 얘기한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영조의 감정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상례에 대해 얘길 못꺼냈다고 한다. 급을 낮춰서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른다.
특히 3년상 내에 정조의 아버지를 효장세자로 바꿔버린다.
정조는 이때 또한번 아버지 때문에 크게 오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