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위례성 그 자리에 백제가 되살아 나고 있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1.10.12|조회수117 목록 댓글 0

 

이제 그 2천년 전의 한성백제이야기가 우리 주위에서 솔솔 되살아 나고 있다.

여기 저기서 한양 정도 600년은 아니라고 한다. 한성의 역사는 2천년이라고 목청을 한껏 높인다.

참으로 많이 변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16년 전만해도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은 대목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1394년을 기준으로 서울시사는 600년으로 잡았다.

정도 600년을 경축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치룰 그 때는 공주의 백제였고 또 부여의 백제였다.

한성의 백제는 참으로 어색하였고 생소하기만 먼 나라의 역사로 대부분 잊고 살았다.

1980년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백제의 땅 한성이 눈에 들기 시작한다.

한성백제의 유적 발굴에 나선 발굴팀은 몽촌토성을 초기 백제의 왕성 터로 결론을 낸다.

'몽촌왕성'을 중심으로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이 도성을 꾸렸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은 그 위례성의 국립묘지로 북쪽 한강가의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으로 판단하였다.

그때 그 한성의 왕도는 그렇게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큰 흐름이었다.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대세였다.

1997년 1월 4일  서울 강동구 풍납동 현대아파트 건설현장.

신정 연휴로 가림막으로 둘러친 텅빈 공사장에 이형구교수(선문대)가 '잠입'해 엄청난 정말 '큰 일'을 저질렀다.

신정 휴일이라 경비원이 없던 틈을 타 5m 깊이로 파헤친 공사장으로 내려갔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놀랐다.
BC 18년에 도읍을 정한 후 고구려의 공격으로 공주로 천도하던 475년까지의 한성 백제의 역사가

그곳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지하 4-5m 사이에 묻혀 있는 토기와 유물들이 현몽하듯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광경에 전율한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물을 주머니에 넣었다.
위치를 구분할 수 있도록 아래층 유물은 아래 주머니에, 위층의 유물은 윗주머니에 넣어 현장을 빠져 나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연락하여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그로 인해 공사는 중지되고 풍납동 지하에 잠든 백제사는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철벽같았던 '몽촌왕성' 주장이 힘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나는 한성백제의 왕성 풍납토성을 발굴한 사람은 아닙니다.그 왕성을 찾아낸 발견자입니다."

이형구 선문대 명예교수(동양고고학연구소장)는 11일 오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한성백제 아카데미> 서울과 백제 2천년 고도 여행'에 참석, "유적을 찾아내는 발견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땅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뻔하였던 그 한성백제의 도성을 찾아내 30여년동안

한성백제의 왕성터를 밝혀내는 데 심혈을 쏟아온 학자로서 역사적인 개관을 앞두고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백제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강의를 하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

'풍납왕궁 발견자 이형구'는  발견자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으로 두 시간 내내 그동안 못다한 한성백제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역사는 말로만 전하는 전설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기록만으로는 역사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그 유적이 그 자리에 보존되었을 때 역사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 유적이 그 장소에 당시의 영혼을 지닌채 보존될 때 진정한 역사의 복원은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 일본이나 중국이 모두 자기 멋대로 한-일 한-중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전체 출토유물 중 중국 혹은 중국계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극히 낮은 풍납토성이 백제유적이 아니라,
중국이 설치한 대방군(帶方郡) 치소(治所)라는 주장이 일본에서 연이어 제기되고 있다.
낙랑군을 떼어내 대수(帶水)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했다는 중국기록을 주목하면서

대수를 한강으로 간주하고 대방군을 서울 부근으로 보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초기 백제 왕성 풍납토성의 유적 발굴을 계속하고 그 왕성을 복원한다면 더이상 '대방군 치소'같은

억지는 일본과 중국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강 이북은 중국의 식민지 한강의 이남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괴변은 풍납토성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한성백제에 대한 조사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 탈취돼온 백제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호소로 마무리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성백제를 잘 알지 못하였다.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국내 학계에서 백제의 하남위례성은 충남 직산 경기 하남  그리고 몽촌산성 등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 왕궁의 유적이 서울 풍납동 신축중인 아파트 밑에 묻혀 있을 줄은 이형구교수가 '발견'할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그동안 여러가지 관련 유물이 쏟아나왔는데도 지금까지도 하남위례성에 대한 일부 학계와

정부관계기관에서 그 풍납토성을 왕궁으로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백과사전과 민족문화백화사전은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그는 밝혔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아직 풍납토성을 왕성이라는 사실을 등재하지 못하고 있다며 그는 아쉬워했다.

이들 교과서에서는 초기 백제의 역사는 아주 미흡하게 다루고 있다고 했다.

30여년동안 풍납토성에 매달려 왕성으로 규명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온 그다.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하남위례성이라는데 그는 확신에 차 있다.

이 지역을 지켜온 그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둘레 3.5킬로미터 도성의 면적 22만평에 주민들이 많이 모여

살았을 큰 도성 하남위례성이었다고 그는 확신한다.우리는 그동안 풍납토성에 관심이 없었고 무지했다고 통탄한다.

먼저 공부하고 연구한 사람들은 조금씩 흔적을 남겼다.

1963년 풍납동이 광주군에서 서울시 천호출장소에 편입되면서 그 성벽만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성안은 사적 지정에서 제외되었다. 성안을 왕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는 성벽만을 사적으로 지정한 것이다.나머지는 사유지로 농사를 지었다.

관상수나 은행나무 묘목 느티나무 묘목을 심었다.성벽 위에는 민묘가 4기가 있었다. 거기에는 묘비도 있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그만큼 풍납토성은 철저히 방치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 자리에 백제의 유적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해방되고 나서 정작 우리는 2천년의 고도 백제 왕성을 철저하게 외면하였다.

60년대 사적 지정후 이 지역안에서 도시개발하는데 전혀 제한이 없었다.

성벽 안에서는 건축활동이 자유로웠다.건축활동을 하는데는 전혀 법적으로는 문제가 앖었다.

"풍납동 지역은 먼저 유적을 발굴하고 나서 아파트를 짓도록 하자!"

그 지하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먼저 찾아내고 그 자리에서 건축을 하자고 한 그의 제안이다.

서울시는 이 제안을 철저히 무시하였다. 문화재청도 그리 적극적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같지 않았다.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는 아주 달갑지 않은 엉뚱한 짓이었다.

그들에게 '선 발굴 후 건축' 은 말도 되지 않은 동키호테같은 발상이었다.제안주민들의 반발은 대단하였다.

1997년 1월 4일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백제초기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백제의 왕성터일 것이라는 물증 유물을 제시하고 '선 발굴 후 건축'을 관계기관에 요구하였다.

즉각 아파트 건설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다행히 9개월동안 그 아파트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 지하 4미터에서는 2천년 전 백제인들이 번영을 구가하였던 왕성의 잔해들이 대량으로 나왔다. 

관계연구기관들이 아파트 건설 현장을 중심으로 한 발굴 작업을 벌였다.

육중한 아파트 밑으로 영원히 묻혀 버릴뻔한 유물들이 '수십 트럭분'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아파트 조합원들은 난리였다. 멀쩡하게 아무 탈없이 착착 건설되던 아파트 공사가 엉뚱한 왕궁을

주장하는 '이형구' 때문에 중단되게 된 현실에 그들은 분노하고 거친 행동으로 나왔다.

서울시로서도 난처하였다.아파트 건설을 중단시키고 사적지로 보존하려면 천문학적 에산이 들어야 했다.

적어도 주민보상 등에 2천억원이상의 예산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문화재 관련 기관도 '소극적'이었다.

이 지역에 대한 '평가'에 아주 소홀하였다. 문화재 가치를 높게 평가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아주 의도적으로 아파트 현장에서 '발견'한 유물을 높게 평가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문기관이 유적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풍납토성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은 그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더이상 방치하지 않았다.

초기 백제의 왕성 풍납도성이 바로 아파트 건설 현장 그 자리에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삼국사기 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기록하고 있는 내용과 풍납토성 일대는

너무나도 일치하고 있어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왕성으로 거의 확정되어 가고 있는 것같다.

풍납왕성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던 찬란한 한성백제문화를 이제 바로 그 자리에 부흥시켜야만 한다.

한성백제의 역사가 유물 유적의 복원으로 확실하게 입증될 때 주변 국가들의 엉뚱한 역사왜곡은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풍납토성 뱔견자 이형구'는 거듭 강조하였다.

다시 살아나고 있는 2천년 전 한성백제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되살려 보고

앞으로 전개될 그 백제의 미래도 하나 하나 그려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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