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는 열명의 신하와 십제(什濟)를 건국한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1.10.13|조회수260 목록 댓글 0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의 높이는 836.5미터로 서울의 진산이다.
이 사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700미터인 보현봉이다.
주봉인 백운대는 보현봉에 가려 보이지 않으며 인수봉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부아악이란 "아기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의 산"으로 보인다라는 뜻이다.
건국 세력들은 북한산을 올라 산세를 살피고 도읍을 정한다.
백제의 건국 시조 온조가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오른 곳도 부아악으로 기록되고 있다.
태조 이성계도 보현봉에 올라 서울 도성의 터를 잡았다고 한다.
백제 건국 설화는 고구려나 신라보다 복잡하고 다양하다.

우선 백제의 시조로 여러사람이 등장한다. 시조에 대한 학설로는 우태(구태)설 비류설 온조설 등이 있다. 

온조설이 통설로 되어있다. 온조설이란 말 그대로 온조를 백제의 시조로 보는 학설이다. 

온조를 시조로 보는 견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등 기사에 의거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를 온조왕인데 그의 부친은 추모 또는 주몽이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박해를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당시 졸본부여왕에게는 딸만 셋이 있을 뿐 아들이 없어 걱정스러워하던 차에

주몽의 인물됨이 비범함을 보고 둘째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부여왕이 죽었고, 주몽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였고 둘째아들은 온조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해 월군(越君)이란 마을의 여자에게 장가를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었다.

고양시 방향에서 찍은 북한산의 모습이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봉우리가 보인다. 북한산은 올올하며 웅장하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결국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기 좋은 터를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 터를 잡자고 주장하자 열 명의 신하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고려해보건대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띠를 둘렀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습니다.

이러한 천연적인 지리의 이점을 가진 곳은 얻기 어려우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터를 잡고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의 보필을 받아

국호를 십제(什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가 터를 잡은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비류가 위례성을 방문해 보니 그곳 도읍이 잘 정비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비류는 이것을 보고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다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모여들었다.
그 뒤부터 나날이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夫餘)로 성씨를 삼았다.

삼국사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미추홀은 현재 인천이라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비류시조설에 의하연 비류와 온조는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한다.

이 기록만 가지고는 미추홀이 어디인지 도누미 종잡을 수 없다.

온조시조설에 나오는 메추홀의 특징인 "땅이 습하고 물이 짠 곳"으로 봐서는 해변가임에는 틀립없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잡지 지리편」에서 미추홀을 추적해 보자.

다음은 『삼국사기』「집지」권 35에 나오는 기록이다.
"소성현(邵城縣)은 본시 고구려 매소홀현(買邵忽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개명, 지금의 인주(仁州)라 했다."
고구려의 매소홀현이 통일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쳐 인주라 했고 옛날에는 미추라고도 불렀던 내용이다.
일연은 『삼국유사』 '남부여조'에서 미추홀을 지금의 인주라 하였다. 고려시대의 인주는 지금의 인천이다.

그 근거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인천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인데 신라에서 소성으로 고쳐서 율진군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 때 수주에 붙였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어머니 인예왕후 이씨의 고향이라 경원군으로 승격했고,

인종 떄에 어머니 순덕왕후 이씨의 고향이라 지인주사로 승격하였다가, 공양왕 3년에 경원부로 승격하였고,

조선 태조 원년에 옛 이름인 인주로 복구하였으며, 태종 13년에 인천군으로 고쳤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비류가 정착했다는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십제(什濟)가 온조와 함께 도읍으로 삼았던 하남위례성은 분명하게 특정 지역을

밝히지 않고 있어 그동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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