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에 십제(什濟)를 건국한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1.10.14|조회수248 목록 댓글 0

기원전 18년 온조가 도읍한 위례성(慰禮城)은 하북과 하남으로 나눈다.

하북위례성은 온조가 첫 도읍지로 잡았던 곳이다.

위례성이 도읍지로서의 명칭인지 또는 성읍국가로서의 국호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는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삼각산 동록(東麓)에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 ‘강역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백제의 왕성 이름인 '위례'의 원의(原義)는 '우리' 즉 담장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한다.
위례성의 '위례'는 방어시설이자 담장을 가리키는 '우리' 즉 성책(城柵)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위책(圍柵)의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위례'란 명칭이 성책에 특징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풀이다.
'위례'란 방언에 광곽(匡郭)의 사방을 둘러친 것을 '위리(圍謙)'라고 한다.
'위례'와 '위리'는 그 말소리가 비슷하다.

또 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축토하여 광곽(匡郭)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위례'라고 한 것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이 견해는 성곽사의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수긍된다.
백제 최초의 왕성인 하북위례성의 위치에 관하여서는 삼각산 동쪽 기슭 세검정 계곡 일대
중랑천 일대 등 여러가지 설이 제기 되고 있으나 중랑천 일대가 가장 유력하다.
이후 많은 학자들은 다산이 말한 ‘삼각산 동쪽기슭’이라는 표현을 중시하여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짚어갔다.
그들은 중랑천변 즉 서울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일대를 주목했다.

중랑천변을 따라 내려가면 한강과 만나고 그 한강 건너편에 하남위례성(풍납토성)이 있으니

그런대로 일리있는 추론이었다. 이 중랑천변 일대에는 일제 때까지만 해도 토루(土壘)의 흔적이 뚜렷했다.

중곡동 일대에서는 백제시대 석실분이 발견되기도 했다.

상계동 부근을 흐르는 중랑천(中浪川)이 한천(漢川) 또는 한내라고 불리워진 것이

하남위례성에 흐르던 한수(漢水)와의 관계와 같이 한천(漢川)이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한수(漢水)=한강(漢江)=큰물=큰강' '한천(漢川)=한내=큰냇물'이기에 중랑천변의 방학동 부근의 토성을

하북위례성으로 보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내 생각은 지금의 서울 청계천을 끼고 있는 중랑천 청계천을 끼고 있는 지금의 수도 위치가 아닌가.

고려시대 때도 남경은 바로 그 한양부라는 데가 바로 지금의 도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옛날 도성이었던 데서 계속 성장 발전했다고 생각되지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돼요.

지금 부아악이라는 것도 북악산이라고 한다면 청와대 뒷산인데

바로 그 지역이 아니었는가 하북위례성이."<이형구선문대교수>

"5월에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입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지금 요상한 전조가 자주 보이고 국모(國母)가 돌아가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 않으니 반드시 장차 국도를

옮겨야 되겠다. 내가 한수 남쪽을 순행하여 보았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고 오랫동안

안주할 계획을 도모할 것이다." 백제의 첫번째 천도는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낙랑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아니다. 백제는 이렇게 온조왕 14년 춘정월에 한수지남(漢水之南)

으로 천도하니 이곳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온조가 재위 14년에 낙랑과 말갈의 잦은 침략을 피해서 하북위례성에서 한수의 남쪽인

한산 아래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례성을 중랑천 주변에서 하남으로 옮긴 것은 천도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다.

임진강이나 한탄강 유역을 하북위례성의 유력지로 제기한 학자들도 있다.

"중랑천이나 세검정에 둔 하북위레성에서 바로 코앞의 하남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을 두고

천도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화재연구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 무덤이 발굴된 한탄강 유역이

오히려 하북위레성일 가능성이 높다."(임영진 전남대 교수)

“풍납동토성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유적이 1곳 있는데 경기 연천 적성읍 서북방에 해당되는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존재가 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0,000 지도에는 육계토성지(六溪土城址)라고 표기되고 있다.”
1993년 윤무병 당시 원광대 교수가 ‘고구려와 백제의 성곽’이라는 글에서 밝힌 주장이다.
전체 18쪽의 논문 가운데 반쪽도 안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강 북쪽이 아니라 훨씬 북쪽인 임진강 유역에 풍납토성과 비슷한 성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사
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육계성은 주위가 7692척인 성~”이라고 언급돼 있다.
어쨌든 윤무병 교수의 언급 이후 육계토성은 서서히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위례성이 충청남도 직산에 있었다고 하는 직산설이 한동안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관찬지리지들은 위례성을 충청도 직산현이라 하였다.
"그 자리는 직산현 성거산 북쪽 5리쯤에 있고 토축으로 된 성이라고 했다.
 그 둘레는 1,690척, 고 8척, 성내에 우물(井)이 1개이며 지금은 반이상이 무너졌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기록하고 있다. 직산현의 군명이 본래 위례성이었다는 것이다.
온조가 남하하여 이곳에 도읍하였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직산설의 시원을 따져 보면 현존 문헌으로서는 『삼국유사』 왕력, 제1, 백제 온조왕조에
 '위례성에 도읍했다. 어떤 말로는 사천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직산이다'라고 한 것이 최고(最古)라 하겠다.
이를테면 위례성에 대한 조선시대 전반기의 일반적인 인식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은 직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직산현에는 세종 11년(1429) 7월 백제 온조왕묘(溫祚王廟)가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왕묘가 불타 없어지기까지 춘추로 치제가 계속되어 온 것으로 전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