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백제 최고(最古) 최상의 명품 바둑판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2.07.26|조회수754 목록 댓글 0



 

 

 

 

 

 

 

 

 

 

 

 

 

 


한성백제박물관에 진열된 백제 때 바둑판 진품과 똑같이 만든 복제품 바둑판이다.

이 바둑판과 바둑알 세트를 복제하는 데 2억 2천만원이나 들였다고 한다.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바둑판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棊局)은

당시 백제에는 없었던 자단나무와 옥 상아 등의 재료에 낙타와 코끼리 등을 새겨 넣은 사상 최고(最古)

최상의 명품으로 글로벌 백제를 상징하는 유물이기에 진품에 아주 가깝게 복원한 것이다."

                             -김기섭 한성백제박물관 전시기획과장-

위 사진의 바둑판은 목화자단기국의 진품으로  

일본의 고도(古都)인 나라(奈良)의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다. 

쇼소인은 일본 쇼무(聖武·701~756)왕이 사망하자 그의 명복을 빌면서 왕비가 유품을 도다이지에 바치면서 생겨났다.

일본 왕실 최고의 ‘보물 창고’이다. 쇼소인에는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년)이 당시 일본에서 대신(大臣)으로

명망이 높던 후지와라(藤原鎌足·614~669)에게 하사한 화려한 장식의 바둑알과 바둑알통도 있다.
이 바둑알은 후지와라의 손녀가 일본 쇼무왕의 비(妃)가 되면서 쇼무의 애장품이 됐다가 쇼소인에 들어가게 됐다.

 

 

쇼소인에 보물이 소장된 과정을 기록(서기 756년)한 ‘국가진보장’

(國家珍寶帳)에 따르면, 의자왕은 후지와라에게 바둑알과 알을 담는

통 4개를 하사했다. 코끼리무늬 등을 장식한 목제 바둑통에는 붉은 색과

감색(紺色) 바둑알(각 160개), 그리고 흑백 바둑알(각 140개)이 담겼다.

바둑알 지름은 1.5~1.7㎝, 두께 0.6~0.9㎝이다.

이중 붉은 색과 감색 바둑알은 상아에 색칠을 한 뒤, 선을 깎아서 야생 오리와 꽃무늬 등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무늬가 없는 흑백 바둑알은 각각 석영과 사문석(蛇紋石)으로 만들었다.

바둑돌도 예술품이다. 두 벌이 있다. 

목화자단기국은 자단이라는 나무에 상아를 정교하게 박아서 만들었다.
두 재료 다 백제에서는 나지 않았다. 자단나무는 인도 남부 바라트나

스리랑카에서 자랐다.
상아는 코끼리가 있는 인도 남부 바라트나 실론 섬(스리랑카)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백제가 이들 지역에 담로를 만들어 그곳에서 재료를 들여왔을 것으로

추측케 한다.
실론 섬과 바라트의 벵갈 주에는 담로계 땅 이름이 나와 백제가 이곳에

담로를 세웠음이 입증된다.
의자왕은 이 담로들을 다스리는 담로주로부터 바둑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현대의 바둑돌(직경 백 21,9-흑22,2 밀리미터) 보다 조금 작은 직격 

약10,7-10,8 밀리미터다. 

흑돌과 백돌을 감색과 홍색으로 대치시킨 취향도 그럴 듯하지만, 

그보다 화려한 목화자단기국의 반상에 놓아갈 때 감,홍색의 조화가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하겠다.

이 바둑알이 일본에 건너간 지 700여년 후인 1492년 가을 비 오는 날에

일본 막부의 6대 장군인 아시가가(足利義敎)가 도다이지에 들렀을 때

이 바둑 알을 보고 세 알을 집어들고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바둑판에 낙타가 새겨진 것이나 은평탈합자에 코끼리가 새겨진 것도
백제가 해외 무역으로 이런 동물들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낙타는 백제와 접촉한 북조 왕조나 바라트와 교류한 페르시아에서는 흔한 짐승이었기 때문에

백제인이 북중국이나 인도남부 바라트에서 낙타를 본 뒤 그 생김새를 바둑판에 새겼으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둑판과 바둑알에 나타난 변색없는 화려한 염색, 미세 조각의 손재간에서 백제인들의 솜씨를 재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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