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이 즉위할 무렵의 백제는 내외적으로 정세가 불안하던 시기였다.
북쪽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던 책계왕과 분서왕이 중국 군현세력에게 죽임을 당하던 일이 있은 후였다.
근초고왕의 아버지인 비류왕이 재위하던 시기인 313년에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낙랑군이 쫓겨나면서
한반도에서 중국 군현 세력이 마지막으로 축출된다.
고구려와 백제 양국 사이에서 충돌의 완충장치 역할을 하던 군현이 소멸하자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재위 중 4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모용황에게 시달려온 고국원왕은
요동으로 진출하려는 서진정책을 멈추고 남쪽으로 눈을 돌린다.
이 때에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백제와 대결할 수 밖에 없었고 두 나라는 옛 대방군의 영토를 두고
영토전쟁을 벌이게 된다.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와 동진과는 친선을 강화하게 된다.
고국원왕은 369년 영토를 넓히기 위해 남쪽의 백제를 공격했다.
당시 백제는 뛰어난 왕인 근초고왕과 그 아들 근구수 태자가 다스리고있었다.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2만 명이 황해도 지역인 치양에 도착하여 백제의 민가에서 식량을 얻으려고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태자 때부터 부왕 근초고왕을 도와 정복 사업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근구수왕이다.
그는 369년 치양성(지금의 황해도 배천)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해 5,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당시 고구려군에는 백제 출신의 사기(斯紀)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백제에 있을 때 국가에서 기르는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한 죄로 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쳤다.
그는 고구려군의 사졸이 되어 백제군을 정벌하러온 군대에 소속되었다.
그는 이 기회가 아니면 다시 백제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고구려군에서 탈출하여 백제군에 투항하였다.
백제의 태자는 투항한 자를 불러 고구려군의 전세를 물었다. 그러자 사기가 바른대로 말하였다.
“고구려 군사의 수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머릿수만 채운 의병에 불과합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붉은 깃발을 든 군사들뿐이니 만약 그들을 먼저 깨부순다면
나머지는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이므로 쉽게 고구려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백제의 태자는 붉은깃발을 든 고구려 군사들을 집중 공격하여 깨뜨리고
나머지 도망치는 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저들을 뒤쫓아라!"
근구수왕은 계속해서 고구려군을 추격하려고 했다.
이때 휘하의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였다.
"태자 마마, 전투는 여기서 멈추십시요.
이미 적의 왕을 쓰러뜨렸으니 더이상 욕심을 내서는 안됩니다.
도덕경을 보면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보지 않으며,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나이다."
"그대의 말이 맞다.마음같아서 하늘끝까지라도 저들을 쫓고 싶으나 다음을 생각해서 참도록하지."
이에 백제의 태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고구려군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2 년 후 고구려는 다시 군사를 내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군이 패하 강가에서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공격해 또다시 패배한다.
그 해 겨울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 태자가 이끄는 3만의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당시 60 세가 넘은 고국원왕이었지만, 용감하게 군사들을 독려하며 백제군과 맞섰다.
그런데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고구려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이 적과 싸워 죽는 일이 생겼다.
백제에게 패배한 것은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장군 막고해의 충간을 받아들여 진격을 멈추었기에 평양성의 눈부신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