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를 건국한 세력은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와 비류다.
중국 만주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중화인민공화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현 이다.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처음으로 축조한 오녀산성이다.
그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홀승골성 졸본 오녀산성으로 불리운다.
오녀산성에 오르면 환인의 광활한 분지와 비류강 혼강이 내려 보인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탈출한 주몽(동명성왕 추모왕)이 중국 랴오닝성(요녕성)에 있는 환인(졸본)에 세운 나라다.
2대 유리왕은 입지 조건이 좀 더 나은 곳으로 수도를 옮기는데, 그곳이 바로 집안 지역이었다.
오늘날 이 두 곳에는 그 당시 성들과 고분들이 있다. 또 동북아 역사에 큰 영향을 준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곳이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비류곡 홀본(환인) 서쪽 성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정했다"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 쓰여 있는 내용이다.
고구려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중국 랴오닝 성(요령성) 환인 시에 있는 오녀산성이다.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은 압록강 지류인 혼강 유역에 형성되었던 나(那) 집단을 통합해 연맹체를 구성했다.
바로 이것이 고구려의 시작이었다. 주몽은 주변 세력을 통합하며 나라를 지켜 낼 수 있는 근거지로 오녀산을 선택했다.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혼강과 환인댐이다.
건국설화중 가장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구려의 주몽 설화에서는 주몽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추구월(秋九月)에 왕은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지 않으니 그 때 나이가 사십이었다.
태자(太子) 유류(유리왕)는 왕이 남긴 옥편(玉鞭)으로써 용산(龍山)에 장사를 지냈다."
우리 민족이 가진 천손사상은 주몽 자신이 천제의 아들이라는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하늘의 아들은 죽어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다.
당시 산 가운데에 관청이나 백성이 살 수 있는 생활 도시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평지에도 성을 쌓아 평상시에는 그곳에서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나면
오녀산성으로 들어가 적과 항전하는 형태였다.
고구려 도성은 이렇게 평지성과 산성의 장점을 살리는 조합이 계속 이뤄졌다.
오녀산은 서남으로는 넓은 환인 분지 동남으로는 혼강이 흘러드는 사방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산성의 모양은 직사각형으로 서쪽 북쪽, 남쪽의 서벽은 천연 절벽으로 성벽을 삼았고,
경사가 완만한 동쪽과 남쪽의 동벽만 고구려 특유의 퇴물림쌓기로 성벽을 쌓았다.
지금 오녀 산성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오녀산성 안에는 왕궁 터를 비롯해서 일반 집터 등이 발굴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방치된 상태다.
산성 안에는 우물이 있다.그 이름을 ‘천지’라고 부른다. 우물은 성 안의 자급자족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오늘날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 성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처음 언급되었다. 고구려인이 만든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성(忽本城)이라고 하고 있고,
삼국 시대에는 환도성(丸都城), 졸본성(卒本城)으로 불렸다.
《고려사》 공민왕조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이라고 나타나 있다.
오녀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이고 전체 약 8km이다.
성 안에는 천지(天池)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다. 2천 년 동안한 번도 마른 일이 없다고 한다.
깨끗하여 음료수로도 사용할 수 있다. 산성은 200m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왔다.
동쪽과 남쪽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설치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전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졸본은 지금의 중국 깊숙이 들어간 곳으로 옆으로는 비류호라는 강이 흐른다.
이 곳이 동명성왕이 자리 잪은 수도다. 유리왕 때 국내성으로 옳긴다고 전설은 이야기한다.
"신에게 바칠 돼지가 달려 국내성 까지 뛰었는데 그 신하가 국내성의 풍경에 감탄하였다.
돼지를 잡고 졸본에 달려간 그 신하는 유리왕에게 그 느낌을 감탄하여
유리왕이국내성에 가보고,이 곳이 좋겠다 하며 도읍지를 옳긴다."
중국 만주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중화인민공화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현 이다.
오녀산성에 오르면 환인의 광활한 분지와 혼강이 내려 보인다.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길을 떠나 남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라는 물가에 다다라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이 어머니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
고 말하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위로 떠올라,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 > 에는 추모왕이 강가에 이르러 물을 건너가려 할 때 뒤따라오는 군사에게 붙들릴까 염려되는 상황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쓰여 있다. 북부여의 군사가 추모왕을 뒤쫓아 왔다면
북부여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렇다면 엄리대수는 북부여 인근을 흐르는 북류 송화강 부근이거나
아니면 환인 서북쪽에 위치한 통화를 흐르는 혼강 상류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추모왕은 북부여를 출발할 때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함께 하였으며, 남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재사, 무골, 묵거를 만나는 등 어느 정도 규모의 군사력을 갖추었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모왕이 도착한 졸본 비류수(현재의 환인 혼강)부근에는 이미 부여에서 먼저 내려온 다른 세력들이 많았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 에는 추모왕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졸본부여왕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 삼형제가 있었다면서
부여왕은 추모왕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고 돼 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졸본부여왕이 죽고 추모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처음 우태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우태가 죽은 뒤 북부여에서 도망온 추모왕과 결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모왕이 환인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기까지 환인 토착세력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들에 따르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고두막의 골본부여(북부여)에 망명한 비류집단의 성씨는 해씨(解氏)로 추정한다.
주몽은 고두막의 아들 고무서에게 아들이 없어 고무서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하고 단군에 올랐다.
그러나,부여인들의 반대하자, 골본부여에서 남하하여 골본천(심양방면)에 이르니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험고(險固)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혼강) 위(골본성=현재 오녀산성)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해씨를 성으로 삼았다.
후에 해씨는 태조태왕때 고씨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