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헤이안(平安) 시대의 국풍(國風)문화를 대표하는 뵤도인(平等院)
일본의 문화유적 중에 손을 꼽으라 하면 난 단연코 우지(宇治)의 뵤도인(平等院)을 말할 수 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문화유적을 대표하는 불국사(佛國寺)처럼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의 국풍(國風)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뵤도인(平等院)이기 때문이다.
뵤도인은 1052년 관백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賴通)가 자신의 별장을 절로 만든 것이다. 그 때 아미타당을 만든 것이 봉황당(鳳凰堂)이다. 아미타당은 정토교 사원의 본존인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정토교 건축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이다. 중당(中堂)`미랑(尾廊)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마치 봉황이 양 날개를 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중당에 안치되어 있는 아미타상은 불상 조각가로서 법교(法橋)의 지위에 오른 죠쵸(定朝)의 작품이다. 봉황당의 문에는 장엄하고 화려한 아미타 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벽에는 석가 팔상도(釋迦八相圖)를 그려 아미타여래의 마중을 받고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바람을 절실하게 표현했다. 아미타내영도`석가팔상도는 고야 산의 성중 내영도와 함께 일본 불교화의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안내된 팜플렛에 적힌대로 읽어보면
뵤도인(平等院) 사찰은 1052년, 관백(關白) '후지와라 요리미치(藤原賴通)'공이 창건하였으며, 봉황당은 그 다음해인 1053년에 아미타여래(국보)를 안치하는 아미타당(국보)으로서 건립되었습니다. 정원은 정토(淨土)양식의 차경정원으로서 사적명승정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봉황당 주변에는 석가산과 주색칠을 한 다리 그리고 아치식 다리, 작은 섬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도 뵤도인 사찰에는 야마토에(大和繪)식의 구품내영도(국보), 범종(국보), 금동봉황1쌍(국보) 등, 헤이안 시대의 문화재가 다수 보존되어 있습니다. 특히 11세기의 불상군으로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운중공양보살상 52구(국보)는 모두 보살들이 구름을 타고,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조각상 등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모양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봉황당(鳳凰堂): 극락정토의 궁전을 모델로 축조된 봉황당(鳳凰堂)은 중당(中堂)`좌우의 익랑(翼廊)`미랑(尾廊)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른 곳에서 그 사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건축물입니다. 당 내에는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장색, 조초(定朝)의 작품으로 판명되어 현존하는 유일한 불상인 본존아미타여래좌상(本尊阿彌陀如來坐像)을 비롯해 운중공양보살상(雲中供養菩薩像) 52구, 문과 벽에는 9가지 방법으로 아미타보살을 맞이하는 구품내영도 등 헤이안시대 정토교 미술의 정수가 집약되어 있습니다.(현재 운중고양보살상 26구는 호쇼관(鳳翔館)에 전시)
봉상관(鳳翔館): 호쇼관은 범종, 금동봉황 1쌍, 운중공양보살상 26구를 비롯해 뵤도인 사찰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보물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입니다. 또한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한 영상전시와 초고정밀도의 섬세한 화상으로 봉황당 내부를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는 레퍼런스 시스템 등도 갖추고 있습니다.
라고 되어있다. 그 중에서 봉황당 건물의 용마루 양 끝에 치미를 대신하여 있는 금동봉황 1쌍이 봉상관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데 보는 순간 저절로 아~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1984년 부여의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의 금동대향로의 뚜껑 머리 부분에 서 있는 봉황과 그리도 닮았는지... 구름 위에서 온갖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듯한 운중공양보살상과 봉황당 안에 모셔져 있는 본존아미타여래좌상이나 그 뒤의 광배가 전혀 낯설지 않은 늘 우리나라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느껴졌다. 뵤도인은 개인관람이 가능하지만 봉황당(鳳凰堂)을 관람하려면 시간을 예약하고 안내인의 안내에 따라 관람할 수밖에 없다. 우리 일행은 정원과 봉상관(鳳翔館)을 본 후에 밖에 나가 점심식사를 하고 시간에 맞춰 다시 들어와 안내인을 따라 관람을 하였다. 안내인의 해설이 시작된다.
뵤도인(平等院) 사찰
뵤도인 사찰은 지금부터 955년 전 (2007년 현재), 서기 1052년에 당시의 관백(關白) 태정대신 '후지와라 요리미치(藤原賴通)' 공이 부친인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공으로부터, 물려받은 별장을 절로 개축한 것이 그 기원입니다. 그 해는 불법의 가르침이 쇠퇴해 가는 말세가 시작되는 해로 여겨져 극락에 가고 싶은 소망을 담아서 건립되었습니다.
봉황당(鳳凰堂)
지금, 여러분이 들어와 있는 이 불당은 1053년에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모시는 '아미타불당'으로서 건립되었습니다. 정면에서 볼때, 이 불당의 모습이 마치 날개를 펼친 새처럼 보이며, 더욱이 지붕위에 2마리의 봉황이 마주보고 있어 에도시대 초기부터 어느새 '봉황당'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본존
이 일장육척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 본존인 아미타여래상입니다. 목조로서 모두 노송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커다란 불상을 만들 수 있는 1그루의 나무는 좀처럼 없으므로, '요세기즈쿠리' 라는 쪽매질 기법이 채용되었습니다. 후광. 천개도 쪽매질 처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음매에는 못, 걸쇠를 박고 삼베를 붙인 후, 그 위에 옻칠하여 금박을 입혔으므로 겉으로 보아서는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불사 조초(定朝)
이 본존을 제작한 사람은 헤이안시대의 최고의 불사라고 불린 조초 입니다. 조초는 '요세기즈쿠리' 기법을 완성시킨 인물로서 유명하며, 둥글고 부드러운 표현은 멋 훗날까지도 불상 조형의 모델로 여겨졌습니다. 그 기법과 표현을 오늘날에 전하는 유일한 불상이 이 본존으로 이 밖에는 조초 불사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불상이 현존하지 않습니다.
운중(雲中)
이어서 중인방의 흰벽에 걸려 있는 작은 불상들은 모두 구름을 타고 있어 '운중공양보살상' 이라는 이름을 붙여졌습니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등 죽은 사람을 맞이하러 오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금구는 불상이 걸려 있었던 흔적으로 전부 합치면 52구의 불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떼어져 있는 불상은 박물관 호쇼관(鳳翔館)에서 전시하고 있으므로 가까이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문에 그려져 있는 구품내영도
계속해서 당내의 문과 벽을 보아 주십시오. 아미타여래가 보살들을 이끌고 죽은 사람을 맞이하러 오는 모습이 잘 나타난 구품내영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벽에 그려진 그림은 색이 흐려져서 잘 알아보기 힘들지만 문에 그려진 그림은 약35년 전에 실제로 문에 그려져 있던 그림을 복원 모사한 것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그림의 내용과 색조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정원정비. 본존수리
마지막으로 최근 뵤도인 사찰에서 실시한 정원의 정비와 본존의 수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토정원이라 불리는 이 정원은 1991년부터 12년에 걸친 발굴조사에 근거하여 헤이안시대의 사주(砂洲)로 복원하였습니다. 이는 주목만한 크기의 돌을 바닥에 경사지게 깔아 물가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2003년부터 올해 9월까지를 '헤이세이시대 대수리' 시기로 지정하고, 본존, 대좌, 후광 천개를 수리하였습니다. 표면에는 주로 금박이 벗겨지는 것을 방지하는 처리를 실시하였으며, 내부에 손상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또한50년이나 100년 후에 다시하게 될 수리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말법(末法)사상은 불교에서 설명하는 예언적 연대로, 정법(正法)`상법(像法)이 지나고 나중에 오는 약 1만년 동안을 말한다. 이 시기가 되면 불교가 퇴폐적으로 변해 세상 사람들이 타락하고 천재지변이 일어나 말세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1052년이 말법의 첫 해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 무렵 정치는 문란해지고 도둑이나 화재, 전염병이 계속 발생하자 사람들은 점점 현세를 부정하는 비관적 염세주의에 빠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사후에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며 정토교(淨土敎)신앙으로 기울고 이 세상의 불안을 구제해 줄 유일한 방법으로 정토교의 진흥에 박차를 가했다.
이 시기의 문화를 국풍(國風)문화라 하는데 10C 이후 12C 무렵까지의 문화를 일컬으며 일명 후지와라(藤原) 문화라고도 한다. 894년 견당사 파견이 중지되자 먼저 유입돼 있던 당의 문화를 일본 고유의 문화에 동화시켜 일본적 색채가 짙은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 문화는 전 시대의 문화에 비해 역동적인 면은 없지만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미적 감각에서 특징있는 문화였다. 가나 문자를 만들어 일본인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됨으로써 국문학이 융성하고, 일본의 풍물을 그리는 야마토에(大和繪)가 발달했다. 말법(末法) 사상의 유행을 배경으로 정토교(淨土敎)신앙이 널리 퍼졌고 미술 작품에서도 정토교와 관계 깊은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가나문자의 형태가 정해 졌는데, 가나 문자는 한자를 빌려서 만든 일본의 고유 문자로 표음문자이며, 가타카나와 히라가나 2종류가 있다. 나라(奈良)시대 이전에는 고유 문자가 없어서 한자를 사용했다. 한자로는 언어 구조가 다른 일본어를 표현하기 불편했으므로, 8C에 성립한[고사기(古事記)] [만요슈(萬葉集)]에는 한자 본래의 의미와는 관계없이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일본어를 표현했다. 이것이 만요가나(萬葉假名)다. 만요가나도 자획이 복잡했으므로 더욱 간략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9C무렵에는 가타카나`히라가나가 사용되었고 10C초에 거의 형태가 정해졌다. 히라가나는 安→あ와 같이 만요가나의 초서체에서 발달한 것이다. 일본어를 쉽게 표기할 수 있어서 여성들이 많이 사용했으며, 헤이안 시대에 문학의 발달을 촉진했다. 가타카나는 伊→イ와 같이 한자의 부수나 획을 생략하여 만들었다. 불경을 읽을 때 보조기호로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한자의 훈독이나 한문체가 섞인 문장에 많이 이용되어 점차 일반화됐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현재의 형태로 통일된 것은 1900년 소학교령을 공포하여 표준 자체 각각 48자를 제정하면서부터다.
또한 이 시기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귀족가문이 후지와라(藤原)씨다. 이미 앞에서 후지와라(藤原) 가문에 대한 애기를 했기에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이후부터 나오는 섭관(攝關)정치에 대해 말해보겠다.
후지와라(藤原)씨가 섭정(攝政)`관백(關白)이 되어 정치 실권을 잡게 되는 10C 후반부터 11C 후반까지의 정치를 섭관정치라고 한다. 섭정`관백은 둘 다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직무로 기본적으로 섭정은 천황이 어려서 직접 정치에 관여할 수 없을 때, 관백은 성인이 된 천황을 돕기 위해 설치되었다. 섭정은 쇼토쿠 태자 이래 없었는데 신하로서 섭정이 된 것은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처음이다.
섭관정치는 858년 요시후사가 섭정에, 880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가 관백에 임명되면서 시작하여 967년 후지와라노 사네요리(藤原實賴)가 관백이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969년 안나의 정변으로 다른 씨족의 배척을 끝낸 후지와라씨는 섭정`관백의 지위를 놓고 내부의 권력다툼을 계속했는데,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치나가는 딸 4명을 차례로 황후나 황태자비로 궁중에 들여서 섭관 정치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賴通)도 미치나가의 외손자인 고이치죠(後一條), 고스자쿠(後朱雀), 고레이제이(後冷泉)의 3대 천황시대의 섭정과 관백이 되어 권세를 휘둘렀다. 당시 귀족사회에서는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서 생활하고 자녀들도 어머니의 집에서 성장하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외척으로서 후지와라씨의 권력은 막대했다. 후지와라씨는 천황의 대리로서 관리의 임면권을 장악하여 후지와라씨의 사적인 가정(家政) 기관인 만도코로(政所)는 국정의 중심 기관이 되었고, 천황이 내리는 명령인 조칙 대신 만도코로에서 내리는 명령이 늘어나게 되었다.
섭관정치는 11C후반 양위한 천황, 곧 상황(上皇)이 정치를 하는 원정(院政)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쿠후에 의한 정치가 행해지면서도 섭정과 관백제도는 계속되다가 메이지 유신 때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