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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스카 지역에서 만난 일본의 고대 문화

작성자우보(牛步)|작성시간11.11.15|조회수358 목록 댓글 0

7. 아스카 지역에서 만난 일본의 고대 문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창립한 아스카데라(飛鳥寺)

 

이번 여행 코스에는 잡지 않았지만 예전에 왔었던 나라(奈良)현 고시(高市)군 명일향(明日香)촌에 위치한 아스카데라(飛鳥寺)와 인근의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하다.

아스카시대의 불교예술로 가장 유명한 최초의 사찰은 일본 나라(奈良)현 고시(高市)군 명일향(明日香)촌에 있는 진언종 풍산파의 절로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창립한 아스카사(飛鳥寺)였다고 한다. 593년 위덕왕이 나라에 사리를 보냈고, 소가노 우마코 저택에서 스이코 천황과 쇼토쿠 태자, 100명의 대신이 백제 의상을 입고 사리를 맞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나라의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사리를 봉안한 일본 최초의 절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절은 백제로부터 건너온 공인들이 참여해 596년에 거의 조영을 끝마치고 609년(스이코 천황 17년)에 완성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창건 당시 아스카데라는 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 3방향에 금당(金堂)을 건립했다. 그 바깥쪽으로는 회랑을 두른 배치를 하고 있다. 백제로부터 많은 기술자가 와서 기와 제작을 비롯해 불당과 탑 건설에 관여하였다고 한다. 이들 기술을 익힌 사람들과 그 제자들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각지 사원 건립에 관여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남북 320m, 동서 210m로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현재는 규모가 크게 줄었다. 2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만큼 작은 크기다. 아담한 마당에 종루와 소나무, 5층 탑 등이 단출한 멋을 발한다. 지금은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재건된 강당(講堂)만 남아 있다. 강당 안에는 본존 아스카 대불(飛鳥大仏)이 모셔져 있고, 좁은 절 안에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볼 만한 것은 대웅전의 석가여래(飛鳥大仏)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상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4톤의 동상에 금 30㎏을 덧씌운 대불이다. 오른쪽에서 보면 엄격함이, 왼쪽에서 보면 인자함이 느껴진다. 불상의 신묘한 표정을 빚어낸 것은 백제 장인의 솜씨다. 야마모토 주지는 사찰 곳곳에 스민 백제인의 숨결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인 관광객을 ‘백제의 후예들’이라며 반긴다.

백제 시대에 일본에 건너가서 불교문화 창달을 위해 애쓴 우리 선조의 지혜에 놀랍고, 특히 우리나라 수덕사와의 자매결연 자료가 게시되고 있는 것을 보니 반가웠다.

 

아스카의 거대한 돌무덤 이시부타이(石舞台)

 

이시부타이코훈(石舞台古墳)은 나라현(奈良縣) 고시(高市)군에 있는 대형 횡혈식 석실분이다. 안내판에는 소화 8년 경도대학과 나라현이 공동으로 발굴 조사하였으며, 현실의 길이가 약 7.6미터, 폭이 약 3.5미터이고 갱도의 길이가 약 11.5미터 폭이 약 2.2미터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입장권에는 좀 다르다. 아스카(飛鳥) 문화는 일본 문화의 고향이고 불교문화가 꽃피는 야마토 정권의 원류이다. 아스카는 낮은 구릉지대가 산재해 있는 분지 형태인데 여러 고분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이시부타이(石舞台)다. 이 고분은 사각형으로 둘러쌓은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으로 75t이 넘는 거대한 화강암 30여 개로 석실이 구성되어 있는데, 현실은 횡혈실(橫穴式)이란다.

이 고분에서는 부장품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피장자의 신분은 물론, 축조 연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왕릉을 능가하는 대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버림받은 채 헌 수백 년을 내려왔다는 사실이 아스카 시대의 정치상황을 짐작케 할 뿐이다.

石舞臺라는 이름은 덮개석에서 광대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안내소에서는 국영 아스카 역사 공원의 4지구를 돌고, 스탬프를 찍어오는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부여군은 과거 백제시대부터 내려온 일본과의 밀접한 역사적 관계에 따라 현재 나라현 고시군 명일향촌 등 4개 도시와 자매결연을 하고 상호주의에 입각해 각종 행사방문, 홈스테이 운영 등 활발한 교류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이 고분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7세기 초기의 권력자인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는 듯한 다카마쓰총(高松塚)

 

아스카 역사 공원에는 다카마쓰총(高松塚)이 있다. 정확한 지명을 쓰자면 일본 나라현(奈良縣) 다카이치군(高市郡) 아스카촌(明日香村) 히라타(平田)에 있는 다카마쓰총고분(高松塚古墳)은 다카이치지구의 서남쪽 사카아이(坂合) 지구 히노쿠마(檜畏) 지역에 있는 것이다. 구릉의 남사면에 만들어진 길이 약 18m, 높이 약 5m의 원분(圓墳)으로, 1972년 3월에 발굴 조사한 결과, 매장 주체부는 잘 다듬은 응회암 판석을 이용해서 구축한 굴식돌덧널(橫穴式石槨)로 정확히는 널길(羨道)이 없는 앞트기식돌덧널(橫口式石槨)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묘실의 크기는 길이 2.65m,너비 1m, 높이 1.13m이다. 다카마쓰총의 돌방내부는 도굴로 교란되었지만, 금구나 정(釘)으로 장식되고 옻칠을 한 나무관이 있고, 주요한 부장품으로는 해수포도무늬거울[海獸葡萄文鏡]·은제대도외장구(銀製大刀外裝具)·금동투금구(金銅透金具)·금동식금구(金銅飾金具)·파리제소옥(玻璃製小玉) 등이 있었다.

해수포도무늬거울은 중심에 사자 여섯 마리와 포도무늬를 새기고 변두리에는 포도무늬·나비·새 등을 새겼다. 이는 중국에서도 유래가 드문 구리거울로 고구려의 것으로 보인다. 금동투금구는 관에 장식하는 금구의 일종으로, 모양은 꽃잎과 나뭇잎 모양으로 구성하였으며, 중심에는 국화무늬를 배치하였다. 이 외에 고구려풍(高句麗風)의 칼장식 금구 및 청색소형옥 936개, 하지키(土師器)와 스에키(須惠器)에 속하는 토기 22점이 발견되었다.

다카마쓰총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데 있다. 특히 일본의 고분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돌덧널 내부는 전면에 회발이를 하였고 천정 및 벽측면에 성수(星宿)·일월(日月)·사신(四神)·인물군상(人物群像)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정부의 거의 중앙에는 길이 약 0.9cm의 원형 금박을 칠하고 붉은 선으로 별자리를 표현하고 있다. 동쪽 벽면에는 중앙 상부에 금박의 일상(日像)과 그 밑에 청룡(靑龍), 남·북에 남녀 각 4인의 군상이 그려져 있고, 이것의 서쪽 벽면에는 은박의 월상(月像)과 백호(白虎), 남·북에는 남녀 4인의 군상이 그려져 있다. 이들 16인의 인물들은 각기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1972년 3월21일 가시하라(彊原) 고고학 연구소가 다카마쓰총(高松塚) 고분을 발굴했을 때 석실안에서 채색 벽화가 나타나자 조사단은 즉시 발굴을 중단하고 다시 묻어버렸다. 출토된 벽화가 옛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당시 발굴을 총지휘했던 고고학자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고분의 벽화는 조선의 벽화와 유사하며 아마도 귀인(貴人)의 분묘 같다』고 말하고 발굴을 중단한 채 함구하고 있다가 몰래 발굴을 재개했었다.

석실벽에는 중국과 한국에서 예부터 임금을 상징해온 사신도(四神圖)인 청룡(靑龍:동쪽벽), 백호(白虎:서쪽벽), 현무(玄武:북쪽벽)가 그려져 있었고 도굴이 돼버린 남쪽벽의 주작(朱雀)도는 훼손돼 없어졌다. 동서 양쪽벽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해와 달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에는 네 명씩의 여자군상(女子群像)과 남자군상(男子群像)이 각각 그려져 있다. 또 천장에는 북두칠성 등 20여개의 성좌도가 배치돼 있어 소우주를 상징하는 매우 희귀하고 귀중한 고분으로서 문화적으로나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일본 궁내청은 이 고분의 보존 유지를 위해 막대한 경비를 들여 물리화학적인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최첨단 시설을 석실 입구 아래쪽에 설치해 놓고 컴퓨터로 보존 상태를 자동 조절 및 감시하고 있으며, 철책을 만들어 일반인의 고분내 관람은 물론 접근마저 일체 금지하고 있다.

다만 고분 입구에 벽화관을 따로 지어 고분의 단면모형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내가 처음 가보았을 때는 철책을 설치해 놓지 않았을 때여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내부는 튼튼한 철문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서 볼 수 없었다. 고분 내부는 발굴 당시의 발굴팀과 궁내청의 극소수 관계자만 보았을 뿐, 학자들마저 내부관람을 불허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

이 고분의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고분 주변에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군처럼 제29대 킨메이(飮明), 40대 덴무(天武), 41대 지토(持統), 42대 몬무(文武) 천황의 대형 능이 밀집해 있는 점으로 봐도 왕의 고분임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겐지(向原寺)와 이타부키 궁터(傳板蓋宮跡)

그밖에도 인근의 고겐지(向原寺)는 아마가시 언덕을 올라가는 계단에서 북쪽 방향으로 조금 가면 우리 기와집 대문 같은 곳에 고겐사(向原寺)임을 알리는 푯말이 붙어 있다. 절 같은 기분이 나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지만 원래는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의 저택지로서 불교가 처음 전래될 때 백제의 성왕이 보낸 불상을 안치했던 곳이라고 하며 후에는 스이코(推古) 천황의 도유라 궁(豊浦宮)이 되었다거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도유라 사(豊浦寺)를 세웠던 자리라고도 한다.

또 전(傳) 이타부키 궁적(傳板蓋宮跡)이 아스카지(飛鳥寺) 남쪽으로 걸어서 10-15분쯤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645년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살해되었다는 고쿄쿠(皇極) 천황의 궁적지이다. 덴무(天武) 천황의 기요미하라(淨御原) 궁적지라고도 한다.

 

백제 의연스님이 지은 절 오카데라(岡寺)

오카데라(岡寺)는 '가시하라 진구마에(橿原神宮前)' 역에서 버스로 20분. 다시 걸어서 10분 정도 가야 나온다. 백제계 도래인인 의연(義淵)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본존인 관음상은 고승 홍법대사(弘法大師)가 삼국에서 가져온 흙을 빚어 만든 것이라 하는데 높이 4.58m가 되는 일본 최대의 소조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서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국 33개(西國三十三箇所) 관음도량 성지 중 7번째 절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자주 찾지 않는 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카데라(岡寺)를 지은 백제의 의연(義淵, 643~728)스님은 어떤 분일까? 의연스님을 말하기에 앞서 의연스님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더 확실히 의연스님을 알게 될 것이다. 손꼽히는 제자는 나라(奈良)시대 최고의 절 도다이지(동대사, 東大寺)를 지은 행기(行基)스님과 양변(良弁)스님을 꼽을 수 있으며 현방(玄昉), 강존(隆尊), 도자(道慈), 도경(道鏡)스님 등 일본의 많은 고승이 의연스님의 제자들이다.

오카데라(岡寺)와 의연스님과의 인연에는 재미난 설화가 따르는데 절의 창건 역사에 나오는 대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전(寺傳)에 따르면 1300년 덴지천왕(天智天皇)의 발원으로 의연승정(義淵僧正)이 건립한 절이 강사(岡寺)이다. 옛날, 이 고을에 애를 낳지 못하는 부부가 관세음보살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렸는데 어느 날 아기 우는 소리와 함께 흰 보자기에 싸인 물건이 담장에 놓여 있어 집안에 가지고 들어와서 풀어 보니 향기가 퍼지는 가운데 의연스님이 나왔다. 이 사실이 덴지천왕(天智天皇)에게 전해지자 왕은 의연스님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자기의 아들인 초벽왕자(草壁皇子)와 함께 길렀다. 훗날 의연스님은 이 자리에 용개사(龍蓋寺, 류가이지)를 지었는데 이것이 강사(岡寺)의 전신이다. 의연스님은 일본 최초의 법상종을 전해준 분으로 제자에는 동대사의 양변(良弁)스님, 생보살로 알려진 행기(行基)스님 등 나라시대의 쟁쟁한 고승은 모두 의연스님의 제자이다”

위 이야기에서 나오는 담장 아래 놓여 있던 ‘갓난아기’는 미스터리의 주인공인데 덴지천왕(天智天皇)이 이 아이를 자신의 왕자와 함께 키웠다는 것이 범상치 않다. 출신 성분도 모르는 아이를 왕실에서 차기 왕이 될 태자와 함께 키운다는 것은 어느 왕조에서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왕실가의 아들이 귀했다면 모르지만 당시 덴지천왕(天智天皇)(626-672)은 왕후와 궁녀 등 부인이 9명이나 되고 이들 소생의 자녀가 16명이나 있던 사람이다. 이러한 수수께기를 풀기 위해서는 의연스님의 출신을 알아야 한다. 의연스님은 그 출신이 이치키시(市往氏)이며 이 성씨는 조정에서 하사받은 성씨로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에 따르면 ‘백제 성명왕으로부터 유래한다, 百濟聖(明)王より出づ’라고 되어 있다. 일설에는 덴지천왕(天智天皇)이 큐슈 행차 시에 백제 성명왕의 후손인 호족의 딸과 관계를 맺고 낳은 게 의연스님이라는 설도 있다.

문제는 오카데라 쪽에서 의연스님=백제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두루뭉실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법상종의 시조’로 알려진 의연스님은 여러 문헌에서 그 출신이 백제인임을 기록하고 있는데 정작 오카데라 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천여 년 간 열심히 의연스님을 받들어 모시고 있다. 해마다 의연스님을 위한 제사 공양을 곁들인 다도회(野点茶會)가 열리는 데 이 날은 선착순 1,000명에게 무료로 차를 대접하기도 한다.

절을 창건하고 매년 공양을 올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 훌륭한 의연스님이 백제 출신이라는 것까지 알렸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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