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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성 동쪽 들판 살곶이벌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2.03.25|조회수266 목록 댓글 0

 

 

아차산은 그리 높지도 빼어나지는 않다. 그래도 서울의 명산이다.
도성의 동대문 밖으로는 그 명산 아차산까지 넓은 들 살곶이벌이 펼쳐졌다.

살곶이벌은 동쪽에서 서쪽로 흐르는 한강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드는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큰 벌판이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기 전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이다.
그는 서울 도성 동쪽 벌판 동교에 나아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 때 응봉에서 활을 쏘자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의 살곶이목장에서 기르는 말의 음료로 사용했던

도요연(桃夭淵)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이 후로 새가 떨어진 곳을 ‘살곶이’ 그 주변 벌판을 ‘살곶이벌' '전관평(箭串坪)’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부터 살곶이벌은 관중 관교 동교 등으로 불리어져 왔다.
이곳은 자연히 평야가 형성되어 풀과 버들이 무성했으므로 조선 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다.
또한 임금의 매 사냥터로도 두드러진 곳이어서 ’동교수렵(東郊狩獵)이란 말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3년 아직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 동교 살곶이벌에 나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때 응봉에서 활을 쏘았던 바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천 도요연(桃夭淵: 뚝섬 벌 목장 말들의 음료로 사용했던 지금의 살곶이 다리 부근)에 떨어졌다.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다음해 3월 한강 위 지금의 응봉 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한다.
조선 왕조 정부는 이 넓은 땅을 국립 목장으로 만들었다.
이 일대가 목장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과거 마장(馬場)의 안 넓은 벌판이라고 일컬어지던 장안평이다.마장동은 조선 초기부터 숫말을 기르던 숫말목장 양마장(養馬場)이 있었는데서 비롯된 지명이다.제주도 같은 곳에서 어렵사리 말을 한양으로 운반해오면 암말은 지금의 자양동(雌養洞: 옛이름 雌馬場里)으로 보냈다. 암말을 키우는 자마장동(雌馬場洞)이 훗날 자양동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목장 맞은편이라는 뜻의 동네 이름이 바로 면목동이다.

 

한양대학교 캠퍼스에는 말의 안녕을 비는 마조단(馬祖壇)의 터가 있다.

과거의 중요한 교통수단 중의 하나는 바로 말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말을 위해 왕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왕이 말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 바로 마조단이다.
마조단은 말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천사성(선목, 마사, 마보)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마조단의 기원이 어느 때인지를 나타내는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부터 말의 돌림병을 예방하기위한 제사가 있었다. 고려 초기 마조단의 규모는 너비가 9보, 높이가 3자이며

사방에 출입하는 층계가 있었다. 길일(吉日)에 임금이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이 풍습이 답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어느 왕 때 마조단을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옛 풍습을 타파하는 정책에 따라 마조단의 제사도 순종 2년(1908)에 폐지되었다.

 

아차산에는 이 목장을 두르는 목장성을 쌓았다.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부터 아차산 서쪽 기슭은 사냥터로 각광을 받았다.
거기에는 바로 국립목장 사복시(司僕寺) 살곶이목장이 있었다.
역대 왕들은 뚝섬에 마련한 성덕정(聖德亭)과 화양정(華陽亭)에서 기마 군사들의 열무행사를 관람하였다.
아차산 서쪽 기슭의 국립목마장은 일명 살곶이목장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 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보고 환멸을 느껴 왕위를 내놓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정종도 2년 만에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자 태종이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세상의 이목을 생각하여
부친인 태조에게 국왕으로 인정받고 싶어하였다. 태조를 서울로 모셔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를 모시러 신하를 함흥으로 보내면 태종의 행실을 노엽게 생각하는 태조 이성계는
사신이 올 적마다 죽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심부름을 보낸 뒤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생겼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서울로 모셔 오게 되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자 동교(東郊), 지금의 살곶이벌에서 환영 연회를 열도록 하였다.
이때 하륜(河崙)은 연회장에 큰 차일을 칠 때 굵고 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놓도록 건의하였다.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태종이 인사를 드리려 하니 갑자기 태조 이성계가 태종에게 활을 쏘았다.
태종은 굵은 기둥을 안고 요리조리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태종이 술잔을 드리는데 하륜의 말을 쫓아 신하를 시켜 잔을 올리게 하였다.
“모두 천명(天命)이로다.”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며 장탄식을 했다.
이 부근을 살곶이들(箭串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연산군 12년(1506).

젊어서 서울에 역군(役軍)으로 올라왔던 어느 노인이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의 회고담이다.
"나는 일곱살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 번(番)을 들었는데,
그 때는 연산군이 황음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다.
연산군의 얼굴을 쳐다보니 얼굴빛이 희고 수염이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다.
화양정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서 기르던 암말 수 백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두었다.
연산군이 정자에 자리를 잡자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하고 시신(侍臣)들은 물리쳤다.
이어서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몰아넣으므로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 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그 해 가을에 중종반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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