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征明假道).”
일본이 내새운 조선 침략의 명분이었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 명종이 써보라는 왕관을 정중히 거절하는 선조다.
어른스러운 행동으로 16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는 처음에는 뛰어난 판단과 정치력량으로 1년 만에 수렴청정을
거둘 정도로 촉망받던 왕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능한 왕이 되고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왜군이 북상함에 따라 조정은 그 대책을 논의하였다.
끝까지 맞서 싸우자는 주장이 많았다.
다른 계책도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자는 파천(播遷) 이었다.
다른 하나는 만주의 요동으로 망명하자는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이었다.
이 두 계책의 입안자와 결정자가 다름 아닌 바로 국왕인 선조였다.
선조는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 채
4월 30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한양을 버리고 파천(播遷)을 단행했다.
최후의 방어선인 문경새재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내주었다.
명장 신립도 충주에서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당시 조선에는 일본과 싸울 만한 군사도 없었고 군사 정보도 없었다.
선조가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안 것은 왜군이 상륙한 후 나흘 뒤였다.
신립도 적이 10리 앞에 접근해 올 때까지 몰랐다고 한다.
조선군은 지휘체계가 서지 않아 도원수 순찰사 순변사 병사 수사 등 명령이 여러 갈래에서 나왔다.
왜군을 보기도 전에 조선군은 산으로 도망갔다.
왜적에 밀려 북으로 쫓겨간 선조는 압록강 건너 요동으로 망명을 도모했다.
서애 류성룡이 "어가가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된다"며 반대했으나
선조는 여차하면 도주할 마음뿐이었다.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다.
어떤 대군(大君)은 일본군과 내통하며 사익을 취했다. 백성에게 붙잡혀 왜군에 넘겨진 대군도 있었다.
선조는 도망가느라 바빴다.
서울을 사수한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선조는 피란을 갔다.
고분고분하던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류성룡의 '징비록' 등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전한다('조선 왕을 말하다').
가장 놀랍고 슬픈 것은 백성들의 움직임이다.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나서자 난민들은 장예원(掌隷院)과 형조에 불을 질렀다.
두 기관은 노비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백성들은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내탕고(內帑庫)를 약탈했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를 불태웠다.
적이 오기 전에 백성들이 스스로 저지른 짓이다.
노비문서를 불태운다고 궁궐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선조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멀리 평산까지 도망간 선조는 요동내부(遼東內府) 의사를 비치기 시작했다.
요동내부란 국가와 백성을 버리고 선조가 소수의 비빈(妃嬪)만을 데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명나라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망명론 이었다.
내부(內附)는 사전에서 <은밀하게 내부에서 적에게 들러붙음>과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음>으로 풀이한다.
내부는 단순히 왕의 개인적 망명이 아니다.
자국의 주권을 포기하고 나라를 통체로 넘기기는 것이다.
선조는 단순하게 개인적 망명이 아니였다.
조선을 명나라에 귀속시키려 한 것이다.
신하들이 극력으로 반대를 하였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선조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더욱이 세자(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도망가기위해 선위론을 밝히기도 하였다.
요동내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선조가 계획을 철회했기 때문이 아니다.
명나라에서 망명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이 왜와 결탁해 명나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가 요동으로 가지 않은 것은
이순신의 혁혁한 전과 명(明)의 참전 의병 봉기 등으로 전세가 역전됐기 때문이다.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한양을 떠났다.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혔다.
많은 생령이 죄없이 쓰러졌다.이때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해 백성들이 나선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1593년 정월에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1592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고경명·조헌·김천일·김면·정인홍·정문부·이정암·우성전·권응수·
변사정·양산숙·최경회·김덕령·유팽로·유종개·이대기·제말·홍계남·손인갑·조종도·곽준·정세아·
이봉·임계영·고종후·박춘무·김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권율은 문신이면서도 타고난 장수감이었다.
그는 그렇게 대범하고 통이 큰 사람이었다.
권율은 46세 때인 158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좌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鏡城判官)·의주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전라도순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과 함께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했다.
용인에서 일본군과 마주치자 권율은 우선 임진나루를 확보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
결국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전했다.
광주에 되돌아갔다가 전라좌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금산군 이치(梨峙)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정예부대를 크게 이기고 호남을 지켰다.
대둔산 중허리를 넘는 배티재(340m)다.
웅령·모악·내장산을 달려온 노령산맥의 준령이 힘차다.
골짜기가 깊고 배나무가 많아 이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곳이다.
배티재는 임진란 당시 권율 장군이 전주로 입성하는 2만여 명의 왜군을 1500여 명의 군사로 막아낸 곳이다.
행주대첩, 진주대첩에 앞서 육전에서의 승전고를 처음으로 울린 3대첩의 으뜸이다.
권율은 사위인 이항복에게 "내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이치대첩이 최고이고
그 다음이 행주대첩이다"라고 소회했다.
이 공으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했다.
이해 12월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대군을 보내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를 굳게 하면서
유격전술로 맞서 이를 격퇴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서울에 고립되었다.
1593년 2월에 선거이에게 5,000의 병력을 나눠주어 시흥 금주산에 진을 쳐 도성의 왜적을 견제케 한다.
자신은 관군 2,300명과 처영(處英)의 승병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때 왜장 우키다가 지휘하는 3만의 적군이 7대로 나뉘어 맹렬히 공격했으나
관민이 일체가 되어 싸워 적을 격퇴하고 크게 이겼다.
조선 조정도 행주대첩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됐다.
승첩 보고가 행재소에 올라가자 선조임금은 권율에게 자헌대부 조경에게 가선대부
의승 처영에게는 절충장군의 벼슬을 내리고 모든 장사(將士)에게 상과 벼슬을 줬다.
선조임금은 권율을 칭찬하기를 “경이 아니었으면 어찌 국가가 온전할 수 있었으리요” 했다.
6월에 권율은 도원수가 된다. 선조가 그를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행주산성 대첩기념관 입구의 ‘안내말씀’에는 행주산성 전투 승리의 4대요인이 적혀 있다.
"첫째 권율장군과 휘하 장수의 완벽한 전략과 전술 둘째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식 무기 사용
셋째 강 절벽 등으로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적 지리적 조건
넷째 민 관 군 승려 부녀자등이 혼연일체가 된 목숨을 건 전투이다."
권율장군은 아래와 같이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행주의 싸움은 내가 이치에서 공을 세운 뒤에 있었고, 권력과 지위가 벌써 무거웠기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들이 이미 내게 돌아온 터이다.
호남의 정예롭고 용맹한 장졸들이 다 수하에 예속됐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수효도 수천 명을 넘었다.
지리도 또한 험해 적병의 수가 비록 여러 배 됐지만 그 기세가 이미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공을 세우기 쉬었다.
바로 명군이 위압해 있고 각도의 근왕하는 군사들이 경기도 내에 바둑돌처럼 깔렸으나,
나의 행주 싸움의 성공이 때 마침 모든 군진 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공이 드러나기가 쉬었던 것이다.”
그뒤 파주산성으로 옮겨 주둔했다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휴전상태가 되자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해 6월 행주에서의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으나,
도체찰사 순찰어사와의 불화로 말미암아 도망병을 즉결처단한 일이 빌미가 되어 1596년 해직되었다.
바로 한성부판윤으로 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고, 충청도순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