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건국신화 속의 여성
“봄빛은 깊고 옅음이 없다(春色無深淺)”라는 말이 있다. 정조의 사위인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1793-1865)가 그린 묵란(墨蘭)에 써놓은 글귀이다. 많은 꽃이 한꺼번에 흐드러지게 피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절이라면 꽃의 향기도 짙고 옅음이 있겠지만, 겨울의 차가운 얼음장 밑에서도 움츠려들지 않고 봄의 희망을 피워낸 난의 향기는 너나없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말이다. 봄 날씨 답지 않게 퍽이나 쌀쌀한 4월 초, 냉혹한 겨울의 시련을 이겨내고 터뜨린 꽃가지의 꽃망울의 축복을 받으며 시민인문학강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강의 주제는 신화 속에서 여성의 궤적을 쫒아 그들의 꿈과 이상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신화가 수천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화가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상상력을 발동하여 내용성을 부여하면 인간의 이야기인 역사가 된다. 그러면 역사에서 소외되어온 여성들은 건국신화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1)고조선 단군신화속의 웅녀
곰과 범은 둘 다 사람이 되고자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을 먹었다. 하지만 범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곰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간이 되었다. 여자가 된 곰은 더불어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매번 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잉태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였다.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곰의 인간이 되기 위한 시련의 극복은 그의 아들 단군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를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2)백제 건국신화속의 소서노
삼국사기에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소서노는 졸본부여왕의 세 딸 가운데 둘째이다. 주몽에게 그녀를 시집보낸 것을 보면 소서노는 당시 졸본부여를 계승할 유력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가 우태와 결혼하여 과부로 남았을 때는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졸본부여를 통치한 사실상의 군주였다. 그녀는 북부여에서 쫓겨난 주몽을 받아들여 같이 고구려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치기 전에 낳은 유리왕을 태자로 임명해 버리자, 고구려의 기틀을 세운 소서노는 주몽에 안주하지 않고 두 아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주역이 된다.
3)신라 건국신화속의 알영
고구려의 주몽이 알에서 태어난 것과 같이 신라 시조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났다. 주몽의 아버지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여 주몽의 탄생이 하늘과 직접 연결되었다면, 혁거세는 천제의 아들이란 모티브 대신 말을 중개로 하여 하늘과 간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한편 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용은 땅과 하늘을 남나들며 조화를 보이는 신령한 동물로 최고 통치자인 왕에 비유된다. 건국신화가 정리될 때는 남성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은 건국자를 돕는 조연의 역할을 담당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용과 연관된 인물은 남자인 혁거세가 아니고 여자인 알영이다. 신라의 경우 혁거세의 탄생신화는 일반적인 난생의 형태를 띤 반면 알영은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혁거세보다 알영의 탄생이 더 신비롭게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다.
이상 새롭게 이주하는 부족과 토착 부족 간의 정치적 저항과 갈등, 대립 또는 화해와 연합 등의 긴장관계가 반영된 건국신화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건국신화에 내포된 여성의 건강성, 창조성, 진취성이 창조적으로 계승되어, 성차별이 극복된 양성 평등시대를 열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정리(한상권/덕성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