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의 역린과 여성의 저항-유관순을 둘러싼 재현의 성정치

작성자늘봄|작성시간12.09.12|조회수164 목록 댓글 0

8강. <근대국가의 역린과 여성의 저항-유관순을 둘러싼 재현의 성정치>

 

공동체의 신념, 가치체계, 행위규범을 구성원들에게 주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위인 만들기이다. 공동체는 만들어진 위인이라는 상징조작을 통해 특정한 가치와 행위 규범을 구성원들에게 반복적으로 주임함으로써 사회통합력을 높이고 안정성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과정에서 재생된 기억이 역사적으로 기념하기에 알맞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가질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관순(柳寬順: 1904-1920)이라는 위인이다. 권김현영의 강좌 글과 정상우의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역사와현실 74)을 통해, 유관순이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1. 영원한 누나로 기억되고 있는 유관순

 

1910년 일제강점의 역사가 시작되어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이다. 특히 ‘유관순=3.1운동’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유관순은 우리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의 기억을 독점하고 전유(專有)하는 인물이다. 유관순은 3.1운동을 계획·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민족대표 33인을 뛰어넘는 3.1운동의 대표적 표상인 것이다.

충남 천안 태생인 유관순은 이화학당 재학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옥사했다. 그러나 명성에 비해 유관순에 관한 자료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관순에 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하게 남아있고, 이조차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전기와 시 등 2차 자료들이 중심이며, 전기 등의 자료에서는 기본적인 생년월일조차 정확하지 않다. 해방 이후 유관순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화학교 교장 신봉조 역시 유관순을 전혀 몰랐다.

 

사회자: 신박사님은 어떻게 유관순을 알리게 되었나요

신봉조: 박선생님(박인덕: 필자 주)이 그때 말씀, 그게 시초가 되어, 나는 유관순 말도 못 들어봤어. 이화학교 교장이면서.… 박인덕 선생이 열렬하게 하던 그 말씀이 고대로 살어서 전기가 되어 한국 민족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알려진 거죠.

 

유관순이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누나'가 된 데에는 강소천(1915-963)이 노랫말을 쓰고 나운영이 작곡한 ‘유관순’이라는 노래가 한몫을 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 봅니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3.1운동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이한 상을 가지고 있으며, 유관순 역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즉 유관순을 통해 3.1운동을 떠올리고 일제의 무차별적 탄압과 한민족의 저항정신을 떠올리는 것은 남한만의 현상인 것이다.

 

 

2. 친일세력에 의해 영웅으로 부활된 유관순

 

유관순이란 인물이 실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해방이 된 직후에 갑작스럽게 '영웅'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유관순에 관한 기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문인 신한민보에 처음 나온다. 1919년 9월 2일자 신한민보는 1919년 4월 1일 천안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을 전하고 있는데, 먼저 천안에서의 만세운동은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과 박종만이 주도하였다는 점을 밝히고, 운동 당일 자신과 모친까지 일제에 의해 학살된 김구응을 비중 있게 보도하였다. 신한민보는 이어 유관순으로 추정되는 한 이화여학생의 수감사실을 알리고 있다.

 

한 이화여학생의 체포-소녀의 양친은 원수에게 피살

서울 이화학당 학생 000여사는 자기의 양친이 오랑케 왜적하게 피살을 당하여 분기의 맘을 단단히 먹고 각처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왜적의 사냥개에게 발각되어 중상함을 입고 왜적의 손에 붙들려 피수하였다더라.

 

박은식이 ‘피의 역사’(血史)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도 부녀자나 수인(囚人)에 대한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유관순으로 보이는 인물에 대한 서술은 없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해방 당시 유관순의 인지도는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다. 1947년 말까지도 유관순은 대중에게 생소한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유관순이 세상이 알려지는 데에는 박인덕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박인덕은 이화출신으로 유관순이 이화학당 재학 중 교편을 잡고 있었으며, 3.1운동에 가담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 중 유관순을 접하여 유관순의 행적을 알게 되어, 해방 직후 이를 이화여중(현재 이화여고) 교장으로 재직하던 신봉조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인덕과 신봉조 이 둘은 해방 이후 과거의 행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닮아 있었다. 농촌계몽과 여성계몽을 위주로 사회활동을 하던 박인덕은 친일 단체 녹기연맹의 지원으로 1941년 덕화여숙을 설립하면서 1945년 광복 시점까지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연설, 논설 등의 친일 행적을 보였다. 신봉조 역시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맡고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도 참여하는 등 일본 제국의 전쟁 수행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친일 지식인이었던 박인덕과 신봉조는 자신들의 친일 과거를 덮고 새로운 도덕적 권위를 부여해 줄 표상으로서 유관순을 재발견하였다. 결국 해방 직후 유관순이 부각된 것은 이른바 우파로 지칭되는 세력에 의한 것으로 이는 자신들의 과거 친일이라는 과오를 정화하는 동시에 정치적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3. 이승만정권에 의해 권위주의적이고 신성화된 유관순

 

유관순의 삶과 죽음은 1950년대에 전기와 영화 등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유관순 전기는 1953년 전영택이 집필한 <순국소녀 유관순전>과 1954년에 정광익이 쓴 <잔다크와 유관순> 그리고 1960년 박화성에 의해 쓰여진 <타오르는 별> 세 가지가 대표적이며, 이 세 권에 서술된 유관순에 기초하여 이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위인전집 등이 집필되었다. 또 유관순에 관한 영화는 48년 윤봉춘 감독 고춘희 주연으로 만들어져 이후 윤봉춘 감독은 동명의 영화를 3회나 다시 찍었다. 이 중에서 59년에 도금봉 주연의 영화가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54년 한국전쟁 직후 집필된 정광익의 <잔댜크와 유관순>의 서문에는 “우리나라가 금일처럼 여성들의 분발을 요청할 때는 역사상 드물 것”이라며,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아직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대도 “사회정화에 큰 몫을 담당할 일부 지식층의 여성들은 반대현상으로 마지막 골목으로 퇴폐하여가고 있다”며, 이 책을 엮게 된 동기가 여성들의 정신 진작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한국전쟁 이후 유관순에 관한 전기와 영화물들이 쏟아지게 된 것은, 전후에 어지러운 사회질서-특히 여성의 성적 문란과 남성이 부재한 가정에서 여성의 규범을 바로잡기 위한, 남성적 필요에 의해서였다.

교과서에 유관순이 등장한 것은 전쟁 이후 교육과정이 마련되면서부터였다. 1차 교육과정(1954-1963)의 초등교육용 교과서에는 삼일절(2학년), 유관순(3학년), 삼일정신(6학년)이라는 단원을 통하여 3.1운동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많은 내용을 싣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유관순을 언급하고 있다. 1차 교육과정기 초등교과서에 나타난 유관순의 모습에서는 이전 전기나 영화에서 그려졌던 독실한 기독교도로서의 모습은 탈락되고 구국의 영웅으로서 이승만, 공산군과 싸우는 국군의 모습, 건국의 모습 등과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즉 3.1운동과 그 정신을 애국, 건국, 반공과 연결시키면서 유관순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이미지를 탈락하고 구국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하려 했던 것이다.

 

 

4. 박정희정권에 의해 국난극복의 영웅으로 만들어진 유관순

 

식민시기 이후 새로운 신화와 영웅의 창조, 그리고 식민 강자의 인정을 욕망하고, 이를 가장 가시적으로 프로젝트화한 인물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친일 의혹을 해소하고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나라를 구한 민족 영웅들을 다시 불러냈다. 박정희는 민족 역사와 문화유산을 정비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충무공 이순신 사당, 유관순 유적 정비, 윤봉길 의사 유적 중건 및 정비, 율곡 이이와 이황 이퇴계 서원 등을 정비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이순신과 유관순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원한 영웅으로 각급 초등학교 이순신과 유관순의 초상화를 액자로 제작하여 걸게 하는 등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1968년 4월 27일 서울신문의 '애국선열 조상건립 운동사업'에 따라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에 들어서고, 한산도의 제승당이나 현충사 등 이순신의 연고지가 대대적으로 성역화 된다. 아울러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이순신, 유관순, 이승복, 세종대왕, 신사임당의 조상(彫像)이 전국의 초등학교 교정마다 건립된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박정희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남자는 문무를 갖추어야 하고, 여성은 현모양처이자 애국자여야 하며, 아이들은 반공(反共)해야 애국하는 것이라는 규범은 이와 같은 동상 건립과 문화유산 복원을 통해 시도한다. 이러한 영웅과 신화 창조의 과정에서 세종대왕과 이순신, 신사임당과 유관순의 대비는 흥미롭다. 각각의 역사적 영웅들은 한글을 만들어 백성을 무지에서 구해낸 세종대왕과, 나라를 구한 영웅 이순신, 그리고 아들을 잘 키워낸 신사임당과 빼앗긴 조국의 비극성을 상징하는 유관순으로 재현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 여성 영웅은 가부장제를 지켜낸 영웅인 것이다.

 

5.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3.1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전환점이 되는 대사건이다. 대한민국은 헌법의 첫머리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 하여,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에 대한 기억이 유관순이라는 인물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역사 인식이 협애화(狹隘化)되고 역사상(歷史像)이 박제화 되었다.

3.1운동 하면 유관순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가 부각된 데는 '영웅' 사관과 '의연한 죽음'이라는 두 가지 원인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민족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일제식민통치를 거부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3·1만세시위는 남북 가리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개되었다. 당시 2000만 국민 중 2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고 밝혀진 집회 횟수가 1542회였다. 15살 소녀에게 일경이 “누가 시켜서 만세를 불렀느냐”고 문초하니, “새벽닭도 누가 시켜서 우느냐”고 따질 정도로 3·1운동은 강력한 한민족의 독립자주정신을 보여주었다. 3.1운동 진압의 명목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던 일본 경찰의 한 고위 간부는 일본인들이 기생집에 놀러 가면 기생들은 웃지도 않고 이야기도 하지 않고 술잔을 내밀면 묵묵히 술만 따르고 노래나 춤을 청하며 절대 응하지 않아 마치 지옥에서 유령과 술을 마시는 기분이라고 하였다. 일본 헌병 경찰들까지도 한국의 기생은 화류계 여자가 아니라 독립투사들이라고 혀를 찰 정도였다. 1919년 3월1일부터 5월 말까지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으로, 어느 하나 숭고한 희생이 아님이 없다.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유관순도 수많은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일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유관순이 상징하는 '영웅적 죽음'은 1920년대 이후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부상과 자유 평화 등 새로운 시대정신의 등장 등이라는 역사적 흐름에 비추어 볼 때도 3.1운동정신을 대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3.1운동은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기억되어야 한다.

 

첫째, 3․1운동을 분수령으로 한국역사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만세전(萬歲前) ‘공동묘지’였던 조선사회가 만세후(萬歲後)에는 ‘신천지’로 바뀌었다. 나라의 주인이 임금(군주정)에서 백성(공화정)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조선역사가 국권을 빼앗긴 ‘아픔의 역사’(痛史)에서 주권을 되찾는 ‘피의 역사’(血史)로 바뀌었다.

 

둘째, 3․1운동을 분수령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3․1운동 이후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 등이 시대이념으로 등장하였다. 한용운이 조선독립의 이유로 “자유는 萬有의 생명”이라고 천명했던 것도 이런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개인의 인격과 자유 평등이 1920년대 문화운동의 기본이념이 된 것이다.

 

셋째, 모든 사회세력들이 자신을 자각하고 자아실현이라는 공동이상을 표출하였다. 민중은 민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노동자는 계급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여성은 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을 분출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투쟁’을 통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는 계급적 자각을 통해 노동권․생존권 확보를, 민중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국권회복을, 여성은 성적 자각을 통해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3․1운동을 직접 체험하였던 청년 김산은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라고 시대분위기를 전하였다. 정리/한상권(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이상으로 지난봄(2012.4.9.-5.21) 한국역사연구회와 노원도봉시민단체가 함께 한 아홉 번째 역사인문학강좌 「여성, 역사 속에서 만나다」 에 대한 정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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