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임진왜란 후 한양으로 환도하여 월산대군의 집 등에 마련한 정릉동행궁이다.
조선 권력의 중심지가 경복궁에서 정릉동 행궁으로 이동하면서 정동시대를 개막한다.
선조는 1608년 2월 정릉동행궁 침전에서 승하했다.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 즉조당에서 즉위한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잠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즉위 3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하였고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광해군 7년 1615년 다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조의 계비인 임목대비만 거처하게 되었다.
1618년에는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유폐시키면서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이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즉위하니 그가 인조이다.
인조는 즉위 원년 7월에 선조가 거처하던 침전인 즉조당과 석어당만 제외하고 경운궁을 월산대군 후손에게 돌려주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피난가면서 전쟁 중에 광해군을서둘러 세자로 책봉된다.
선조는 왕세자만큼은 꼭 정식 왕비의 자식으로 책봉하고 싶었다.
선조의 정식 부인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선조는 후궁 6명과의 사이에 왕자 13명 옹주가 10명을 두었다.
정식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대신들은 각각 원하는 후궁의 왕자들을 지지하면서 국론이 분열되기 시작한다.
좌의정 정철은 분열되는 정치상황을 막기 위해 빨리 세자를 책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유성룡과 같이 선조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정철과 유성룡은 당시 기성사림은 서인계열이었고
그들은 첫째아들인 임해군보다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더 지지하였다.
물론 둘 다 후궁의 자식이다. 선조는 후궁의 아들인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정철을 '왕을 넘어서는 위세를 보인다'면서 유배보낸다.
후공 공빈의 아들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게 된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4월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참패하고 자결했다는 소식이 서울로 날아들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 길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그날 저녁 신립의 동생 우부승지 신잡은 선조에게 왕세자를 빨리 책봉하여 민심을 수습하라고 건의한다.
선조는 대신들을 창덕궁 선정전으로 불러모았다.
"왕세자로 누가 좋겠냐?"
선조가 물었다.
"그것은 전하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대신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선조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대신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선조의 고민과 대신들의 침묵은 낮부터 한밤까지 이어졌다.
영의정 이산해가 지쳤는지 자리를 피하려 하자, 신잡이 '오늘 끝장을 봐야 한다.'고 잡아끌었다.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로 삼고 싶은 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선조의 이 한마디에 대신들은 "종묘 사직과 생민들의 복입니다."라고 외쳤다.
광해군이 엉겁결에 왕세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4월30일 선조와 광해군은 북으로 파천 길에 올랐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권력의 일부를 떼어주는 분조(分朝)를 맡아 함경도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조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권력의 일부를 떼어주는 분조(分朝)를 단행한다.
왕세자는 전시에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를 넘나들면서 전장을 누비면서 백성들의 높은 신망을 얻었다.
"더이상 이 성(城)을 떠나지 않겠다.백성들과 이 성을 끝까지 지키겠다."
선조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여러차례 이렇게 다짐한다. 그것도 잠시 서둘러 그 성을 버리고 떠난다,
선조는 갈수록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불신을 받고 신망을 잃는다.
광해군은 세자의 몸으로 의병을 독려하고 전투를 선두에서 지휘하면서 그의 신망은 갈수록 높아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한양으로 환도하고 정릉동행궁에서 조선왕조를 이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 한양에 평화가 찾아왔다.
선조는 전쟁이 끝나자 세자 광해군의 부상에 몹시 신경이 쓰였다.
다시 광해군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그만큼도 갈등도 커갔다.
정식 부인도 아닌 후궁 출신의 광해군이라는 점도 선조에게는 가장 켕겼다.
1605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난나. 선조의 나이 55세이었다.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50이 넘어 다시 19살의 인목왕후 김씨와 결혼한다.
그때 낳은 아이가 선조의 유일한 정비의 아들 영창대군이다.
당시 조선의 세자는 중국 명나라에서 형식적으로 세자 책봉을 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중국은 광해군이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을 미루었고, 선조는 광해군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광해군은 실컷 고생하고 죽을지도 모를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이 2살밖에 안 되었다. 그무렵 선조가 위급한 병에 걸린 것이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대신 정치를 맡기려 하였다. 광해군은 죽었다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선조의 병이 다시 나아지자, 선조는 또 다시 광해군을 구박하기 시작한
특히 중국의 책봉도 받지 못한 세자는 왕도 인정할 수 없다는 괴팍한 논리로 광해군을 핍박하였다.
광해군은 피를 토하고 죽으려고도 하였다고 이야기는 전한다.
이 틈을 비집고 광해군 쪽의 대북(정인흥)과 영창대군을 둘러싼 소북(유연경) 세력 사이의 암투는 시작된다.
선조 말년 영의정 유연경은 광해군 쪽 세력을 이끌던 정인홍을 제거,귀양을 보낸다
1608년 선조는 병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정릉동행궁 침전에서 세상을 떠난다.
세자 광해군이 즉조당에서 왕에 오르면서 정인홍은 '광해군의 남자'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대신 영창대군 쪽의 세력을 이끌던 유연경은 권좌에서 쫒겨나 상황이 반전된다.
광해군은 정릉동행궁을 경운궁으로 개칭하고 창덕궁싹을 티우고 있었던 것이다.
신왕 광해군에게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