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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산부사 정약용이 노래한 태조 이성계와 강비의 사랑의 시.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2.11.02|조회수435 목록 댓글 0

 

정조는 곡산부사로 간 다산 정약용에게 특별한 어명을 내린다.
조선의 첫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고향 곡산이다.
곡산부사 정약용에게 강씨와 태조 이성계의 '버들잎 사랑'을 밝혀달라는 특명이다.
그때 정조 임금의 분부를 받아 그 버들잎 사랑의 근거인 샘터와 강비의 탄생지를 찾아 나서 유명한 시를 남긴다.
"가람산 아득하여 흰구름 꼭대긴데
천마가 달리던 그 옛날이 생각나네
비바람 일으킬 팔룡을 먹이다가
만리 산하 달리려고 채찍을 처음 가했다오
밤이면 마도석에 철창이 번득이고
새벽이면 동작으로 수라천 물 길었다네
험난한 고생 끝에 왕실 세운 걸 생각할 때
이 곳을 그려다가 님의 앞에 바치고 싶다"
(岢嵐縹緲白雲顚 天馬星馳憶舊年 風雨八龍齊仰秣 山河萬里始投鞭
鐵槍夜照磨刀石 銅勺晨㪺水刺泉 想像崎嶇肇王跡 欲將圖繪進君前)
곡산에서 북쪽으로 80리 그 부근 치마곡이 있다. 가람산을 비롯해 천미터 넘는 고봉준령이 늘어서 있다.
이 능선을 타고 태조 이성계는 개성과 함흥을 말을 타고 오고갔다.
그러다 신덕왕후 강씨를 치마곡 준령 아래 수라 샘터에서 만난다.
목이 마른 태조 이성계는 강씨에게 물을 달라하고 여인은 표주박에 버들잎을 가득 띄워 놓는다.
그때 그 연못은 용연(龍淵)이다. 치마곡 아래 연못이다.
태조 이성계는 그 아름다운 인연을 기려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용연에서 3리 정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곡산부사 있으면서 이 용연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용봉은 우뚝하고 용연은 깊고 깊어 두 용이 그 옛날 용계에서 만났네.
숫용이 번개 같이 빠른 말을 타고서 활을 메고 허리에는 화살 통을 차고서
불구름이 일어나듯 그 용이 목이 타서 콸콸 흐르는 시내 찾아 말 멈추고 섰다네.

(龍峯矗矗龍淵淵 雙龍昔會龍溪邊 眞龍赤驃如飛電 腰帶彤弓大羽箭 龍喉欲焦火雲勃)

 

누구인지 시냇물에 빨래하는 여인 물러(이 여인이 신덕왕후)
말라붙은 목 적시려고 마실 것을 청했지.
머리 숙여 물 뜨더니 금방 오지 않고서는 수양버들 잎을 훑어 잔 속에다 듬뿍 넣고
버들잎 불어가며 빨리 마시지 말라면서 빨리 마시면 얹혀서 탈이 난다 하더라네.
(溪上浣絮誰家女 喚取壺漿思解渴 低頭挹水不便來 却撒垂楊葉滿杯 煩公吹葉勿急飮 急飮中傷反爲災)


확 풀린 용안에 운우의 정(성적 욕망이 일어)이 일어 그날로 들 물에다 다리를 당장 놓았는데
그 용이 등천한 후 그 집을 못 잊어서 고을이 환하도록 큰 집 지어 표했다네.
(龍顔一解雲雨起 卽日舟梁橫野水 龍飛上天表厥宅 綺閣雕牕照鄕里)

 
정릉의 석마(신덕왕후 무덤 정릉)는 풀 속에 묻혀 버리고
화려했던 그 집도 쑥대만 우북하여 지금도 부로들이 훌쩍훌쩍 흐느끼며
우뚝 서 있는 돌기둥만 바라다볼 뿐이라네.
(다산이 곡산부사로 있을 때 돌기둥만 서 있는 용연의 모습을 시로 그리고 있다.)
(貞陵石馬埋草中 故宮寥落生飛蓬 至今父老呑聲泣)

신덕왕후는 황해도 곡산의 고려 충혜왕 때 세도를 떨친 권문세가의 규수로 태어났다.
이성계가 타고난 무예와 지도력으로 그간 쌓은 군공을 바탕으로
권문세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크게 성장을 한 후 정략결혼을 하였다.
혼인할 당시 강씨는 이성계보다 21살 가량 연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생년도는 남아있지 않다.
당시 이성계는 첫 부인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장성한 아들들을 두고 있었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친 것을 계기로
정몽주가 그를 제거하려 했을 때 생모인 한씨의 무덤에서 여묘살이를 하던 이방원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불러냈다. 또한 이방원이 그 해 4월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씨였다. 이는 강씨의 수완과 결단력을 상징해주는 대목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담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개국으로 강씨는 1392년(태조 1년) 8월 7일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해졌다.
태조의 충실한 내조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그녀의 뛰어난 지략은 조선 건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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