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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정동행궁'으로 한양의 중심지로 된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2.11.07|조회수299 목록 댓글 0

 

 

정동에는 한양의 5대 궁궐 경운궁(덕수궁)이 있다.

이 경운궁 터에는 세조가 수양대군시절에 살던 잠저 명례궁이 있었다.

세조의 세자였던 의경세자의 비 소혜왕후(인수대비)가 한때 궁에서 물러나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의경세자의 큰 아들인 월산대군과 둘째 아들 자을산군과 함께 살았다.

자을산군이 나중에 왕위에 올라 성종이 된다. 월산대군은 왕의 친형으로 사저에 거처하였다.

성종 10년 12월에 월산대군은 돌아가고 다만 그 부인인 박씨만 연산군 시기까지 생존하여 있었다.

선조는 1952년 4월 28일 밤 한양을 버린다.

왕은 왜란을 피하여 백성을 버리고 왕족과 신료들만 데리고 의주 용만까지 파천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 10월 4일 한양으로 환도한다.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3궁과 종묘가 병란에 소실되었다.

부득이 월산대군 고택을 임시 행궁으로 삼고 이름을 시어소라 하였다.

당시 월산대군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자 덕풍군이 그 고택에 살고 있었다.
그 고택은 참으로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했다.처음에는 그 집 둘레에 겨우 목책을 돌려 세웠다.

그 집 근처에 계림군과 심의겸 등 고관들의 집이 있었다. 쓸만한 이웃의 고관들의 집도 동원하였다.

월산대군의 집은 정전으로 계림군의 집은 침전으로 심의겸의 집은 동궁으로

그리고 심연원의 집은 종묘로 사용하였다.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시어소로 조성하였다.

이 시어소를 행궁으로 삼았다. 그 행궁은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운다.

 

선조의 시어소 정전으로 쓰던 석어당이다. 

월산대군의 집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전각이다.

석어(昔御)란 '옛날 임금이 사시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전각 이름을 석어당이라고 했다.

석어당은 궁궐 내의 유일한 목조 2층 건물이다.

단청을 하지 않은 궁궐 건물로도 유명하다.

초기 영국성공회 성당 건물 신축의 모델이 된

석어당이다.

선조는 1609년 2월 57세로 죽을 때까지 16년간

이 행궁에 머물렀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남산 밖의 소나무를 갖다 가가(假家)를 만들어

관서(官署)로 사용하였다.


왕은 힘없이 국토를 왜에게 내줬다.

왜는 조선에 상류한지 16일만에 한양을 함락한다.

1592년 4월 13일 왜는 조선 부산 앞바다에 치고들어왔다.

왜는 14일 부산성을 점령하고 15일에는 동래성을 함락시킨다.
왜군은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로 조선을 유린한다.

조선은 철저히 침략전쟁을 준비한 왜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부산 동래 상주를 함락시키고 삽시간에 경상도 일대를 점령한다.
다음 계속 북상하여 조령을 넘어서 충주로 진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제1군단장으로 임명받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18,7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의 선봉에 나섰다.
당시 조선에는 100년 이상 계속된 전국시대 동안 수많은 전투를 거쳐 단련된 일본군을 당해 낼 힘이 없었다. 
왜의 장수들은 전국시대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싸움에는 베테랑'이었다.
 포르투칼에게서 받은 조총을 개량한 신무기로 무장하고 조선을 공략한 왜군이다.
 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철저하게 준비하온 왜이다. 
왜의 침략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조선이다.
조선은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다.
조정은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였다. 양반 계급끼리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다.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전쟁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은 조선이었다.
신립은 남한강변에 위치한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군을 맞이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군은 시종 일본군에게 밀리고 끝내 8,000여 명의 병사는 장렬히 전멸했다.

신립은 남한강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소식을 접한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떠난다.

그 후 개성 평양 의주 등지를 전전하며 힘들게 피난을 다녀야만 했다.

한양을 사수한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피란을 간 것이다.
멀리 평산까지 도망간 선조는 요동내부(遼東內府) 의사를 비치기 시작했다.
요동내부란 국가와 백성을 버리고 선조가 소수의 비빈(妃嬪)만을 데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명나라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망명론 이었다.
내부(內附)는 사전에서 '은밀하게 내부에서 적에게 들러붙음'과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음>으로 풀이한다.
내부는 단순히 왕의 개인적 망명이 아니다.
자국의 주권을 포기하고 나라를 통체로 넘기기는 것이다.
선조는 단순하게 개인적 망명이 아니였다.
조선을 명나라에 귀속시키려 한 것이다.신하들이 극력으로 반대를 하였다.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혔다.
많은 생령이 죄없이 쓰러졌다.이때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해 백성들이 나선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왕이 백성과 함께 버리고 간 조선을 그 의병들이 왜적과 싸워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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