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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망앙 변이중

작성자웃음꽃|작성시간21.08.07|조회수91 목록 댓글 1

 

 

   세계 최초 미사일 원리 화차 발명

                  (망암 변이중, 望庵 邊以中)

 

 

   4백 년 전 국토를 밟고 짓누른 왜에 맞서서 학자적인 과학성과 실천철학을 통해 국가를 위기

   에서 건져낸 선비.

 

   신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율곡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 나라 실학의 학맥에도 봇물을 대준 인물.

 

 

     ‘왕대밭에 왕대 난다.’

     ‘우리 몸에는 장군의 피가 흐르고 있다.’

     ‘뿌린대로 거둔다,’

     ‘태교야말로 중요하다’

 

   이것은 장성의 변(邊)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철학이다.

   인간 중에서도 모든 면에 월등한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를 철저히 지켜야 한

   다는 것이다.

 

   우선 건전한 정신과 올바른 마음자세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3일 전부터 술을 삼가야 한다.

 

   술을 마시게 되면 온몸에 술기운이 퍼져 정신상태가 혼미 해 지고 이 술기운이 새 생명에 그대

   로 미쳐서 바보나 얼간이가 태어나게 된다는 것, 특히 새 생명을 갖게 되면 마음가짐을 항상

   바르게 하고 누구에게나 성질을 내지 말며 과로하지 말고 아무리 화급한 일이라도 달리거나

   넘어지지 말며 입덧이 아무리 심해도 고른 식사로 태아에게 충분한 양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다.

 

   이 내용을 그대로 실천할 때 보다 우성적인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다는 가훈이다.

 

   임진왜란 때 지상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화차를 발명, 행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역 망암 변이

   중 선생(1546~1611)은 이런 꽤 까다롭고 정갈한 가풍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서인지 어려서

   줄곧 ‘신동’소리를 들었다.

 

   장성읍에서 황룡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5리쯤 올라가다 산기슭을 끼고 조금 더 가면 장안리 봉

   암마을이 있다. 이 마을 중간쯤 단아한 기와집 마당엔 매화, 살구나무가 잘 가꿔져 있다.

 

   살구나무 아래서 19세의 변이중 청년은 금방 나주 오(吳)씨 딸에게 장가를 들고 이를 계기로

   자기 자신을 냉엄하게 돌아보면서 겸허하게 자문을 한다.

 

   “과연 지금까지 내가 품었던 청운의 꿈들이 한갓 공명에 불과하지는 않는가?

 

   성리학 만 해도 그렇다. 그 오묘한 섭리들이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이 모두

   가 결코 허망하지 않을진대 왜 이리 확실한 깨달음이 오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 훌륭한 스승을 찾아보자“

 

   가슴이 답답한 변이중은 당대 훈학으로 이름 높던 성운 선생을 찾아 공부한 후 22세 때 율곡

   을 만난다. 마침 외할머니 병간호를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강릉에 내려간 율곡을 찾아 그 변화

   를 겪는다. 학문 뿐 아니라 정치관, 국가관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선생님 성리학이 우리 현실적 삶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결국 공리론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옳소 원래 성리학의 정신은 우주의 사물과 인간마음을 하나의 세계로 이해하려는 학문이지

    요, 역사적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여건 통찰이 필요하지요.”

 

   “그러면 지금의 역사적 현실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역사를 혁명, 보수적 유지, 혁신으로 크게 나눈다면 지금은 보수적 유지를 지나 혁신시대에

    있다고 볼 수 있소. 모두들 당론을 망론(亡論)이라 하는데 여론(與論)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두 당론을 기피하는데도 말입니까?”

 

   “왕의 절대 권력 아래서 당론은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소. 언로가 막힐

    때 나라는 망하오. 백성의 입은 하루도 막을 수 없는 것이오, 온 백성이 옳다고 동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국시(國是)이기 때문이오.”

 

   특히 경제와 과학 국방에 관한 율곡의 각별한 관심과 통찰력은 뒤에 망암이 화차를 만들고 전

   쟁에 뛰어들어 나라를 구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후 그는 23세 나이로 성균관 생원이 돼 명실공히 최고학부에서 공부하게 된다. 학업에 전력

   하면서 높고 깊은 인생의 경지를 깨닫는 새로운 차원의 공부를 하고 성리학 뿐 아니라 불경까

   지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4대 사화 이후라 젊은이들이 벼슬길에 나가기를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망

   암도 경세 탐독에만 열중하다가 이율곡을 찾아가 “불편부당의 정치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며

   벼슬 뜻을 은근히 비추었다.

 

   “있긴 있지. 일당전단을 막고 왕이 성군이면 말이 세.

 

   서경에 탕탕(蕩蕩)평평(平平)이 있질 않은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치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네.”

 

   탕평이라... 망암은 탕평책을 폭넓게 공부해 30세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리라 다짐하면서

   율곡 선생의 <자경문>을 매일 실천했다.

 

     먼저 뜻을 크게 지녀라

     마음을 가다듬어 혼자를 삼가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미리 생각하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상대방에게 감화를 주도록 하라

     공부는 늦추지도 않고 서둘지도 않는다.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 중에 개인적으로 불행한 이가 꽤 있다.

   이를 두고 하늘은 한 사람에게 두 가지를 다 주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망암도 사회적 명망은 대단했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불행한 사람이었다.

   27세 때 문과 초시에 합격, 종 9품 벼슬이 내려졌으나 율곡의 제자라 하여 오랫동안 동인의   

   배척을 받아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29세 때는 셋째 아들 경윤이 태어났는데 부인 오씨가 산고로 세상을 떠났다. 슬

   픔은 계속됐다. 2년 후 부인 탈상을 하고 새 장가를 들자마자 어머니가 몸져눕더니 저승길로

   가셨다. 어머니가 가신 후 아버지마저 시름시름 앓더니 같은 해에 유명을 달리했다.

 

   망암은 연이어 상을 당하면서 조선사회가 지키고 있는 <주문공가론>4권을 저술했다. 가장 소

   중한 사람 셋을 멀리 보내고 나자 먹구름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35세가 되자 첫 벼슬길이 터졌다. 경적의 인쇄와 향축, 인전을 담당하는 종9품의 벼슬. 이때

   부터 국사에 전격 매진 일취월장하여 성균전적, 호조좌랑까지 승진하게 된다.

 

   그러나 율곡이 이조판서로 타계하자 예조좌랑으로 전보돼 장례를 주관하고 손수 제문을 지었

   다. 율곡 사후 망암은 선생이 남긴 재산이 없어 유족들의 생계가 막연하자 그들을 위로하고

   돌봐주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율곡을 미워하고 시기했던 시국이라 망암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2년 후 41세 되던 봄에야 은계찰방으로 제수되지만 병을 구실로 부임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2년 동안 그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학문과 정치가 어떻게 하면 일치할 수 있을까를 연구

   했다.

 

   그러나 1592년 4월 17일 급보가 날아든다. 왜적이 침입한 것이다. 선조를 위시한 조정은 아수

   라장이었다. 뚜렷한 계책도 없이 말싸움만 계속됐다.

 

   망암은 안타까워 혈서로 상소를 올린다.

 

   “···전하가 피난을 가시려함은 국가의 보존을 도모하려는 뜻이 없는 소치라 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닥칠 재앙과 근심을 통촉하시고 깊이 앞뒤의 인심을 살피사 궁중의 마필과 짚신들을 돌려주신다면

     백성들은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비록 침식이 평안하지 않으시다 하더라도 날마다 묘당의 여러 어진이들과 더불어 대책을 물으시고 재

   앙을 돌리는 길을 강구하시면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옛날 한나라 신하 제갈양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치던 날 어려움이 많았으나 출사표에서 반드시 현신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니 중흥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왜적은 승승장구 서울까지 진격했다.

   망암은 이순신의 해전 승전보를 접한 후 육전에서 왜적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동안 연구

   해 온 무기인 화차를 하루빨리 만드는 길뿐이라고 다짐하고 설계에 들어갔다.

 

   그동안 수십만의 조선사람 목숨을 앗아간 일본 조총을 박살 낼 수 있는 것은 화차뿐이다 고 믿

   고 선조에게 50일간의 휴가를 청했다. 망암은 임금앞에 <화차도설>을 폈다.

 

   “어떤 것인지 설명해 보구료.”

 

   “이것은 승자통기라 합니다. 평탄한 곳에서는 2인이, 험난한 곳에서는 4인이 끌 수 있사온데

    산을 넘고 물을 건널 수 있으며 수레에 튼튼한 나무와 쇠로 장갑을 하고 3면 40경의 총구를

    내어 구멍마다 승자통으로 무장되옵니다.”

 

 

 

 

   고향 장성에 내려온 망암은 장성현감 李貴(이귀)와 상의하여 화차 제작의 시급함을 설명한 후

   장성군 삼서면 송현리 공평부락 앞 안산과 북이면 조양리 봉학산 일대에서 화차를 제작했다.

 

   완성된 화차는 보통 수레와 달리 바퀴기 커서 차체를 받치는 축이 높기 때문에 발사각도를 0

   도에서 45도까지 자유롭게 조절 할 수 있으며 수레 위에 장갑을 씌운 승자통기, 총통기, 신기

   전기 등의 화차용 무기를 적절히 거치하여 사용 할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때 권율장군은 수원의 <독성산성>에 들어가 적을 기다리면서 왜적의 공격을 수차례 받고 있

   었다. 그때마다 이 화차를 이용. 적을 배후에서 공격. 위기를 모면케 해준 이가 망암이며 우리

   가 잘 알고 있는 행주대첩도 화차의 승리였다.

 

   교과서에 보면 어이없게도 행주대첩이 마치 여성들이 행주치마에 싸서 나른 돌멩이에 의해 승

   리를 얻어낸 것처럼 기술 돼 있다. 그러나 행주산성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거나 군사학에

   초보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싸움은 분명 화차의 위력이었음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1994년 대전에서 열린 세계 엑스포에 바로 이 망암 선생이 발명했던 화차와 신기전기가 설계

   도 원형대로 선보이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우리 과학의 위대함이다.

   신기전기를 본 세계 과학자들은 이 무기가 미사일 원리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다탄두 무기라

   고 격찬한 바 있으니 망암의 과학적 사고 깊이를 알만하다.

 

   우리 역사 전통 중 외면했던 자연과학적 큰 업적중 하나인 것이다. 망암이야말로 진정한 자연

   과학의 선구자였다.

 

   나이가 들수록 가장 그립고 가고 싶은 곳은 고향이다.

 

   60세가 된 망암도 함안 군수직을 파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그의 자연과학

   과 화차 제작능력. 정치. 교육. 경제. 군사전략가로서의 업적을 높이 사 호성 1등, 선무 2등훈

   을 내려 구국의 공훈을 치하했다.

 

 

   망암은 고향에 내려와선 사회운동가로 변신한다.

 

 

   현재의 장성인 진원과 오산은 임진왜란의 가장 극심한 피해를 당했다 망암이 바로 이곳에서

   화차를 제작했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자신들의 패인을 화차로 여기고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

   들었 던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진원과 오산을 합해 장성으로

   하고 소재지도 장성읍 성산으로 옮김에 따라 민심이 소란하고 사회기강이 문란해진 상태였다.

 

   망암은 안되겠다 싶어 이 지방에 맞는 <향헌 20조>를 만들어 사회기강을 바로잡기 운동을 폈

   다. 당시 장성의 지도급에 속한 정운룡, 김추담 등과 영사정(永思亭)에 모여 실천 방안을 논

   의 , 지역 발전과 후진 양성에도 기여했다.

 

 

   장성에서 조용히 향촌운동을 폈던 망암은 1608년 선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 즉위한

   3년 후 1611년 눈을 감았다.

 

   조정에서는 장례에 필요한 여러가지 제물을 내렸고 제관을 보내 제사를 지냈으며 평상시 망암

   을 가장 존경하던 김추담이 통곡하며 글을 올렸다.

 

   최근 망암에 대한 장성사람들의 재조명 작업이 활발한 가운데 장성문화원 이사 김형렬씨가 <

   소설 변이중>을 출간, 관심을 모으는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김씨는 망암이 ‘강한 덕을 가슴에 품고 있었고 기개는 높은 하늘을 덮었으며 지혜는 천하를 뚫

   어보기에 족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나라가 위급하자 화차와 신포를 제조했으며 백성이 근심하고 괴로워 할 때 향헌을 만들어 민

   초들의 삶을 보살폈고 탁월한 신견과 판단력으로 심득(心得)했던 점에 반한 듯 하다.

 

   현재 망암의 생가가 있었던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는 선생을 기리는 <봉암서원>이 세워져 있

   다. 그 옆에 지어진 ‘시정관’에는 화차 등 각종 무기가 망암 선생 문집에 있는 설계도에 따라

   재현, 제작터에서 제작된 다른 무기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장성의 <봉암서원>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 

 

     

 

   그러나 여느 다른 문화재처럼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다. 봉암서원은 1697년 창건됐으나 고종

   6년 전국 서원철폐령에 따라 방치돼 있다가 1975년부터 복원을 논의,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

   유림 및 제자들의 헌성으로 1984년 2월 준공했다.

 

 

   대전 엑스포에 전시된 신기전기가 미사일의 원리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다탄두 무기라는 격찬

   을 받고 있지만 장성 봉암서원을 찾아 그 신기전기를 제작한 이가 살았던 곳이라며 감회에 젖

   는 이는 없다.

 

   사사로운 욕심을 죽이고 냉정히 일을 처리했으며 절대로 남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던 망암은

   숨을 거두는 자리에서도 심득(心得)을 강조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우주만물을 관조했다고 하

   니...

 

   장성 들판에 서서 심득의 진리, 심득철학을 곰곰히 되살펴 볼 일이다.

 

 

   ☞ 참고 장소 및 문헌

        0 <출생지> - 전남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

        0 <서 당> - <봉암서원>

        0 <작 품> - <주문공가론>4권, <망암집>

 

 

 

              작년(2011년) 11월 장성 동화면에 소재한 군부대에서 화차복원 시연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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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웃음꽃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8.07 임진왜란 당시 화차 삼백대를 나라에 바쳐 나라를구한 변이중의 십육대 직계 후손입니다. 변이중은 기학자 였으며 웃음 꽃은 그 분의유전자를 받아
    기와 건강법을 평생 연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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