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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 스님을 사모한 처녀

작성자보리밭길|작성시간19.04.11|조회수174 목록 댓글 1


1화,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죽음을 건 아가씨의 사랑에 환속한 스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어느 미남 승려와
 폐결핵 환자 아가씨와의 청순한 러브 스토리  


원효(元曉) 대선사가 요석공주와 동침하여 파계한 끝에
설총(薛聰)을 낳았다는 천년 전의 로맨스처럼 지현(知玄)
스님의 로맨스는 물씬한 감동마저 준다.
 

스님과 처녀러브 스토리


지금은 환속하여 부산(釜山)에서 알뜰하게 살고 있다는
그들의 파계 장소 전남(全南) 여천(麗川)군 돌산도
(突山島) 향일암(向日庵)에 얽힌 얘기-.


전남(全南) 여수(麗水)시에서 배를 타고 1시간쯤 가면
돌산(突山)섬이 나온다.

 

여천(麗川)군 돌산(突山)면 율촌(栗村)리에서 1km쯤
북쪽에 금오산(金鰲山)이 있고 산에는 흔들바위란 게 있다.
  

★암자에서 맺은 스님과 처녀의 러브 스토리.★


 집채만큼 큰 바윗덩이가 사람이 밀면
흔들거린다는 기묘한 바위다.
 

이 흔들바위 밑에 까치집처럼 앙증맞은 향일암(向日庵)
이란 암자가 있다. 하지만 이 암자의 유래는 거창하다.


 신라 선덕(善德)여왕 13년(사기 639년)에 원효(元曉)
대사가 창건했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이 곳을
 
본거지로 승군(僧軍)이 활약했다는 곳. 

그 건 그렇고 이 일대 경치가 장관이다.
 



울창한 낙락장송의 솔바람 소리, 온갖 기묘한 모양의
바위, 그리고 남해바다의 장쾌한 파도가 기막힌 절경이다.

 
1957년이면 17년전. 키가 헌칠하고 미목수려한 스님 한분이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로부터 향일암(向日庵)으로 왔다.


당시 나이 27살, 법명은 지현(知玄), 속명은 박영식(가명),
호는 호월(湖月).경남 남해(南海)가 고향인 지현(知玄)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 하던 19살에 출가, 전국 유명
사찰을 돌아다니며 10년을 목표로 수도하다가 마지막 
3년을 채우기 위해 향일암(向日庵)을 찾은 것이다.




지현(知玄)스님은 절 주변을 알뜰하게 손질한 뒤 백팔
염주에 사바세계 번뇌를 실어 깊은 사념의 경지를 거닐었다.

 

그동안 폐사처럼 버려져 있던 향일암(向日庵)에는
이로부터 여신도들이 몰려들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곡식 위의 제비같은 탈속(脫俗)의
지현(知玄)스님, 게다가 인물 좋고 경치마저
 
절경이어서 그는 인기 스님이 된 것이다.
 
 
 
세월은 흘러 59년 봄이 되었다.
향일암(向日庵)에서 1km 떨어진 해변가 율촌(栗村)
마을에 양장 차림의 미인 아가씨가 찾아들었다.
 
광주(光州)에 산다는 박애희(朴愛姬)양(23·가명).
폐결핵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요양차 이모가 사는
율촌(栗村)에 왔다는 
 

그녀는 발그레한 볼의
홍보가 요정처럼 기막히게 예쁜 미인.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아열대성 식물인 동백·산죽(山竹)·비화(飛花)가 온
 
섬을 뒤덮고 바위 틈에 도사린 석란(石蘭)의 향기는 십리
안팎을 뒤덮어 6순 환갑이라 해도 마음 설렐 판이었다. 


박(朴)양의 병은 이런 절묘한 풍경의 
탓(때문)이 었는지 눈에 띄게 회복되었고,
 
차츰 힘이 생겨 산책 코스를 넓혀갔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띈 남성이 바로 지현(知玄)스님.
 

 


부처님 앞에 정좌하여 청아한 목소리로
독경하는 근엄한 모습을 취한듯 응시했다.
 

이로부터 그녀는 2개월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향일암(向日庵)을 찾았다.
 

그녀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고 지현(知玄)
스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잠이 들 수가 없게 되었다.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그러나 스님은 장승.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었다.
가을이 되어 사무친 가슴 속의 사연이 맺히고
 
맺혀 이번엔 폐결핵이 아닌 상사병에 
몸부림하다가 농약을 마셔 버렸다.
 

위급한 그녀를 두고 이모 되는 여인은 조카의 애절한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지현(知玄)스님에게 달려가
『그 애를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스토리


스님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나의 손길보다는 당장 해독
시키게 녹두물이나 먹이시오』했다.


이모는 되돌아와 녹두를 갈아 먹였다.
의사 없는 갯마을에서 꼼짝없이 죽어야 했던
그녀는 신통하게도 살아났다.
 
59년이 저물고 새해 음력 1월14일 새벽 4시.
지현(知玄)스님은 화엄경(華嚴經)을 독경하며
새벽의 경내를 산책하고 있었다.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그때 느닷없이 뒷산에서 비통한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스님은 뒷산으로 달려갔다.
 
박(朴)양이 흔들바위에 맨발로 서서 바다를
향해 투신하려는 찰나였다.
 

혼비백산한 지현(知玄)스님. 자기로 인해 원한을 품고
죽을 여자를 생각하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그는『아가씨 소원은 뭐요? 다 들어 주겠으니
제발 뛰어 내리지 만 말라』고 애원했다.
 
그녀의 소원이란 불을 보듯이 뻔한 것.
『스님과 함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망설이고 더듬거릴 나위가 없었다.
『알겠으니 제발 그곳에서 내려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 소리를 듣자 박양은 바위 위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스님은 그녀를 구출해 냈다.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스토리


암자에 누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님의 품안에 안겨 몸부림치며 울었다.
 

난생 처음으로 싱싱한 여인의 체취와 풍만한
마찰감에 스님도 얼이 빠져 버렸다.
  
29년동안 막혀 있던 정열이 용솟음 치기
시작 하면서 마침내 10년 수도를 1년도 못
남기고 거센 폭포수 속의 물거품이 되었다.
 

이날 새벽부터 지현(知玄)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지난 65년 여름. 대구(大邱)
D사에서 참회의 수도에 전념하던 지현(知玄)스님은
어떤 모녀의 방문을 받았다.
 
『이 애가 스님의 딸입니다』면서 모녀는 6살
귀여운 아기를 내보였다. 
 

스님은 가가대소,
 
『그렇습니다. 내 아이입니다』하면서
즉시 승복을 벗고 딸을 한가슴 가득 안았다.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뒤로 스님 부부는 딸 하나에 아들 
하나를 더 얻어 1남2녀를 두었다.
 
지난 71년 5월. 향일암(向日庵)을 중창할때 속인
지현(知玄)부부는 찬조금 5만원을 보냈다.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그들은 현재 부산 영도구 봉래동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으나
  
찾아간 기자에게 사진 찍기를 거부-.
 

그러나 한 여인의 억센 사랑의 집념으로 10년 수도
  승의 마음을 움직인「흔들바위」는 오늘도 의연하다.
 
   - 麗水=金德鉉 기자 -


2화 스님을 사모한 처녀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통도사에서 가장 높은 산내암자 백운암에

홍안의 젊은 홀로 경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장차 훌륭한 강백이 되기를 서원한 이 스님은

아침 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기원하면서 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님을 사모한 처녀


아직 산기슭 군데 군데에 잔설이 남아 있던 어느 봄날.


스님은 여느날 과 다름없이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경을 읽고 있었다 


문득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스님을 사모한 처녀


『스님, 계십니까?』『뉘신지요?』

문을 연 스님은 이번엔 귀가 아니라 눈을 의심했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을 사모한 처녀


『늦은 시각, 이렇게 깊은 산중에 웬일이십니까?』

『소녀, 친구들과 나물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면서

길을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막막하던 차에

불빛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통도사 호혈석 유래


하룻밤만 묵어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면 그 은혜 잊지않겠습니다.


사연인 즉 딱하나

소승 아직 젊은 나이에 혼자 수행 중이고,


방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으니 매우 난처하군요


 통도사 호혈석(백운암)


하오나 스님,

이 밤에 소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소녀의 간곡한 청을 들은 스님은 어두운 산길에

처녀를 혼자 돌려 보낼 수 없다고 생각됐다.


난처하긴 했지만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준 스님은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스님을 사모한 처녀


스님의 경 읽는 음성은 낭랑했다.

고요한 산중에 울려퍼지는 그 음성은


마치 신비경으로 인도하는 듯

처녀를 사로잡았다.


처녀는 그밤부터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됐다.


스님을 사모한 처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처녀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다.  


스님을 사모하는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가 마침내 처녀는 병을 얻게 됐다.


마을에서 지체 있는 가문의

무남독녀인 처녀는 좋다는 약을 썼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스님을 사모한 처녀


처녀의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좋은 혼처가 나와도 고개를 흔드는

딸의 심정을 알지 못해 안타깝기만 했다.


얘야, 네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어찌된 연유인지 속 시원히 말해봐라.



처녀는 지날날 만났던 젊은 학승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고백했다.

사연을 들은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스님이 아니면 제 딸이 죽습니다.




한 생명 건지신다 생각하시고

제 딸과 혼인하여 주십시오.


아무리 애걸하여도

젊은 스님의 굳은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 스님을 사모한 처녀(통도사의 한 전설) ♥


그 후 얼마 안가서 처녀는 병이 깊어져 죽게 됐다.

어머니, 소녀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불효를 용서하옵소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님 얼굴 한번만 보고

죽는다면 소녀 원이 없겠사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스님은 마음속으로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처녀 집을 방문치 않았다.


♤스님을 사모한 처녀♤


처녀는 그만 한 맺힌 가슴을 안고 눈을 감았고,

그 뒤 영축산 호랑이가 됐다고 한다.


그 후 여러 해가 또 지나

그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하여 드디어

산중 강사의 영광을 누리게 됐다.


연화가 무르익어 갈 무렵,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면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휙」하고 큰 호랑이가 감로당 지붕을

이리저리 뛰는 것이 아닌가.

「어흥, 어흥」

호랑이는 문을 할퀴면서 점점 사납게 울부짖었다.


대중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변일세. 필경 대중 속에 누군가가

저 호랑이와 무슨 사연이 있을 걸세.』


스님을 사랑한 처녀


『그렇다면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져보세.

그럼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이 아닌가.』

연회석에 참석한 스님들은 저고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다.


호랑이는 하나씩

받아서는 그냥 옆으로 던졌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마지막으로

새로 취임하는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마구 갈기갈기 찢으면서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 것이었다.


양산 통도사 백운암 스님을 사모한 처녀


대중들은 강백이 바로

호랑이가 노리는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였다.


강백 스님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는 아무래도 소승의 속세 인연인가 봅니다.』


말을 마친 스님은

합장 예경하고 바깥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다.


아무도 스님을 말리려 들지 못했다.

호랑이는 그 강백을 나꿔채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튿날 날이 밝자

산중의 모든 대중은 강백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깊은 골짜기마다 다 뒤졌으나 보이지 않던

강백 스님은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등성이에 상처 하나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강백 스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심볼」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통도사에서는 호랑이의 혈(血)을 눌러야겠다고

하여 큼직한 반석 2개를 도량 안에 놓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호혈석(虎血石)이다.

디딤바닥 돌이 호혈석을 살짝 피해서 놓여져 있다.



이를 「호혈석(虎血石」「호석(虎石)」이라

부르는데지금도 산신각에서 20m 남쪽 응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호혈석(虎血石)이다.

디딤바닥 돌이 호혈석을 살짝 피해서 놓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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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도행(道行) | 작성시간 19.04.11 첫번째 스님이 진정한 스님이네요 성은 신이 주신 선물인데 이것을 안해야 도가 딱인다는 생각은 누가한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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