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文益漸) 목화 이야기
문익점은
고려 말인 1329년(충숙왕 19)경상남도
산청에서
문숙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난 문익점은
11살 때, 충청도 한산으로 가서 이곡 스승에게
글을 배웠고 32살 때인 1360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김해부 사록이라는 벼슬을 받았습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원 좌정언에 올랐다가 1363년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공민왕 제거 음모에 연루되어 중국에서
뜻하지 않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고려에서는 볼수도 없는
무명옷을 일반 백성이나 귀족 모두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익점은
넓은 벌판에 하얗게
핀 목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천을 만들고,
그것으로 옷을 해 입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따뜻하고 질기고 깨끗한 것이
목화라는 풀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 문익점은
우리 고려도 저런 목화를 재배하기만 하면
백성들이 따뜻하고 질긴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겠구나
저 목화씨를 우리나라로 가지고 가야겠다.'
이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고려에는 무명천으로 만든 옷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고려에서는
누에고치로 만든 명주(비단)옷과 마로 만든
삼베옷을
주로
입었습니다.
그런데 명주옷은 귀하고 비싼 옷이어서
귀족이나 부자들만 입을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삼베옷을 주로 입었습니다.
한편 삼베옷은 겨울에 입기에는 매우
얇아서
일반 백성들은 겨울이 되면 추위에
떨며 지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문익점은 가난과 추위로 고통 받는 고려
백성들을
추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뜻을 가슴깊이
품었습니다.
그래서 귀양지 운남에서
고려로 돌아갈 때 반드시 목화씨를 가져가야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씨와 그 재배 방법이 나라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1363년 귀양이 풀려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문익점은
관리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붓 뚜껑
속에다 목화씨를 숨겨 갖고 나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고려로 돌아온
문익점은
예문관 재학의 벼슬을 받았지만 벼슬보다도
더 중요한 사명을 성취하고자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고향 경상도의 봄은 윈난 지방처럼
따뜻했습니다.
고향 산청으로 간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을
찾아갔습니다.
문익점은 중국에서 어렵게 가져온 목화씨 10개
중에
다섯 개는 자신의 밭에 심고 나머지 다섯
개는
그의 장인인 정천익에게 주어 심게
했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씨를 나누어 심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염려는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문익점이 심은 씨는 모두 썩었고 정천익이
심은 것은
겨우 한 개만 싹을 틔웠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정성껏 그 싹을 키웠습니다.
초가을 드디어 한 개의 목화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다시 싹을 얻었고 이를 해마다
늘려 심었습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목화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화 재배에는
성공했지만 목화에서 씨를 빼고 실을
뽑아내는
법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손으로 씨를 발리고 솜을 얻어
이불이나
베게에 넣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원에서 온 승려로부터
목화에서 씨를 뽑는 법과
실을
뽑을 수 있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비로소 이때부터 무명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정천익과 문익점이 목화씨를
심은 지 5년쯤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올이 성글고 시원한 삼베옷과 모시옷은
여름철에나 입었고
겨울이 되면
무명옷에 솜을 넣어 따뜻하게 겨울을 나게
될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문익점이
최초로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들여옴으로써 한민족의
의생활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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