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끝은 어디까지 일까?
1573년(선조 6년) 가을 선조 때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문관이었던 최경창은
북도평사(北道評事)로 경성(鏡城)
에 갔을 때,
그 막중(幕中)에 있던 기녀 홍랑과 친해졌다.
이듬해 봄에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오자
쌍성(雙城)까지 따라와 작별하고,
돌아가다가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시조 한수(아래 참조)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냈다.
그 뒤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떠나 7주야 만에
상경하였다.
그 때 양계(兩界, 평안도·함경도)에 금(禁)함이 있고,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죽은 탓으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촤경창은 관직이 면직되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눈물로 홍랑을 떠나보내며
최경창은 '송별(送別)' 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한시(아래 참조)를 지어 주었다.
최경창은 1582년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수(特授)하였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다.
그리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명을 고쳤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객사하였다.
목숨이 끊어지면 사랑도 잊혀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이 죽자
홍랑은 자신의 얼굴을 칼로 자해한
후
삼년상을 연인의 무덤가에서 시묘살이를
한다.
미모가 뛰어난 여인의 모습으로
그 일을 감히 담당하기
어려워서
자기의 얼굴을 칼로
자해하기까지 연인에
대한 정절과 사랑을
지켜내고...
곧 임란이 발변해서
연인의 작품들을 목숨을 다해
지켜내어
칠년을 유랑하다 기어이 최경창의 집에 당도해
목숨을 걸고 지켜온 연인의 작품을
가문에 전하고는
연인의 무덤가에서 자결하여
기생의 몸으로 일부종사하며
인정받지 못한 처지에서도
한결같은 사랑을 접거나
물리지 않은 사랑에 목숨 건 여인
홍랑의 사랑이 인스턴트 사랑이
유행하는 현대에
참으로 난초와 같이 고고함을 전하는 러브스토리....
가문에서도
홍랑의 의리와 절개를 인정해서
후실도 아니지만 최경창부부의 묘
밑에다
홍랑의 묘를 만들어
가문에서 오늘날 까지 그 공덕을
기리니
십년이라는 세월동안 바람의 나그네로 살았던
홍랑이 지키고 싶었던것은 무엇일까?
"깃털처럼 가벼운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우주와 같이 중하나이다."
과연 우리의 사랑의 무게는 어떤 여자의 삶은
더우기 천한 기생의
가치는
여느 물건과도 같이 치부되던 그 시대에
이렇게 당당하고도 높은 사랑에
감동하는 오늘입니다.
묏 버들가지를 골라 / 홍랑 詩
묏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의 창가에 심어 두고 부시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송별(送別)
/ 최경창
옥협쌍제출봉성
(玉頰雙啼出鳳城)
옥같은 뺨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나서니
효앵천전위이정
(曉鶯千囀爲離情)
새벽에 휘파람새도 이별을 울어
주네.
나삼보마하관로
(羅衫寶馬河關路)
비단적삼 좋은 말 타고 떠나는
변방
길
초색초초송독행
(草色迢迢送獨行)
풀빛만 아련히 외로운 길
전송하네.
상간맥맥증유란
(相看脈脈贈幽蘭 )
말 없이 마주보며 난초를
주노라
차거천애기일환
(此去天涯幾日還)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나
오려나
막창함관구시곡
(莫唱咸關舊時曲 )
함관령에서 부르던 옛 노래
부르지도 말아라
지금운우암청산
(至今雲雨暗靑山 )
지금까지도 구름비에 청산이
어둡나니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과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
홍랑
정신적인 교감이 가능했던 그들의 사랑
서른 네 살의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 함께 지낸 것은
6개월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다지만
가벼운 사랑 속에 길들여진 지금의
우리네가
그 사랑의 깊이를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