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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박상익]중세사(10): 샤를마뉴와 카롤링거 르네상스

작성자박상익|작성시간04.04.06|조회수678 목록 댓글 0
중세사(10): 샤를마뉴와 카롤링거 르네상스  

 

서양 역사에서는 세 명의 위대한 영웅이 각기 다른 시대에 등장하여 전 유럽 대륙을 지배했다. 그들의 이름은 카이사르, 샤를마뉴, 그리고 나폴레옹이다. 이들 셋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은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재위 768-814) )였다. 역사가 브라이스 경(Lord Bryce, 1838-1922)은 이 점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브라이스 경 자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샤를마뉴가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최초의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한 사건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역사상 아주 드문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브라이스 경에 의하면, “샤를마뉴가 황제로 즉위하는 그 순간 근대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실이야 어쨌든, 이러한 극단적 평가는 샤를마뉴 치세의 역사적 중요성이 그가 이룩한 물질적 성취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814년에 샤를마뉴가 죽은 지 불과 몇 세대 후에 그가 그토록 힘들여 통합시킨 대제국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만년의 황제는 바이킹족이 제국 북쪽과 서쪽 변방을 잠식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고 한다. 용머리 이물이 높이 치솟은 무시무시한 바이킹 배들이 세느 강, 르와르 강 등의 수로로 미끄러져 들어와서, 그들의 침략이 미치는 곳마다 공포를 확산시키고 제국의 권위를 철저히 파괴했다. 심지어 파리마저도 845년에 약탈당했을 정도이다. 1년 후에는 사라센인들이 남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와 로마를 공격하고, 성 베드로 성당과 사도들의 무덤을 모독했다. 그리고 나서는 유목민인 마자르인들이 제국의 동쪽 변방을 침투해 파괴 유린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샤를마뉴의 후손들은 무너져 가는 제국의 정치적 통일성을 유지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설상가상이라고나 할까. 유럽은 다시 한번 서로 대립하는 적대적인 작은 세력들로 분열되었다. 샤를마뉴 제국은 겉잡을 수 없는 내우외환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황제는 후대의 유럽인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에 대한 기억 주위에 믿기 힘든 장엄한 전설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후 이어진 철저한 파멸의 시기였다. 이 전설에 의하면, 그는 거대한 체구에, 나이는 200살이나 되었고, 브리튼에서 바그다드까지 광대한 영역을 위엄으로 다스린, “멋진 수염을 지닌 황제”였다. 그는 무적의 크리스천 정복자로서, 천사의 계시를 받았으며, 그의 검 주아이외즈(Joyeuse)에는 그리스도의 수난 때 사용되었던 창 끝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초월적인 용맹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훌륭한 미덕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어떤 연대기에 의하면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자신의 영토에 침입한 적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다른 연대기에는 그가 부활하여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고 전한다.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것은 11세기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곧 서사시의 중심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저 유명한 중세의 영웅서사시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에 그 내용이 잘 남아 있다. 1165년에 그는 교회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증되기도 했다. 그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성(聖) 샤를마뉴의 날은 최근까지도 프랑스 어린이들을 위한 축제일로 소중히 지켜지고 있다.

샤를마뉴 치세에 이르러, 서유럽 역사의 새로운 양상은 결정적으로 강화되었다. 그의 라틴어 이름은 카롤루스 마그누스(Carolus Magnus)였는데,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샤를마뉴는 중세 전 시기를 통해 가장 중요한 정치 지도자에 속한다. 만일 그에게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전체 서유럽인 가운데 잉글랜드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민족들과 맞서 싸웠다. 그의 원정은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그는 중부 유럽의 대부분과 이탈리아의 북부 및 중부를 프랑크 왕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이 임명한 주백(州伯, count)들에게 지방 행정의 전권을 일임했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궁정의 대리인을 보내 감시했다. 주백은 많은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법 운용 및 군대의 양성 등이 포함되었다. 물론 샤를마뉴의 체제는 결코 완벽한 것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로마 멸망 이후 유럽에 등장한 가장 훌륭한 정부였다. 샤를마뉴는 그의 군사적인 승리와 치세 동안에 그가 이룩한 국내 평화로 인해 서유럽인의 민족적 영웅으로서 길이 기억되고 존경받았다.

영토 확장과 효율적인 행정 운영을 위해 샤를마뉴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알려진 학문 부흥 운동을 주도했다. 샤를마뉴는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독일 지역에 지배권을 확장했다. 그러나 개종 사업을 위해서는 교육을 받은 수도사와 사제가 필요했다. 더욱이 광대해진 그의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읽고 쓸 줄 아는 최소한의 인력이 필요했다. 심히 놀라운 일로 여겨지겠지만, 집권 초기에 그의 전 영역에서는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이것이 중세 초기 서유럽의 중요한 한 단면이기도 하다.

로마의 도시 생활이 쇠퇴한 이래 유럽에서 학문은 그야말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철저히 소멸해버렸다. 당시 유럽에서는 오직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만 베네딕토 수도사들에 의해 읽고 쓰기가 가르쳐지고 있었을 뿐이다. 앵글로색슨족은 게르만어를 사용했지만, 수도사들은 기도문 낭독과 성경 읽기를 위해 라틴어를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에 라틴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철저한 학습 계획을 세워 배워야만 했다. 앵글로색슨 베네딕토 수도사들 가운데 샤를마뉴 이전에 등장한 최고의 학자는 비드(Bede, 735년 사망)였다. 그의 <잉글랜드 교회사>(History of the English Church and People)는 라틴어로 저술되었는데, 이 책은 중세 초기에 저술된 최고의 역사서 중의 하나로 오늘날에도 즐겨 읽을 수 있다.

샤를마뉴는 왕위에 오르자 앵글로색슨 베네딕토 수도사 앨퀸(Alquin)―비드의 제자의 제자―을 초빙해 대륙의 학문을 부흥토록 했다. 샤를마뉴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앨퀸은 읽기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 설립을 도우며, 로마의 고전들을 비롯한 중요 라틴 저작의 필사와 교정을 지도하고, 오늘날 “로마” 인쇄체의 기원이 되는 새롭고 또렷한 글씨체를 고안토록 했다.

우리가 읽는 영어 책의 활자체―그것은 서유럽 대부분에서 표준적인 서체가 되어 있다―는 카롤링거 소문자(小文字)라고 하는, 카롤링거 시대의 필사본에서 발전된 서법(書法)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라틴 고전 텍스트의 90%는 카롤링거 시대에 만들어진 필사본 또는 그 필사본의 사본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오랜 세월 이것들은 로마 시대의 필사본으로 잘못 알려졌고, 그 서체는 여전히 “로마”자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로마”자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다. 샤를마뉴는 “서로마”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가장 큰 업적들인데, 물론 그것은 독창적인 지적 노력이라기보다는 실용성 위주의 것이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미약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유럽 대륙의 학문 발전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으며, 그것은 그 후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라틴 문헌의 보존에 기여했으며, 라틴어를 서유럽 전체의 공용어 및 외교어로 정착시켰는데, 그와 같은 관행은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샤를마뉴는 신민들의 교육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지적 수준을 올리기 위한 노력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토 전역에서 샤를마뉴 자신보다 더 열정적인 학생은 없었다. 자기 개선에 대해 보인 그의 관심은 거의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 당시로서 샤를마뉴는 비록 총명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박식한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여유 시간에 글쓰기를 익히기 위해 침상 베개 밑에 늘 서판(書板)과 종이를 가져다 놓을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글쓰기를 배우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이 주도했던 개혁을 추진하고 아울러 그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실행에 옮기기 위해 그는 당시로서는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인물들을 주변에 불러 모았다.

샤를마뉴가 이러한 학자들을 초빙함으로써 유발시킨 지적 자극―그것은 궁정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은, 수도원 및 교구 중심지들을 통해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농업적인 세계 속에서 투르(Tour), 성 갈렌(St. Gallen), 라이헤나우(Reichenau), 풀다(Fulda), 로르쉬(Lorsch), 코르비(Corbie) 등의 카롤링거 시대 수도원들은, 마치 그 이전과 이후의 시기에 “도시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창조적인 문명 중심이 되었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기본적인 사회적·경제적 중심이 되었고, 그들의 경내에서는 예술과 문학, 건축과 기도문, 음악과 서법 등의 전통이 발달되었으며, 그것은 다음 시대에도 핵심적인 문화적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황제의 사망과 그 후의 정치적 혼돈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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