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세기에 이르러 서양 역사의 새로운 시대, 즉 중세 초기(600-1050)가 열렸다. 이 시기에 접어들어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는 단일한 제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펼쳐진 고대 문명이 끝나고 중세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결과 700년 무렵 지중해 연안에는 통일된 로마 제국 대신, 비잔티움 문명, 이슬람 문명,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문명 등 경쟁적인 세 개의 문명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 문명은 제각기 고유의 언어와 독자적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동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비잔티움 문명은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로마의 정치적 전통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결합했다.
비록 과거 서로마에 속했던 지역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비잔티움 황제들은 여전히 서유럽을 자신들의 지배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사실 8세기까지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력에 의지해서, 이탈리아 북부의 랑고바르트 족(롬바르드 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둘 것은, 비잔티움인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자처했고, 그들의 황제는 자신을 로마의 통치자, 즉 옛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비잔티움 제국이란 말은, 동서 로마의 궁극적인 분리 이후 서방인들이 동로마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정하기 싫어하여 “비잔티움적인” 제국이라고 칭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잔티움적(Byzantine)”이란 형용사형이 내포하고 있는 뜻들은 후대에 얻어진 것으로, 이른바 비잔티움인들은 그 말을 알지 못했다.
제국이 존속하는 마지막 날까지 로마라는 이름은 비잔티움인들을 매혹했고, 로마의 국가 전통들은 끝까지 그들의 정치적 사상과 의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둘째, 이슬람 문명은 아랍어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역동적인 신흥 종교인 이슬람교부터 정치적·문화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영화 <13번째 전사 The 13th Warrior>는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 원작의 소설을 대본으로 만든 것이니 당연히 픽션에 속한다. (그는 <쥬라기공원 Jurassic Park>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설정된 시대 배경에는 상당한 정도 리얼리티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중세 초기인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영화에서 보듯이, 아라비아 왕자인 주인공 안토니오 반데라스(Antonio Banderas)는 찬란한 문명 세계인 바그다드를 떠나, 야만족 바이킹이 사는 북유럽으로 떠난다. (이 바이킹의 후예가 바로 오늘날의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덴마크인이다.)
바이킹 왕의 예언자가, 특별한 임무를 띤 13명의 전사 중에 외국인 한 명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요청했기 때문에, 반데라스는 하는 수 없이 13번째 전사로 들어간다. (하필 13명이 된 것은 바이킹의 1년은 13개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 무지막지한 전사가 아니라, 다정다감하고 세련된 시인이었다. 우리는 극중 인물인 반데라스를 통해서 이슬람 문명이 이 시기에 달성한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의 화려한 문명이 북유럽의 바이킹 세계에 견주어 얼마나 돋보이는 것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셋째,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문명은 가장 발달이 늦었다. 경제적으로 발달이 늦었을 뿐 아니라 정치·종교적으로도 취약했다. 그러나 서유럽 문명은 그리스도교와 라틴어라는 통합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짧은 기간 내에 더 큰 정치적·종교적 결속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서유럽을 위에서 언급한 북유럽의 바이킹과 혼동하면 곤란하다. 서유럽이란 오늘날의 프랑스, 영국, 독일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를 원주지로 한 바이킹은, 10세기와 11세기에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서유럽 세력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궁극적으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문명이 두 경쟁자를 앞질렀기 때문에, 서유럽의 지식인들은 최근까지도 비잔티움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낙후된 비합리적인 문명이라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7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뒤떨어진 쪽은 바로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명이었다.
중세 전 시기를 통틀어 서유럽 최고의 영웅이었던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재위768-814) 대제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자였다. 반면, 샤를마뉴와 동시대에 이슬람 문명권을 지배한 칼리프는, <아라비안 나이트>에도 등장하는, 저 유명한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hid, 763-809, 재위786-809)였으니, 그의 시대에는 수도 바그다드가 학예의 중심이 되어 아라비아 궁정 문학이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 (물론 <아라비안 나이트>는 그후 10세기에 작성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대략 4, 5백 년에 달하는 기간에 걸쳐 서유럽은 비잔티움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그늘에서 살았던 셈이다.
역사학자들이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업적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들어서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