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 자유기고가 강유원 선생의 서평입니다.
http://networkpolis.net/bookreviews/29.htm
윌리엄 랭어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푸른역사, 2001)
1.
역사책을 읽으면 발견의 기쁨이 다른 책에 비해 곱절이다. 가령 새로운 시각에서 쓰여진 홉스(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 관한 주석서를 읽는다 치자. 그것이 새로운 해석임을 인정한다 해도 결국 관점의 문제로 귀착되므로 인정하기 싫으면 그만이다.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는 발명을 접하는 느낌에 가깝다. 역사책들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은 그야말로 사실(fact)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진리를 얻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서양사에 관한 개설서들은 더러 읽어본 적이 있다. 과시가 아니라 정보 제공의 차원에서 그것들을 좀 적어본다. 프레데리크 들루슈가 편집한 <새 유럽의 역사>(까치)는 교과서로 쓸만한 편년사이다. 홉스봄의 책들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는 명저들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소설들도 재미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지식공작소)도 재미있고, 조셉 폰타나의 <거울에 비친 유럽>(새물결)도 읽을만하다.
부문사에 있어서는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까치)나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창작과비평)는 이미 고전이다. 특별한 재미를 읽고 싶으면 블랑쉬 페인의 <복식의 역사>(까치)나 벌로 부부가 쓴 <매춘의 역사>(까치),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책세상), 오스트로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까치)도 집어들 수 있다. 인물 평전은 새삼 거론할 필요 없이 많다.
이번에 붙잡은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는 조금은 색다른 형식의 역사책이다. 우선 필자가 여러 명이다. 각 주제나 시대사의 대가들이 한 주제씩을 맡아 집필하였다. 그리고 시대별로 주욱 서술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주제나 인물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의 각 목차를 적어보자.
호메로스 새로 읽는 법
소크라테스, 역사에서 신화로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두 세계
노예상인 티모테오스의 생애
위대한 신앙 해석자 바울
야만족, 중세를 열다
불멸의 전설, 샤를마뉴
비잔티움: 세계의 또다른 절반
정복왕 윌리엄의 1066년
‘세계의 경이’ 프리드리히 2세
승리의 도시, 베네치아의 세계
근대를 연 항해왕자, 엔리케
이단의 네 얼굴
에라스무스,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
그리스도교 문명의 승리, 레판토 해전
대립과 극단의 시대, 바로크
돈키호테의 두 에스파냐
이렇게 제목만 보아도 유럽사의 전 시대를 망라하지 않았음은 금방 알 수 있으며, 굳이 이 책이 아니어도 더 자세한 서술을 담은 책이 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에라스무스에 대해서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자작나무)가 나을 것이라는 식이다. 게다가 이 책에 담긴 어떤 글에는 역사학에서 절대로 금기시되는 상상력이 개입된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글들이라 해도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의 뒷받침이라고 하는 기본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다. 글쓴이들이 그런 실수를 할만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권으로 된 깊이 있는 책을 읽기 귀찮아서 이 책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대가들이 쓴 글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시각’은 그런 두꺼운 책에서는 좀처럼 얻어내기 어렵다. 따라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역사를 보는 시각을 특정한 주제나 인물평전을 통해서 재빨리 파악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런 점들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각자 발견하기로 하고 난 이 책에서 내가 새롭게 알아낸, 또는 좀 더 확실하게 알아낸 것들 중 두 가지를 여기에 적고자 한다.
2.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난 알렉산드로스가 싸움만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스승이 아리스토텔레스임은 알고 있었으나 과연 스승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의심스러웠었다. 다음 구절을 한번 보자:
“알렉산드로스는 13세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3년 동안에 그의 예리한 정신은 철저히 그리스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고, ... 아시아 원정길에 알렉산드로스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을 위해 마련해준 <일리아스>를 휴대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 알렉산드로스의 가슴에 백과사전적인 지식에 대한 사랑, 특히 과학적 탐구와 의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더욱이 알렉산드로스는 이 철학자에게서 중용이야말로 정치에 필수적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아시아 원정에는 예술가, 시인, 철학자, 역사가, 측량기사, 기술자, 지리학자, 수로학자, 지질학자, 식물학자 등이 각종 풍물들을 탐구하기 위해 함께 떠났으며, 그들은 후에 추출된 표본들을 본국에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야말로 최고의 학생을 둔 셈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은 꿈만 꾸던 일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로 이룩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궁극적으로 창출해낸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강조했던 중용의 세계라 할 수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남겨놓은 유산은 헬레니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보편주의, 전 세계인의 결속, 인류의 협력 등의 개념을 역설한 알렉산드로스의 꿈”에서 기인한 것이다. 비록 그가 동방을 정복했지만 그는 정복지와의 진정한 통합을 추구했다. 이는 오늘날 보아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인 외에는 모두가 야만인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그는 훌쩍 뛰어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의 필자가 “인종과 피부색이라는 편협한 기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 대해 한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바울의 종교’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예수 사후 이 새로운 종교는 예루살렘에 근거를 둔 공동체와 그리스에 근거를 둔 바울의 공동체로 전개되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우두머리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였다. 바울의 공동체가 살아남고 기독교의 정통으로 자리 잡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필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유대의 멸망이라는 사건이다. “서기 66년 유대민족주의자들은 로마의 유대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4년 동안의 격렬한 전쟁이 있은 후 유대 국가는 멸망했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으며, 성전은 파괴되었다. 그와 같은 격변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교회는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이기는 하였지만 전부는 아니다. 하나의 종교가 살아남으려면 그것의 교리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예수는, 아주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유대교의 이단종파 중의 하나를 창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다종다양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사람들이고, 바울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예수의 직계제자가 아니다. 따라서 바울이 나서서 이런저런 말을 하면 곧바로 ‘직계’ 내지는 ‘정통’의 논쟁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의 입지가 강하지 않았던 것 역시 당연한 사실이었다. 또한 예수의 직계 제자들은 바울보다도 더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속 예배를 봤고, 유대교의 의식을 거행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정통 유대교와 불일치하는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았고, 민족 종교와의 분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고 간주한 것이 분명하다. ... 그[예수]는 조만간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돌아와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 당시에는 그것이 예루살렘 그리스도교도들의 ‘복음’이었다. 이 ‘복음’은 본질적으로 유대교 사상의 견지에서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대교 특유의 독특한 정신적 지위와 숙명을 강력히 천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분명 이런 것이었다. 그는 세계인의 구원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에서 해방시킬 전투적 메시아로서 온 것이었다.
유대교와 유대민족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특수성을 천명하는 종교이자 민족이다. 그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절대적 부정성’이다. 세계사의 모든 배타주의는 여기에 기원을 두며, 아주 자질구레한 차원의 집단주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이들을 연구하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을 말살하려던 나치즘의 정신적 기원 역시 역설적이게도 유대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이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당하기만 했던 것이 그들의 과거사를 구성한다면 현대의 이스라엘 역사는 그 배타주의가 보여주는 적극적인 타자 말살의 의지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면, 즉 유대주의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것은 보편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바로 여기에 바울의 의의가 성립하는 것이다. 바울이 전개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헬레니즘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온갖 종교와 신비주의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등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의 예수 대신, 인류의 신적인 구원자로서의 예수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인류가 동일한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전제한 것이었다.” 예수가 전개한 새로운 ‘말씀’이 유대교의 한 종파의 바탕을 형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종교의 근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보편화’라고 하는 철학적 사유를 제시한 바울의 공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배타주의를 극복한 보편화이기 때문에 그의 철학적 작업의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3.
지금까지 내가 쓴 것은 이 책 전체에서 두 주제만을 다룬 것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각자의 지식 정도와 사색의 깊이에 따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역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주 풍부한 역자 주석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호메로스 새로 읽는 법’에는 “세르비아인의 민족 신화가 된 1389년의 코소보 전투”라는 게 있고, 여기에 역자 주가 붙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세르비아의 코소보폴례(‘지빠귀들의 들판’이라는 뜻)에서 세르비아의 왕자 라자르의 군대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1360~1389 재위)의 투르크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1389. 6. 15). 무라드는 비잔티움과 슬라브 제국의 내부 불안을 이용해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점령지를 넓히려는 목적하에 세르비아를 침범했다. 코소보까지 진격한 그는 그곳에서 라자르의 군대와 맞붙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 세르비아 귀족 밀로슈 오빌리크(또는 코빌리크)가 투르크군 진영에 잠입해 무라드를 살해함으로써 전세는 세르비아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 그러나 무라드의 아들 바예지드는 술탄 사후의 혼란을 재빨리 수습하고 세르비아군을 포위해 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라자르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후 세르비아는 오스만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술탄의 군대에서 군역을 질 것을 약속해야만 했다.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코소보폴례의 장렬한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영웅적인’ 민족 신화가 됐다. 이런 의미에서 코소보는 ‘세르비아인의 추억의 심장이요, 핵심’이다. 그러나 현실의 코소보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알바니아계가 90%를 차지할 정도로 변모했다.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세르비아 자유의 무덤’이 됐으며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성지 코소보의 탈환을 촉구했다. 지난 1999년의 코소보 사태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정말 바보들이다. 600년 전의 사건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니... 하긴 광화문 한복판에 이순신의 동상을 세워둔 한국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24 Apr.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