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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끄] ‘이후’가 될 수 없는 일본 - 3·11 사태 발생 2년 [서경식]

작성자수원나그네|작성시간13.02.09|조회수4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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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가 될 수 없는 일본
- 3·11 사태 발생 2년
[53호] 2013년 02월 08일 (금) 17:39:39 서경식 info@ilemonde.com

   
<골페 핵발전소 #3, #1029>, 2006-드니 올리비에

'3·11'(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뒤이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칭)은 약 2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후쿠시마현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켜 십수만 명을 피난민으로 내몬 대재난이었다. 지진과 쓰나미(해일)는 천재(天災)이지만 원전사고는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그때부터 '포스트 3·11'(3·11 이후)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런 대사건을 경험한 뒤에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문명관이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재검토될 수밖에 없다. 사회 시스템상의 문제점이 철저히 까발리고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질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발상과 행동양식이 무비판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재생이 아니라 갱생,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의식이 널리 공유된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3·11은 '문명론'적 충격이었다. 지진과 쓰나미라는 대자연의 경이 앞에 더욱 겸허해지고, 이윤 추구나 대량 소비를 무조건 긍정하는 문명의 존재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일본 사회의 가치관과 개인 삶의 방식이 자연과의 투쟁보다는 공존, 소비보다는 분수에 맞은 질박한 생활양식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했다.

또한 '원자력 마피아'로 대표되는 정(政)·관(官)·재(財)·학(學), 그리고 미디어(언론)까지 포함한 일본 사회 도처에 편재하는 유착과 상호 의존, 무책임 구조로 이른바 '일본형 시스템'과 결연하게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과제를 던졌다. 그러나 사고 뒤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원전사고의 책임을 지지 않는 상태가 보여주듯 일본형 시스템과의 결별이라는 과제는 전혀 실현되지 못했다.

퇴행하는 일본, 일본인

3·11 이후의 갱생을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의 정치 구조를 바꿔야만 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원전 반대가 절반을 넘었고, 총리 관저 앞 시위에 무당파 시민 수만 명이 집결하는 등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움직임도 나타났으나,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치세력은 없었다. 그런 소리는 '제3세력'을 자칭하는 포퓰리스트 세력에 흡수되고 이용당했다. 그 결과 원전 유지와 재가동을 공언하는 우파 세력의 대두라는 최악의 형태로 귀착됐다.

저간에 유포된 언설 대부분은 도저히 3·11이라는 질문의 무게에 걸맞은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사건을 더 넓은 시야로 좀더 긴 역사적 맥락에서 상상하는 힘이 전반적으로 위축돼 있다. 3·11 때문에 위축된 게 아니라 오히려 대다수가 현실을 외면하고 예전 그대로의 위축된 상태에 안주한다는 것이다.

3·11 발생 뒤 약 2년. 일본 사회는 이 경험에서 배워 갱생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3·11 이전으로, 나아가 '그 이전'(1945년 이전)으로 회귀하는 쪽으로 급속히 전락하고 있다. 대재난을 거쳐 역사가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또다시 펼쳐지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16일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역사적인 대패를 하고 3년 전 퇴장한 자민·공명 연립정권이 부활했다. 민주당은 소비세 증세라는 마이너스 유산만 남기고 '정권 교체'에 기대를 건 국민을 배반한 채 무참하게 자멸했다. 제3세력을 자칭하는 우파 정당이 약진하고, 리버럴 세력과 진보 세력은 크게 퇴조했다. 이른바 제3세력은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지닌 우파 세력이며, 구보수 세력과 기득권 배분을 다투고 있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구세력과 야합할 것이다. 탈원전을 부르짖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그 간판을 간단하게 내리고, 낡은 행태의 전형인 우파 정치가 이시하라 신타로와 손잡고 '일본유신회'를 결성한 것이 그걸 말해준다. 하지만 일본 국민 상당수가 현실적 선택지가 없는 가운데 이런 움직임에 어떤 새로운 걸 기대하면서 현혹당하고 있다.

지난 1월 28일 <아사히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방위비 11년 만의 증액'이었다. 아베 신조 정권의 2013년 예산안에서는 방위비를 전년보다 400억 엔 증액할 것이라고 한다. 반면 생활보호비는 2013년부터 3년에 걸쳐 670억 엔 줄인다고 한다. 게다가 소비재 증세는 이미 정해진 대로 추진된다. 약자를 버리는 한편 군사력을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이번 정권 교체의 의미가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탄생 직후 아베 정권은 '경제 재생'을 위한 2% 인플레 목표를 설정하고 적자 국채를 발행해 경기 호황감을 연출하려 한다. 그 때문에 주가 상승과 엔화 약세가 진행돼 '아베 버블'로 들뜬 분위기가 사회를 뒤덮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비세를 올릴 수 있는 환경 만들기를 위한, 또 올여름의 참의원 선거 승리를 위한 위험한 도박이며, 조만간 그 청구서가 국민 부담으로 날아올 것이다. 물가와 세금은 오르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고, 사회보장비는 삭감된다. 그런 길을 국민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아베 정권이 참의원 선거 승리를 겨냥하면서 '안전 운전'을 계속하는 진짜 이유는 '헌법 개정'이 가능한 3분의 2 의석 이상을 중·참 양원에서 획득하기 위해서다. 아사히신문사와 도쿄대 대학원 다니구치연구실이 공동으로 실시한 당선자와 유권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당선 의원의 89%가 헌법 개정에 '찬성' 또는 '굳이 택한다면 찬성'한다고 대답했다(<아사히신문> 2013년 1월 28일). 즉 현재 일본에서 '개헌파'는 이미 소수파가 아니라 당파를 초월한 다수파라는 것이다. 패배한 민주당 내부에서도 개헌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헌법 개정이라지만 핵심은 물론 제9조 평화조항(교전권 포기)을 삭제 또는 수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실현되려면 중·참 양원 의원의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발의해서 국민투표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번 조사에서는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유권자가 딱 50%였다. 국회의원에 비하면 일반 유권자 쪽이 더 헌법 개정에 신중하다는 말인데, 그래도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빠듯하게 헌법 개정이 실현될 수 있는 수준이다. 1945년의 패전 결과 일본에 도입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는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벼랑에 선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

앞서 얘기한 공동 조사를 보면, 당선자의 50% 가까이가 원전 재가동에 찬성했다(유권자의 찬성률은 30% 정도). 이 문제에서도 의원들의 의식이 일반 유권자들 이상으로 원전 유지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베 정권은 원전 문제에서도 민주당 정권이 내걸은 '원전 제로' 지향 방침을 백지화하고 원전 재가동과 유지를 공공연히 꾀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의 경제 재생에 필요불가결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들의 본심(혼네)은 그보다 오히려 군사적 동기에 있다는 건 명백하다.

원전은 모습을 바꾼 핵무기다. 그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게 최근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속속들이 드러났다. 안전성이 전혀 없고 비용도 더 많이 드는데 원전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일본을 '일등국'으로 존속시키는 데 필요한 잠재적 군사력이기 때문이다. 사용 후 핵연료는 단순한 산업 폐기물이 아니라 핵무기 원재료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여·야 정치가들이나 일본유신회 공동대표인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극우 정치가들도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다.

거기서 다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전후(戰後·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평화주의가 진정한 평화주의인가, 평화주의와 전전(戰前) 사이에 있는 것은 단절인가 계속인가 하는 문제다. 잠재적 군사력으로서 핵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원전 유지의 이유라면, 이것은 잠재적 전쟁이라는 말이다. 일본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잠재적 전쟁을 해온 국가이며, 이젠 그 표면적 간판마저 벗어던지고 전쟁 상태를 현재화하려는 단계를 맞는 것이다.

탈원전이라는 과제를 왜 동아시아 차원으로 문제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유는 일본, 한(조선)반도, 중국이 포진한 극동아시아라는 조밀한 지역이 세계 유수의 원전 밀집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이 지역 어딘가에서 다시 3·11 같은 사고가 일어난다면 전 지역이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로 전 지구와 인근 지역이 입은 피해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돼 있고, 사죄의 뜻도 거의 표명하지 않았다. 정부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 국민이나 지식인에게도 가해의 책임 의식이 없다. 국가 논리를 당연시하고, 일본의 복구와 부흥을 말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 책임이나 식민지 지배 책임에 관한 의식 구조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동아시아란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단지 지리적 개념으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자나 유교 등의 문화적 동일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완전히 핵심을 비켜간 것이다. 동아시아란 근대에 일본이 침략한 지역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침략 전쟁이라는 가까운 과거의 각인이 깊게 박힌 지역인 것이다. 일본이 동아시아 멤버로 들어오려면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고 주변 민족과 화해해야 한다.

'동아시아' 개념의 본질

현상이 잠재적 전쟁 상태인 이상 탈원전운동은 본질적으로 반전평화운동의 일환으로 실행돼야 한다. 원전에 반대하는 일본인이 중국이나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국가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응용 문제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동아시아 차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답은 명확하다. 일본의 국가주의를 고무하면서 동아시아에서 탈원전을 실현할 수는 없다. 탈원전은 국가주의와 결코 공존할 수 없다.

하지만 3·11 이후 2년간 일본 사회에서는 오히려 국가주의적·배외주의적 주장이 급속히 대두하고 있다. 독도 문제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 북조선 로켓 발사 문제 등이 일본국민의 위기감과 국가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전통적 보수파의 흐름을 조장하는 정치가이지만 앞선 선배들과 현저한 차이는 '네트우익'(인터넷상에서 노골적으로 차별적·배외주의적 주장을 되풀이하는 우익 세력의 약칭)과 적극적으로 손잡으려는 유치함과 경박성에 있다. 그만큼 종래 정치가들보다 위험도가 높다. 지난해 말 총선 때 아베는 네트우익의 성지인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마지막 유세를 벌였다. 그의 선거 유세 차량을 많은 젊은이들이 에워싸고 히노마루(일장기) 깃발을 휘두르며 "일본 만세!" "조센징은 나가라!" 등을 연호했다. 차마 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잡한 모습은 공공방송에 보도되지 않았고, 유튜브(무료 동영상 공유 사이트)로만 떴다. 일본은 지금 이런 극우정치가들이 총리 자리를 차지하는 나라가 됐다. 이에 눈살을 찌푸리는 일본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흐름을 저지하기 위해 뭔가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1945년 패전은 일본이 갱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패전을 맞이하면서, 일본 근대 구도에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라는 구분이 성립하는 듯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이제부터는 전후다. 민주주의 시대다"라며 페이지를 넘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페이지를 실제로는 넘길 수 없었다. 그때까지 어떤 페이지였는지, 그 페이지가 어떻게 넘겨졌는지, 아니 넘길 수 없었는지 깊은 질문과 대면하지 못했다. 최대의 문제가 천황제였다. 히로시마 원폭이 떨어진 뒤 불타버린 폐허를 쇼와 '천황'이 행차했을 때 피해자들은 이 전쟁 최고책임자에게 등을 돌린 게 아니라 오히려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자신의 손으로 민주적 새 헌법을 기초할 수 없었던 일본 정부에 점령군이 초안을 제시했다. 물론 그 초안은 전후 미국의 패권을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주권재민, 전쟁포기, 남녀평등, 삼권분립 등 민주주의적 기본 이념이 명기됐다. 다만 조선 사람 등 구식민지 출신자들의 인권은 주도면밀하게 배제됐다. 헌법 제9조(전쟁포기 조항)는 침략 전쟁을 벌인 가해국 일본이 세계에 제시한 국제 공약이다. 헌법 제9조의 변경은 국제 공약을 파기하는 행위이며, 필연적으로 중국·한국·북조선 등 아시아 피해 국가 간의 심각한 대립으로 가는 길이다.

자민당 등 일본 보수파는 전후 일관되게 이 헌법이 전승국에 의해 '강요당한 헌법'이라며 자주헌법 제정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현재까지 구체화되지 않았다. 구체화를 억제해온 요인 가운데 하나는 일본 국민 다수의 염전(厭戰) 기분과 평화 지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일본 재무장(특히 핵무장)을 경계하는 미국의 통제,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피해 국가들의 반발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의 보수 정당은 정치적 리얼리스트(현실주의자)여서 속내는 어떠했든 그들의 주장을 구체화하는 데 신중했다. 그러나 3·11 이후는 이 구도가 바뀌어 억제 장치가 허물어지고 있다.

3년6개월 전의 정권 교체로 야당이 된 자민당은 야당의 홀가분함(즉, 무책임성) 덕에 여당 시절 이상으로 솔직하게 본심을 드러내게 됐다. 3·11이 일어난 지 약 1년 뒤인 지난해 4월, 그때는 아직 야당이던 자민당은 헌법 개정 초안을 책정했다.

올여름 참의원 선거가 분수령

헌법 제9조 2항을 삭제하고 '국방군'을 보유한다. 현재까지의 일본 정부가 헌법 해석상 금지해온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한다(즉, 미국에 대한 공격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반격한다). 전전의 헌법같이 천황을 '원수'로 삼는다. '기본적 인권' 대신에 국민은 '공익 및 공공질서에 반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 책무를 명기한다. 그 외 모든 내용을 열거할 수 없으나, 현 헌법과 가치관을 완전히 달리하는 내용으로 종래 자민당의 주장조차 훨씬 능가하는 국가주의적이고 복고적이었다.

이 초안대로 구체화될 날이 오리라 자민당 의원 중 몇 명이 상상했을까? 초안 기초자들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재야의 입장인 네트우익적 무책임성에 기인한 극단적 주장을 늘어놓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일본 국민 다수는 지금도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주장을 내세운 정당이 압도적 의석수를 지닌 여당이 된 것이다. 일본유신회 등 극우 세력은 '오른쪽'에서 압박을 가해 개헌을 밀어붙이려 한다. 올여름의 참의원 선거를 거쳐 그들이 중·참 양원에서 3분의 2 이상 의석을 차지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들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평화주의를 내팽개칠 것이고, 동아시아 평화는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다. 일본은 패전 뒤 일관되게 미-일 안보 체제 아래 잠재적 전쟁을 벌여왔다. 지금 그것이 현재화할 위기를 맞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과 독일의 과거사 극복에서의 커다란 차이점을 어느 일본인 교수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쨌든, 일본은 한 번밖에 지지 않았으니까요."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는 거대한 희생(타자에게 가한 피해는 그 몇 배나 된다)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독일은 충분하지 않지만 지금 정도로 과거를 극복하려는 자세를 보이게 됐다. 하지만 한 번밖에 패전하지 않은 일본은 아직 절박하지 않다는 취지였다.

이런 견해가 옳은지는 지금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향후 노력에 달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견해가 옳을 경우 당사자 일본인들은 물론 주변 민족들, 더욱이 재일조선인 같은 일본의 '내부 타자'는 상상을 절하는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바란다.

이 위기를 피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까. 물론 일본 국민의 각성에 기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점에서 낙관적이지 못하다. 일본 국민 다수는 1945년 패전의 경험조차 '기적의 부흥'이라는 자기애(自己愛) 이야기로 만들어버리고 타자에게 가한 피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기회를 몇 번이나 놓쳐버렸다. 겨우 2년밖에 지나지 않은 3·11의 경험조차 지금은 경시하고 망각하려 한다. 아베 새 총리는 얼마 전 취임 뒤 첫 소신 표명 연설에서 '원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 때문에 큰 비판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이번에야말로 스스로 각성할 것이라 기대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정도는 '심각한 사고'(Severe Accident)로 분류된다. 이 사고는 글자 그대로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어떤 것도 '이후'(포스트)가 될 수 없었던 일본의 근대, 바로 그 때문에라도 이번에는 어떻게든 이후가 돼야겠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

서경식 재일 작가·저술가. 일본 도쿄경제대 교수. 1951년 교토에서 태어나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한겨레>에서 '서경식의 일본통신'을 연재 중이다.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눈> <나의 서양음악 순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평화·인권운동가 서승, 서준식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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