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경춘선 대합실

신화론으로 본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작성자지담|작성시간08.01.29|조회수359 목록 댓글 2

 

이번에 소개할 글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멋진 영화 '반지의 제왕'을 통해

신화가 의미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그려보고, 이를 통해 우리들의 삶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

아마도 반지의 제왕만큼 웅장하고 감동적인 환타지 영화는 앞으로도 만나보기가 쉽지 않을 것 입니다. 

놀라운 테크놀로지와 상상력이 만든 이 영화 자체가 이미 신화적이라 말 할 수 있겠지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뭔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거나 다름 없습니다." 

   아래 글은 영화 평론가 심영섭의 멋진 글을 담아 왔습니다.

 

=====================

 

 

신화론으로 본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심영섭/ 영화평론가

 

 

 

"자신의 무의식과 대결하고 이에 대한 극복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 나아가는 영원불멸의 어떤 모험담"

 

 

 



선택된 자의 시련, 요나처럼, 오디세이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화신과 미녀와 야수 속편은 41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교통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갈파한 현대의 문명 속에 깃든 신화의 원류의 모습은 이런 식이다. 황색 잡지에 나오는 손수건을 쥐어짜는 인생유전의 드라마를 읽을 때처럼 그것은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문제이지만, 신화를 믿게 된다면 이윽고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넋놓고 바라보는 우리와 그 옛날 그리스의 언덕에서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을 두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뽑아야 했던 목동 파리스의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도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점은 <반지의 제왕>의 창조자 존 로널드 로웰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언어를 짓는 취미가 있었고 이외에도 각 나라의 신화와 민담을 채집한 뒤, 이윽고 신화가 언어처럼 거대한 한 뿌리의 심리적 원형에서 나와 가지를 치고 변종이 생기고 이야기라는 위장 전술 속에 숨어 사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중세 언어, 라틴어, 웨일즈어, 고대 영어를 녹여서 <반지의 제왕>과 실마릴리온의 엘프의 언어 속에 집어넣어, 시간과 싸워 이긴 영원불멸의 전사가 되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다. 그것을 보거나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영토와 새로운 지도, 새로운 습관과 새로운 신체를 지닌 피조물들이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각자의 역사를 전승하고 각자의 무늬와 각자의 자연과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거대한 우주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학자들이나 작가들이나 귀족이 아니라, 어느덧 반지의 시민이 되어버린 아주 평범한 독자들에 의해 서서히 완성되어 나아간 어떤 세계이기도 하다. 신화와 언어의 복원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려 했던 톨킨의 지난한 몸짓은 독자들과 연합하여 이윽고 <반지의 제왕>을 역사가 전설이 되고, 전설이 신화가 되는 거대한 우주의 문 앞까지 밀고 올라간 것이다. 이윽고 <반지의 제왕>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작은 고리, 새로운 신화의 제왕이 되었다.

 



성배 콤플렉스를 뒤집는 신화
톨킨이 뛰어난 이야기꾼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문헌학자인 톨킨의 취향대로 <반지의 제왕>의 플롯 중 일부는 유난히 눈에 익은 것이기도 하다. 우연히 손에 얻은 보물이 주인공들의 운명의 궤도를 이탈시킨 이야기는 현대의 복권 당첨자의 ‘그날 이후’에도 적용되는 무수한 변형을 지닌 신화의 한 종류이기는 하다. 바그너가 오페라로도 만든 ‘라인의 황금’은 전사이며 치료자인 발퀴레와 엘프의 유사성을 등에 엎고 가장 빈번히 <반지의 제왕>과 비교되는 단골손님. 파라오의 꿈을 해몽한 덕택에 반지를 얻고 출세하였으나 이로 인해 다시 파라오의 시기를 받는 요셉이나 존 스타인벡이 지은 <진주>에서 바닷속 깊이에서 따온 거대한 부를 약속하는 흑진주를 다시 심해의 밑바닥으로 돌려보내는 어부 키노의 손길에도 반지의 운명은 어려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반지의 절정은 그것을 버리는 행위에 있다. <반지의 제왕>이 놀라운 것은 서양의 성배 콤플렉스를 뒤엎는 반지라는 작은 물건에 녹아든 톨킨의 사회적·심리적 통찰력일 것이다. 성배와 달리 반지는 사악하기 짝이 없다. 반지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권력의 욕망과 그것을 이용하고 싶은 강력한 악의 유혹에 시달리게 만든다. 또한 깊은 동굴에 가만히 앉아서 주인을 기다리는 수동태의 성배와 달리 항시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는 반지의 태생 또한 훨씬 의인화되고 역동적인 애증의 관계를 소유주와 반복한다. 전사 보로미르는 처음도 끝도 없는 애물단지인 반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독백한다. “이 작은 것에 그토록 많은 두려움과 의심을 품어야 하다니….”

따라서 반지를 낄까 말까 고뇌하는 주인공들은 바로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일까 말까를 고뇌하는 존재론적 피조물이 되고, 동시에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톨킨의 강력한 주술에 사로잡힌 가엾은 넋들로 산화한다. 그래서 반지는 탐욕과 분노, 권력의 부패와 무소유의 현명함을 설파하는 장대한 서사시이며, 그래서 반지는 암흑의 무한동굴과 천상의 신전 사이를 오르락거리는 무한궤도의 시시포스의 노래이기도 하다. 피터 잭슨은 자신의 모국인 뉴질랜드의 원시 자연과 할리우드의 특수효과를 효과적으로 결합시켜 마침내 역사상 그 어떤 감독도 해내지 못한 장대한 시각적·심리적 원형을 관객에게 안겨주는 일대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영웅담, 모든 로맨스의 응축
그러나 반지의 상징이라면 진 쿠퍼가 지은 상징사전을 펼쳐놓고 반지가 속해 있는 ‘ㅂ’자를 찾으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여 이번엔 반지를 우리의 손에서 빼보자. 거기엔 사우론이라는 불타는 눈길뿐 아니라 지구상에 떠돌아다니는 모든 영웅담과 사랑이야기를 농축한 어떤 대서사의 원형이 몸을 숨기고 있다. 예를 들면 죽어가는 프로도를 안고 검은 기사의 무리에게 쫓기며 미친 듯이 질주하는 엘프 아웬의 모습에는 죽어가는 아들을 안고 말을 달리던 마왕의 전설이 겹쳐지고, 원정대의 결성과 내분은 원탁의 기사들에 버금가지 않는가? 혹 갈라드리엘의 유혹에 몸부림치는 전사들은 후세에는 사이렌의 유혹을 받는 오디세이의 전사들이 되었고, 영원히 혼자서 사느니 당신과 함께 죽음을 택하겠다며 엘프의 지위를 버리는 아웬은 ‘베를린 요정의 시’를 쓴 것은 아니던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지의 제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바로 서양의 오랜 영웅 신화일 것이다. 하루에 6번씩 먹고 버섯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60∼120cm 정도의 작은 몸집을 지닌 생물이 영웅이 된다는 것. 영웅은 그 생애를 ‘특별한 출생과 소명에의 거부’로 시작한다. 프로도는 헤라클레스나 예수가 그러하듯 조실부모하고 배긴스의 보호 아래서 자라난다. 그러나 막연히 호빗족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동경을 지니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겨하며 작은 몸집, 그래서 남들보다 한정된 시선을 지닌 호빗은 바로 직관과 상상이 없는 현실세계의 인간에 대한 어떤 비유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로 프로도는 이 현실의 세계인 자신의 고향 호빗을 떠나 온갖 장애가 도사리는 다른 미지의 영토를 여행해야 한다.


 

 


그러나 모험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대신 거대한 미궁을 지은 미노스 왕처럼, 부왕의 권유에도 한사코 결혼을 뿌리치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카마르 알차만 왕자처럼 프로도는 반지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반지를 갈라드리엘이나 간달프 같은 자신보다 더 커보이는 누구에게 맡기려 하고 ‘왜 반지가 하필 내게 왔지?’라고 끊임없이 한탄한다. 그러나 임무를 방기할수록 사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

다행스럽게도 영웅은 소명을 받아들이게 되면 더이상 혼자가 아니게 된다. 영웅에게는 길을 안내하는 까마귀나 자신을 보호하는 투명외투나 하다 못해 물을 대신 길어다주는 두꺼비라도 있게 마련이다. 프로도 역시 고향 호빗을 떠나게 되자, 자신의 길을 안내할 현자인 간달프의 도움을 받는다. 많은 경우 신화에서 초자연적인 조력자는 난쟁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거나 나룻배의 사공의 모습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 머큐리이고 이집트에서는 토트이며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이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반지의 원정대는 사실상 영웅의 출발과 시련을 다루었고, 이제부터 반지의 삼부작은 이 영웅이 다시 고향에 귀환하여 자신의 지혜를 세상에 나누어주기까지의 고된 여정과 모험이 펼쳐질 것이다.

그 와중에 프로도는 몇번이나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 들어가듯, 오디세이가 사이렌의 유혹에 이끌려 난파당하듯, 많은 유혹과 시련의 관문을 그리고 온갖 괴물을 상대하리라. 예를 들면 모도르의 땅굴 속에서 암흑과 화염에 휩싸인 발로그라는 괴물을 만나게 될 때, 간달프는 이 땅굴을 기억이 없는 곳이라고 하며, 그곳은 실제로 무덤이었다. 이 무의식의 동굴에서 오크와 발로그는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광기와 미혹과 의심과 같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의 결정체로 영웅을 습격한다. 프로도 역시 종국에는 모든 괴물 중의 괴물 그리고 모든 악의 으뜸인 사우론과 맞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웅은 마침내 이러한 도도한 어려움과 임무에 직면하여서 이제까지의 삶을 포기한다.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을 환골탈태하게 되는 것이다. 나비가 고치에서 날개를 뽑아올리듯 악마의 칼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던 프로도가 엘프 아웬의 도움으로 다시 부활하듯, 이윽고 프로도는 죽음을 거치며 가장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절대반지를 얻으면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프로도의 깨달음이야말로 이제 영웅이 비로소 영웅다운 면모를 갖추었음을 만방에 알리는 시작이기도 하다.


 


 

자아 완성의 여정
결국 <반지의 제왕>이 재현하는 영웅의 신화 속에는 인간이 무지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자신의 무의식과 대결하고 이에 대한 극복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 나아가는 영원불멸의 어떤 모험담이 숨어 있다. 톨킨은 많은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쉽게 부패하는가?’라는 대사 속에 반지에 대한 욕망 즉 절대 권력에 대한 추구는 인간을 불행의 나락으로 치닫게 하는 지름길임을 가르쳐준다. 반지의 주인이 되려는 자는 필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늪에 빠진다. 흥미롭게도 사우론은 단시 시선, 혹은 불타오르는 눈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무한대의 전지전능의 추구는 불가에서 이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세겹의 지옥 불과 동일한 메타포를 이룬다. 그러므로 악에 빠진 지혜란 광기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피터 잭슨은 현명하게도 <반지의 제왕>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랄지 <해리 포터>류의 교훈 만발한 재미난 동화라는 먹기 좋은 당의정을 덧씌우지 않는다.

오히려 사루만과 사우론의 극단의 광기는 피터 잭슨의 손에 의해 그대로 무한대의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는 카메라의 시각으로 팽창된다. 바로 이러한 시각적 아찔함이 톨킨의 문자가 줄 수 없는 롤러코스터적인 쾌락과 두려움을 함께 실어 반지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함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반지의 제왕>은 튼실한 상대성 원리에 의해 지어진 성이라고 보면 된다. 반지를 사이에 둔 빌보 배긴스와 간달프의 승강이처럼 조금 큰 사람과 조금 더 작은 사람의 세상, 9명의 기사와 9개의 반지라는 10을 채우지 못한 불완전함의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기를 벗어나게 될 때, 이윽고 <반지의 제왕>에는 무한히 솟아오르고 파헤쳐진 무시무시한 지하 동굴과 현기증나는 바벨탑이 입을 벌린다.

수직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는 사루만의 소굴과는 반대로 평야에서 험준한 산악지대로 나아가는 반지 원정대의 카메라는 헬리콥터의 시각에서 서서히 원을 돌 뿐이다. 아주 작고 미미한 인간의 왜소함과 그러나 그것이 합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나갈 때 보여주는 장대한 운명의 순환고리는 바로 장대한 원형을 그리는 카메라 증폭된 무한 반지의 반원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러니, 다시 한번 반지여 오라
그리하여 간달프는 “반지가 왜 하필 나에게 온 거죠?”라고 되묻는 프로도에게 “생과 사를 결정하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고 주어진 순간을 어떻게 살지 결정하라”는 충고를 남기고 터미네이터와 리플리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나락 무한의 불속으로 살신성인할 때, 어찌 보면 간달프의 충언은 반지는 단지 자아를 일깨우는 개인적 신화뿐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잇는 금언이 되어간다.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완성하던 1940∼50년대는 이차대전의 참혹한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다시 냉전이라는 국가간의 암투가 사람들의 목을 죄어가던 시기였다. 그는 무자비한 파시즘의 시대를 거쳐 다가올 폭력의 시대를 예견하고 그에 관한 개인적·사회적 금언을 반지의 표면 위에 새겨논 셈이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자기인식이란 지혜로 가는 왕도이고 가녀린 생명의 힘들을 합치는 것보다 더 큰 승리를 이끌 힘은 없다는 것. 영웅 프로도의 입을 통해 나온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하여 반지에 영롱하게 반사되어 새로운 판타지의 사회학이 된다.

그러니 다시 한번 반지여 오라. 이 모든 정신적인 것이 풍화되어가는 시대에 기꺼이 다시 한번 나의 밑바닥을 사우론의 광기와 간달프의 현명함과 프로도의 소명의식으로 채워다오. 반지의 봉인을 뜯는 것은 영화 안에 자신의 소우주를 창조하는 2000년대의 <스타워즈>를 몸소 영접하는 것, 반지의 원정대의 모험은 테러의 위협이 우리 모두의 밑바닥을 좀먹는 시대에도 계속 전진한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kss1966@unitel.net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진형석 | 작성시간 08.02.01 나도 항상 작은..,나름대로의 모험에 도전하고 실행에 옮기지만,영웅의 길은 까마득~~.그래서 대리만족으로 영화를 보나....^^
  • 작성자지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2.01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 또한 모험의 연속이지요. 우리의 삶의 소소한 부분들을 모험이라 여기지 않고, 그저 안락함에만 자신의 눈을 감아버린다면 삶은 시들해지기 쉽고, 권태와 우울로 마음은 황폐해지는 법입니다. 작은 일에도 열정을 가지고 어떤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이러한 삶이 영웅적인 삶인 것 같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