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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대합실

영원으로의 여행-사진으로 보는 고대 이집트 유적지와 미이라 이야기

작성자지담|작성시간08.03.13|조회수1,760 목록 댓글 4

  

 

그러니 그대는 이승에서 행복해지게, 망각을 그대의 축복으로 삼아서.

생전에 그대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게! 그대의 머리에 몰약을 바르게!

멋진 아마포로 온몸을  두르게! 신성한 의식의 진정한 경이로 자신을 축성하게! 

근심 걱정 말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행복해지게!

지상의 많은 것을 차지하게! 비탄의 날이 그대를 찾아오리니 절대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게나!

마음이 아픈자는그의 비탄을  듣지 못하나니, 애도는 죽은 사람을 무덤의 구덩이에서 구제할 수 없네.

그러니 매일 즐겁게 지내고, 걱정 말라! 보라, 죽을 때 자기 것을 가지고 가는 자가 있는가?

보라, 명계로 들어간 사람이 되돌아온 적이 있는가?

 

-"하프 연주자의 노래"에서

 

 

미이라 - 영원으로의 여행
    지은이: 프랑수아즈 뒤낭 지음/이종인 옮김
    작성자: 김기영 사진:  Joanot  


    

 

 

 

 
기자는 이집트 북부 나일강 서안(西岸)에 위치한 도시. 

서쪽 근교에는 3대피라미드로 알려진 기자유적지가 있어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집트를 여행한 옛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 5세기의 저술에서 이 낯선 사람들은 "모든  풍습이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썼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반면, 이집트 사람들은 시체에  생명의 모습을 주려고 애썼다.

이러한 저작들 덕분에, 이집트는 늘 미라의 땅으로 기억되어 왔다.

 


      제 1장 미라의 부활
  미라는 15세기에 나일강 유역을 탐험했던 최초의 유럽인들이 발견한 많은 경이 중 하나였
다.
    여행자들이 조상, 부적, 그리고 시체가 든 관 등을 기념품으로 가지고 귀국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1605년 뒤카스텔이라는 프랑스인이 카이로에서 미라  한 구와 두 개의  석관을 사들였다.
수십 년 뒤 프랑스 시인 장 드라퐁텐은 예술애호가이며 부호인 니콜라 푸케의 집에서 그 미
라와 석관을 보고 이렇게 썼다. "케프렌 왕과 케오프스 왕비의 관 (혹은 무덤)이 이상한  나
라에서 이곳으로 황급히 운반되어 왔다. 상당한 노력과 경비가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
기에 언급된 왕과 왕비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화가 루벤스도 미라를 한 구 가지고 있었
는데 많은 데생의 모델로 썼다고 한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무미야'로 알려진 파우더 바른 미라가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져  약
국의 선반에 등장하게 되었다. 미라의 매매는 많은 이익을 보장해 주는 사업이 되었고 그래
서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가짜 무미야까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한편,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여 고대 이집트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이집트학을
정립시켰다.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대군을 결성하여 이집트를 침공했다. 군사작전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원정대에  여러 부문의 전문가를 대동해  가겠다는 그의 생각은
멋진 결실을 맺었다. 이들 전문가는 이집트의 기념물, 동물, 식물 등에 대한 현지 자료를 수
집하여 1809년과 1822년 사이에 <<이집트지>>하는 책을 펴냈다.
  1822년 파리에 있는 문학학술원의 종신서기인 앙드레 다시에에게 보낸 9월 27일자 편지에
서, 젊은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그는 나폴레옹의 원정에 따라가지  않았다-은 자신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했다고 선언했다. 샹폴리옹이 감행한  언어학적 돌파는 15세기 동
안 긴 침묵 속에 있던 파라오의 땅을 깨운다.

 

 

Menkaure's Pyramid (멘카우레의 피라밋)

카이로 서남쪽 교외의 기자지구에 있는 피라미드로 기자지구의 3개 피라미드 중 가장 작은 것이다.

고대 이집트 4번째 왕조인 파라오 멘카우레 Menkaure의 무덤으로 축성되었다.


   

 

 

 

  이집트학의 열풍에 휩싸인 유럽
  고대 이집트에서 영감을 받은 모티브가  유럽의 장식예술, 건축, 내부장식 등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공공 기관이나 개인의 소장품은 이집트 공예품의 수집으로 더욱 풍성해지게 되
었다. 이런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고대 유적에 대한 약탈이 더욱 심해졌고 미라와
석관은 정기적으로 유럽에 수송되었다. 그러나 모두 무사히 수송된 것은 아니다. 가령 제  4
왕조 파라오인 미케리누스의 석관은 영국으로 수송 도중 지중해에 수장되고 말았다. 방대한
이집트 고대 유물이 개인 수장가들의 기증으로 여러 박물관에 집결되었다. 한편, 미라의  해
외반출은 미미한 정도에 그쳤지만, 이집트에 남아있던  것들은 도굴군들의 노략질에서 무사
하지 못했다. 고대의 선조들이 하찮게  여겼던 보석과 부적만을 안중에  두었던 도굴꾼들은
미라를 분해해 버리거나 심할 경우 아예 박살을 내버렸다. 동물의 시체 또한 약탈의 대상이
되었는데, 19세기 동안 영국 한  나라가 비료를 제조할 목적으로 수입해  간 고양이 미라가
수백 톤에 달할 정도였다.
  당초에 미라는 호기심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과학적 관심의 대
상이 되었다. 19세기에는 미라의 붕대를 해체하는 공식 집회도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유일한 관심사는 귀중품 수거에 있었다. 미라에 대해 간략한  보고서가 작성되는 경우도 있
었지만, 이것도 단지 그런 모임에 과학적 신뢰성을 주려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유명한 사람들의 시체를 직접  보고 만지면서... 나는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이집트 고대유물관리국 국장으로 일했던 

 가스통 마스페로는 이렇게  썼다. "이름없는 왕 한 둘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랍인들은 왕들의 시체가 가득 들어 있는 커다란 방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명한 왕들이었다!"

데이르엘바하리의 한 동굴 속에서 마스페로는 신왕국(B.C. 1550~1085년)의 가장 유명한

파라오 아모시스  1세, 투트모시스 1, 2, 3세, 아메노피스 1세,  람세스 2, 3세, 그리고 세티 

1세 등의 미라를 발견했다.
게다가 그들의 왕비-네페르타리, 아호테프 등-와 수많은  왕자와 왕녀, 주요 대신들의 미라
도 함께 발견했다. 이런 놀라운 발굴은 현지 경찰의 수사와 환상적인 보물찾기의 결합이 낳
은 결과였다. 이 역사적 발굴이 있기 이미 10년 전부터 고대 유뮬 시장에 왕의 부장품이 자
꾸만 흘러 나와 현지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마스페로는 룩소스로 내려가 조사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왕들의 계곡 근처인 구르나 마을에  사는 압델라술 삼형제를 용의자로
지목하게 되었다. 그 형제 중 한명이 마침내 도굴 부장품을 밀매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
리고 1881년 7월 5일, 동굴의 위치를 밝혔다. 그곳은 암벽에서 60cm 위로 올라간 곳의 갈라
진 틈새 안에 있었다.

 


 

. 기자유적지는 높이 40m, 넓이 130a의 암반대지(岩盤臺地) 위에 위치하며, 넓은 와디에 의해서 2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북서부에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카프레왕·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와 왕비·왕자들을 위해서 설치된 소형 피라미드, 장제전(葬祭殿)이나 신전(神殿) 등의 건조물군(群)과 이 성지(聖地)에 관계가 있는 승려·고급관료들의 마스타바·고왕조 후기의 소분묘 등이 있다.

 


  마스페로와 동료 고고학자들은 그 유명한  파라오의 미라들을 평범한 미라들처럼  처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데이르엘바하리 동굴에 있는  모든 유물을 카이로 근처에
있는 불라크 박물관으로 통째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스페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
다. "증기선은 유물을 싣고 불라크로 출발했다. 그때 나일강의 양쪽 강둑에서 머리를 풀어헤
친 농촌 여자들이 울부짖으며  배를 따라왔고, 남자들은 마치  장례식에서처럼 총을 쏘아댔
다." 유물을 싣고 카이로에 도착한 고고학자들은 건어물로 분류된 미라들에 대해 관세를 지
불해야 했다.

 
    1898년 고고학자 빅토르 로레가  나일강 서쪽 둑, 왕들의  계곡에서 아메노피스 왕릉을
발견했다. 파라오는 아직도 관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은 왕의 미라가 고스란히 보존된 채로 발굴된 최초의  왕릉이었다. 파라오의 미라 옆
에는 파라오만이 잡아당길 수 잇는 활이 부장되어 있었다. 그 왕릉에서는 신왕국의 다른 여
덟 파라오의 미라도 함께 발견되었다.  다른 미라는 카이로로 옮겨졌으나  아메노피스(재위,
B.C. 1421~1401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그는 짧은 안식을 누렸을 뿐이다. 왕
릉에 보물이 들어 있다는 소문에 쫙 퍼지자 무장 보초가 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도굴꾼들
이 몰려와 약탈을 자행했고 파라오의 미라는 조각나 버렸다. 그 뒤 사건을 조사해 본  결과,
보초들도 그 약탈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왕릉과 매장지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는 점점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되어갔다. 20세기
초 사카라에 있는 왕들의 계곡, 아비도스, 누비아 등의 대규모 매장지와 이보다는 덜 중요한
매장지가 모두 발굴되었다. 이러한 발굴로 많은 유물과 인간 및 동물의 시체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역시 20세기 초에 해골에 대한 최초의 인류학적 연구가  행해졌다. 1896년부터 미라에 사
용되기 시작한 엑스레이는 1930년대까지는 이렇다 할 결과는 내놓지  못했다. 또 왕이나 다
른 중요 인물이 아닌 미라들은 열성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는데,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국의 젊은 예술가이며 이집트 학자인 하워드 카터는 여러 해동안 왕들의 계곡을 탐사
했다. 그는 거기에 아직 비밀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1922년 11월 26일, 카터는  18왕조 말의 이름없는 파라오인  투탄카멘의 완벽하게 보존된
왕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고학자가 부장품이 그대로 쌓여있는  왕릉을 발견한 것은 이
번이 처음이었다. 대단히 고급인 부장품들을 현실에서 모두  운반해 내는데에만 6년이 걸렸
다. 정치적 동요가 심했던 시기에 단기간 통치한 젊은 왕에게  그 정도의 부장품을 함께 묻
은 것을 보면, 람세스 2세 같은 강력한 왕의 부장품은 어느 정도였겠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Great Sphinx of Giza - Egypt

 

 

 


    천일야화에 맞먹는 멋진 여행
  1939년 3월 17일, 타니스 지역에서 10년 가까이 탐사작업을 벌이던 프랑스의 고고학자 피
에르 몽테가 22왕조의 파라오인 셰스홍크(<<성서>>에 나오는 시샤크)의  무덤을 발견했다.
나일 삼각주 동쪽 광대한 지역인 타니스는 신왕국 말년의  중심 도시였다. 셰스홍크의 현실
은 아문 신전의 경내에 있었다.
  다른 파라오의   석관과 부장품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특히 프수세네스(21왕조,  B.C.
1085~945년)의 것이 주목할 만하다. 타니스에서의  발굴작업은 투탄카멘의 왕릉의 발굴작업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세간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타니스 왕릉들은 이제까지 발견된 것중 가장 나중에 발견된  것이다. 약 300여 명의 왕이
고대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약 25개의 현실과 30여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더욱
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왕의 미라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비록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발굴사항들도 이집트 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이집트 고대유물관리국과 해외 각국 고고학회의 지원 아래 다른 매장지에 대한  발굴작업
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아주 오래된 무덤과 후대의 무덤이  있는 것을 알려진 거대한 유
적지(약 154제곱미터에 이르는 지역)사카라에서, 최근  신왕국시대의 고관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굴되었다. 비교적 관심이 덜 쏠리는 지역들이지만, 테베 지역(여왕들의 계곡), 서부
사막의 오아시스 지역(두치, 발라트, 무자와가), 중부 이집트(안티노에), 파이윰, 나일 삼각주
등에서도 발굴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미라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지 발굴현장에서는 식물학자, 고고학자, 방사선학자 등으로 구성된 여러  연구팀이
정열적인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와 같은 학제적, 종합적 연구는 체계적인 인구집단  연
구를 가능케 했다.
 
  미라 제작은 B.C. 3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라 처리  기술이 완성된 것은 B.C.
1000년 전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시체에 살아 있는  모습을 부여하는 복잡한 기술을
터득하는 데에는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Els Colossos de Memnon, Egypt

 

 


      제 2장 미라 제작 기술
  B.C. 3100년 이전인 선왕조새대,  그러니까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가 통일되기 어전
시대에는 죽은 자를 사막에 구덩이를 파고 매장했다. 모래는  수분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모
래 속에 묻힌 시체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곤 했다. 그러나 죽은 자를 더  잘 보관하고 싶은
욕망과 기술의 진보가 결합하여, 1왕조시대(B.C. 3100년에 시작됨)에는 더욱  정교한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로운 풍속이 발생한 배경에는 시체를 그대로 보존하려는 목적만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왕이나 고관이 사망한 경우에는 엄격한 절차에  따른 장례의식이 치러지기 시
작했다. 중요한 왕릉에는 제물을 바칠 봉헌실이 필요했고, 부장품을 넣어 둘 현실도  있어야
했다. 마스터바라고 불리는 이런 양식을  갖춘 무덤에서는 시체를 수직갱도의  맨 밑바닥에
놓았다. 이보다 간단한 양식을 보이는 무덤의 경우에는 나무관이나 버들가지관에 안치한 시
체를 외벽을 두른 무덤에 매장했다. 그런데 어느 경우이든 모래의 사체 보존 효과가 차단되
므로, 시체를 더 잘 보존하려고 쏟아 부었던 노력이 오히려 시체를 더 빨리 썩게 하는 결과
를 낳았다. 이제 다른 방안이 모색되어야 했다.

 

 

  
    첫 번째 실험
  공기에 의한 부식을 막기 위해 시체를 천으로 친친 감는 방법이 제기되엇다. 천에 송진을
먹이는 것-그렇게 해서 시체를 뻣뻣하게 만들어 원상태를 오래 보존하려는 것이다-은 보존
효과를 높였다.
  3왕조 말(B.C. 2575년경)에 방부처리사들은 시체의 내장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들어낸 내장을 담아 두는 돌 항아리인 카노픽 항아리의  존재를 통해 확인되었다. 방부처리
사는 소다석-인체나 동물의 표피조직에 저절로 생기는 탄산나트륨과 염화나트륨의 결합체-
이 놀라운 탈수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4왕조의 첫 번째 왕이며 케오프스의
아버지인 스네푸르의 아내 헤테페레스는 네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설화석고 상자 속에서 소
다석에 코팅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왕국(3~6왕조)의 미라들을 보면 소다석의 탈수효과가 별로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붕대로 시체를 감는 과정은 점점 더 정교해져서 산 자의 일상복을 흉내내
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수의 위에 죽은 자의 얼굴을 그려 넣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붕
대 위에 회반죽을 덧입혀 시체의 윤곽과 곡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기술은 곧
사용하지 않게 된다.)
    소다석을 써서 탈수를 하고 내장을 들어내는 방법은 곧 널리 쓰이게 되엇다
  시체를 건조하게 만들고 내장을 들어내는 것은 중왕국(B.C.  2040~1786) 때 널리 퍼진 것
같고 그 결과 보존효과는 한결 개선되었고, 이 시기에 제작된 수많은 미라들은 파손되지 않
고 현재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멘투호테프 3세(11왕조)  시대의 고관이었던 '와'의 미라
는 엄청난 양의 붕대로  친친 감싸여 있는데, 그  넓이를 모두 합치면 376제곱미터쯤  된다. 
그러나 값싸게 방부처리를 해야 할 경우에는 천 대신  모래를 썼다. 데이르엘바하리에서 발
견된 멘투호테프 병졸들의 미라는 모두 이 방법으로 처리되었다.
  '이피'라는 사람에게 사용된 방부 도구와 재료는,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으
로, 이것 역시 이 시대의 것이다. 방부처리 과정에서 얻어진 부산물은  모두 시체 옆에 함께
두었는데, 그것들 모두를 사자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C. 1550년 18왕조와 함께 신왕국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방부기술이 개발되었으며, 이 시
기의 미라도 보존이 무척 양호한 상태로 여러 구 발굴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미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은 주로 왕의  미라를 연구해 얻은 것인데, 왕의  미라는 연구과정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

 


   

카르나크 신전 -이집트 키나주에 있는 신전유적지. 가로 1.5㎞, 세로 0.8㎞의 직사각형으로 룩소르 북쪽 4㎞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 BC 2000년 무렵 제12왕조의 2대 왕 센우스레트1세부터 BC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 이르는 역대 왕이 신전·탑문·조각상을 세웠다. 중앙에 아몬신의 신전군(神殿群)이 있고, 입궐로에는 40마리의 스핑크스가 늘어서 있으며 제1탑문은 나비 113m, 안길이 15m이다. 그 뒤에 유적 가운데 제일 유명한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가 세운 대열주(大列柱)홀이 있다. 가로 102m, 세로 53m의 직사각형인 이 홀은 134개의 대열주가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중앙부에 있는 열주 12개는 높이가 23m, 둘레는 10.6m에 이른다. 아몬신전군의 북쪽에는 몬투신의 신전군이, 남쪽에는 무트신의 신전군이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을 이용한 방부처리
  약 2,400년 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을 소재로
<<역사>>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 전쟁의  아주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잇는 이 책은 저자가
여행중에 얻어들은 이야기를 간간이 끼워 넣고 있는데, 거기에  미라 처리 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현대의 전문가들은 이  자료의 정확성을 확인했다.) B.C. 1세
기 중반에 활동한 그리스의 여행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글에서도 비슷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초상이 나고 2~3일이 지나면  시체는 방부처리사에게 건네진다. 방부처리사는  즉시 왼쪽
갈비뼈 밑에 구멍을 내고 내장을 모두 들어냈다. 간, 위,  창자, 마지막으로 폐를 꺼낸다. 당
시에는 심장을 의식과 느낌이 이루어지는 곳(오늘날의 뇌에  해당)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육
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꺼내지  않았다. 콩팥, 비장, 방광, 여성의 생식기관  등은
일반적으로 무시되어 특별한 처리를 행하지 않았다.
  뇌수를 꺼내는 것은 신왕국에 와서 개발된 기술이었다. 방부처리사는 왼쪽 콧구멍에 청동
꼬챙이를 쑤셔 넣어 사골(코뿌리에 놓여 코와 두개골을 분리하는 뼈)를 부수고는 그 구멍을
통해 뇌수를 꺼냈다. 그런 다음 송진을 두개골 속에다 집어 넣는데,  송진(정확한 성분은 현
재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음)은 두개골과 접촉하는 순간 굳어진다. 이때 송진 대신 톱밥이나
천을 쓰기도 했다.
  그런 다음 시체를 봉합하고 깨끗이 씻어서 소다석을  발라 탈수시킨다. '소다석 목욕'이라
는 용어를 감안하면 소다석을 액체상태로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실은 고체상태
로 투여했다. 헤로도토스는 이런 방부처리 과정에서 70일이 소요되었다고 전하는데, 이 정도
의 기일이라면 미라화가 이루어지는 전과정을 포함할 것이다. 그런 다음 시체를 나일강물에
다 씻고 각종 연고로 닦아 내어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좋은 냄새'가 나게 했고, 마지막으
로는 시체를 사자 모양의 장례침대에 올려놓고 옷을 입혔다.
    "땅에서 난 식물, 아마포, 회복제가 온다. 이것들은  귀중한 수의의 형태로 그대에게 오
는 것이다. 붕대의 형태로 그대를 보존한다. 아마포의 형태로 그대의 신체가 더 커지게 하는
것이다"(방부처리 의식)
 

 
 

 

 

 붕대처리 과정은 성스러운 책에 규정된 엄격한 의식대로 집행되었고, 단계별로 입회 사제
가 의식용 주문을 외웠다.
  붕대처리 과정은 우선 손가락을 하나하나 묶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고는 사지를 묶었
고, 다시 더 큰 수의로 전체를 묶었다. 양팔은 옆구리에 가지런히 붙이거나 아니면 가슴  위
에 X자(오시리스 자세)로 놓았다. 머리는 맨 나중에 묶었다.
  붕대는 가끔 송진을 발랐고 붕대의 겹겹마다 부적을 집어 넣었다. 투탄카멘의 미라에서는
143개의 부적과 다른 작은 물건들이 나왔고, 그리스-로마 시대(B.C. 332~A.D.395년)의  서민
미라에서도 40여 개의 부적이 나올 정도였다.
  이제 완벽하게 보호조치가 된 시체는 입관을 하여 장례식을 준비중인 유가족에게 보낸다.
  <<사자의 서>>에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축복을 받으시라, 아버지 신 오시리스여! 나는
영원히 내 육체를 소유하게 되었나이다. 나는 썩지 않을  것이며, 붕괴하지 않을 것이며, 벌
레의 밥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존재하며 살아 있으며 강합니다. 나는 깨어 있으며  그
리고 평화스럽습니다. 내 신체기관이나 눈은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머리는 내  목위에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 내 육체는  영원합니다. 그것은 썩지 않을지니, 이 영원의  땅에서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값이 저렴한 방부처리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중간 방법'을 채택했다"
  앞에서 설명한 방부처리 과정에는 비용이 무척 많이 들었다.  헤로도토스는 더 빠르게 그
리고 덜 비싼 비용으로 방부처리할 수 있는 다른 두  가지 방법에 있었다고 알려준다. 첫째
방법은 항문을 통해 기름을  투입하여 내장을 용해시킨 다음,  시체를 소다석으로 코팅하는
방법이다. 둘째 방법은 가장 싸구려 방법으로, 시체를 간단히 씻은 다음 소다석을 이용해 탈
수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방법으로 방부처리된 미라들은, 정밀검사 결과, 부패의 여러 단계
에서 내장 찌꺼기가 남아 있음이 밝혀졌다.
  붕대를 감는 기술도 여러 가지였다. 어떤 경우에는 손가락을  일일이 싸는 과정을 생략했
고, 또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천을 조잡한 종류로 대체하거나 재생 아마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일류 방부처리의 경우에는 특별히 제작된 고급 아마포를 썼다.
    21왕조(B.C. 1085~945)에 외관을 좋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얼굴과 몸의 윤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피부 밑에 흙, 톱밥, 천조각을 넣기도 했다. 유리,
나무, 아마포 등으로 만든 인공눈을 안구에다 집어 넣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장식적 시도
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어떤 미라는 장식이 과도하여 흉한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
다.

 

Gilded Mummy Mask with Glass Inlays Egypt Roman Period late first century BCE

금장의 미이라 마스크- 기원전 1세기경 이집트 로만시대

 

    

시체를 미라 처리하는 풍속은 B.C. 1000년 이후 널리 보급되었다. 이렇게 되자 방부처리

기술이 점점 더 단순화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집트를 정복하고(B.C. 332년) 이어 로마

사람들이 정복한 이후(B.C. 30년 이후)에도 미라 처리는 여전히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

고 당시 이집트에 살고 있던 많은 외국인들도 이 풍속을 그대로 따랐으며, 어떤 미라는 정

말 놀라운 솜씨를 자랑한다. 그러나 후대에 제작된 미라들의 보존상태는 일반적으로 형편없

었는데, 아마도 비용문제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미라는 미라라기보다 종려나무

가지로 이어 붙인 팔다리 뼈를 모아 담은 가방에 불과했으며, 팔다리 뼈가 아예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일부 미라는 세세한 사항을 꼼꼼히 신경 써서 만든데다, 기하학적

디자인과 회반죽 장식을 쓴 붕대처리를 통해 대단히 정교한 수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에는 방부처리 과정보다 붕대처리 과정에 더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

다. 또한 그리스-로마 시대에 들어와서는 붕대 위에 시체의 초상을 직접 그리기보다 나무판

에 초상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이 나무판은 붕대 안섶에 끼워 넣었다.

 


   

 

 기독교인 미라
  3세기와 4세기에 들어서자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지만, 기독교  교리도 이집트인의
미라 처리 풍속을 막지는 못했다. 교회에서 시체의 미라  처리를 금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오히려 시체의 보존은 사후의 부활을 믿는 기독
교적 신앙과도 양립될 수 있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기독교인 미라들에 대한 연구는, 몇 가지 사소한 차이점 이외에 이때
의 미라 처리 기법이 전통적 미라 처리 기법과 특별히  다를게 없었음을 밝혀 냈다. 사소한
차이점이란 죽은 자를 붕대로 감는 대신 그가 입던 일상복을  입힌 것, 또는 의식용 복장을
입힌 것 정도였다.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오시리스신화

그리스 저술가 플루타르코스에 의해 자세히 전승되었는데,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결혼을 하고 이집트를 28년 동안 통치했다. 그러나 오시리스는 동생 세트에게 살해되어 그 시체를 넣은 관이 나일강에 던져졌다. 삼각주를 지나 지중해에 들어간 관은 시리아해안 비블로스에 이르렀는데 무화과나무가 이 관을 둘러싸고 크게 자랐다. 이 나무가 비블로스왕 궁전을 세운 기둥으로 되어 있었으나 비탄에 잠긴 이시스가 이 관을 찾아다니다가 비블로스까지 와서 이 사실을 알고 그 관을 찾아갔다. 세트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다시 오시리스의 유체(遺體)를 토막내어 온 나라에 뿌렸기 때문에 이시스는 다시 돌아다니며 동강난 유체를 모아 원래의 모습으로 맞추었다. 그리고 오시리스를 소생시키기 위한 의식을 거행했으나, 이미 오시리스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후세계에서 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시스가 남편 오시리스의 유체에 의해 낳은 호루스가 세트와 싸워 결국에는 세트를 무찌르고 상하이집트 왕이 되었다.

 

 

 

 

     성소
  최초의 미라들은 공동묘지 근처의 텐트나 가건물에서 처리되었다. 이 시설에는 내장을 꺼
내는 방부처리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B.C. 700년 이후 점점 더 많은 미라의 방부 처리
가 필요해지면서 이들 가건물은 벽돌로 지은 영구 건물로 바뀌었고, 어떤 건물은 큰 규모를
자랑했다. 고대 이집트인은 방부처리소를 와브트(성소) 혹은 페르 네페르(아름다운 집)라 불
렀다. 이런 이름은 방부처리의 목적이 죽은 자를 정화하고  신성화하려는 데 있음을 알려준
다. 당시 사람들은 미라 처리를 해주면 죽은 자가 명계의  신인 오시리스가 될 것이라고 믿
었다.
  방부처리사는 철저한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되었다. 가장 중요한 지위는 비의 주관자(또는
신의 인장 보관자)와 독경 사제였다. 그들은 방부처리 과정 중 종교의식을 관장했다. 비의주
관자는 종종 미라 처리의 신인 아누비스를 상징하는 재칼의  가면을 썼다. 독경사제는 정확
한 집전을 위해 성스러운 책들을 참고하면서 필요한 주문을 외웠고 각 단계별 기술책임자를
감독했다.
  시체의 일부를 잘라 내기 위해 줄을 긋는 일은 서기관이라는 사제가 맡았다. 그러면 파라
시스트(잘라 내는 사람)가 내장을 꺼내기 위해  부싯돌이나 흑요석(수입해 온 화산석) 칼로
몸에 구멍을 뚫었다. 타리체우테스(방부처리사)의 임무는 소다석을 사용하여 시체를 탈수시
키는 것이었다. 다른 기술자들은 미라의 수송과 매장을 맡았다. 장례식과 그뒤의 봉헌의식은
지정된 사제들이 집전했다.
  방부처리소의 각종 기술자들은 조합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직위는 팔거나 후손, 제
삼자에게 세습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특정 마을이나 읍의 일정 인구에 대하여 독점적인 영
업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공동묘지는 이들의 세력권에 따라 구분되었으며, 때로는 시체처
리에 대한 관할권을 둘러싸고 시비가 붙기도 했다.
  성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유가족들에게 물건으로 보수를 받았으나, B.C. 700년 이후에는
돈도 받았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
동체 내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일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마을 외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대는 '라'와 같이 되어  영원을 향해 일어서서 헤엄쳐  가리라."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동물  할 것
없이 영원한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라 처리라는 준비단계를 마쳐야 했다.

 

 

 아부 심벨-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301∼BC 1235)가 건축한 신전 유적지. 아스완댐의 상류 약 280㎞ 지점인 나일강 기슭에 있다. 신전은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바위 속에 구축한 암굴신전인데 기자(Giza)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큰 건조물이다. 대신전의 정면은 높이 33m, 너비 38m, 안길이 63m에 달한다. 정면에는 4체(四體)의 왕의 의좌상(椅坐像)이 있는데, 그 높이는 모두 20m이다. 중앙에 태양신 라 호라크티의 상이 안치되어 있고, 상부에는 태양을 예배하는 동물 개코원숭이 무리를 새겼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너비 16.7m, 안길이 18m의 제1실이 있는데, 이곳에는 높이 10m인 오시리스 신을 본뜬 람세스상이 8체 있고, 벽면을 모두 덮는 그림과 문자들은 왕의 카데슈싸움의 경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카데슈는 시리아 땅이며, 람세스 2세 군대와 히타이트군의 결전장이었는데, 기록에는 이집트군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이집트학자 J. 브레스테드가 <아르신전은 역사의 보고(寶庫)이다>라고 한 것은 이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 3장 불멸을 향한 갈증
  고대 이집트인은 모든 생물이 물질적 구조,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육체에  영혼
혹은 인성에 해당하는 '바'와, 생명력에 해당하는 '카'등  빗물질적인 요소가 부가되어 있다
고 믿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이들 요소의 분리를 의미했다.
    "그대의 다리는 영원의 거처로 안내하고, 그대의  손은 무한히 지속되는 장소로 인도해
주리니"
  두 번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육체는 육체에 생기를 준 정신적 요소와 재결합해야 한
다. 이것은 육신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야만 재결합이 가능함을 말하며, 미라 처리 과
정에서 사제들이 외우는 마법의 주문은 사자에게 그의 육신이 잘 보존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깨워 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육체는 절대로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육체가
훼손되면, 죽음 때문에 흩어진 정신과  다시 재결합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부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공포 때문에 고왕국시대부터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에 망자의 유물-조상이나
'예비 머리'등-을 안치하는 습속이  시작되었다. 예비 머리는  파괴되었거나 파손된 신체를
대치하는 마법적 기능을 수행했다.

 

  장례식이나 장례기념물에 엄청난 정성을 들인 이집트의 습속으로 미루어  볼 때, 고대 이
집트인이 이승에서의 삶을 대단치 않게 여겼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
에게 인생은 가장 귀중한 선물이었다. 신왕국시대의 명문은 이렇게 전한다.  "그대의 행복이
내세보다 훨씬 귀중하나니." 죽음은 한 생활에서 다른  생활로 옮겨가는 것이요, 또한 '영원
히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라고  생각되었다. 고왕국시대의 대다수  사람
들은 죽음 뒤의 삶을 모호한  모습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만은  그 모호함 속에서
도 특별한 운명을 향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별의 신화는, 평소 신으로 숭상되어 왔던 왕은
사후에 '고정된' 별이 되어  신들과 함께 산다고  전해  준다. 한편, 태양의 신화에  따르면 
왕은 '하늘의 바다'위를 떠오르는 태양을 따라다니면서 날마다 되살아난다고 믿어졌다. 반면
에 일반 서민들은(비록 특별한 정보가 전해져 내려로는 것은 없지만), 죽음 뒤에도 지상에서
의 삶과 똑같은 삶이  연장될 것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무정부상태에 빠진   혼란스런 제1
중간기(B.C. 2181~2040) 동안, 각 지방의 총독들은  자기들이 왕과 동격이라고 주장했고, 매
우 강성해진 이들 통치계급은 사후의 영원한 거처문제에서 왕과  동일한  특권을 요구했다.
이제 당초 왕의 전유물이던 미라 처리와 종교적 절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비도스에 있는 오시리스의 주  무덤 곁에 묻히기를  원했는데,  이곳은 1왕조의
왕들이 자신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워 놓은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 매장될 기회를 얻지 못
한 자들은 무덤 주위에 커다란 돌기둥이라도 세워 오시리스의 보호를 보장받고자 했다.
    "나는 완벽하고 나는 정당하도다. 나는 또한 회춘했느니라. 왜냐하면 나는 영원의 신 오
시리스,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신왕국시대에 더욱 구체화되었다. 죽은 자의 세계인 명계는 제왕
이며 생명력의 화신인 오시리스가 다스리는 지하왕국이다.  오시리스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
했기 때문에 망자의 신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가장  널리 전파된 신화는 오시리스를 1
왕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집트를 다스린 제왕이었다고 묘사한다. 그는 동생인 세트에게 살해
되어 내장이 모두 제거되었으나,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의 힘을 빌려 환생했다.  이
시스와 오시리스 사이에는 호루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호루스가 세트를 무찌르고 이집트
의 왕위에 올랐고 오시리스는 지하로  내려가 명계를 통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었다가
부활한 오시리스의 운명은 인간이 죽음 뒤에 걸어가야 할  운명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하여
미라 처리 과정을 통해 보존된 시체는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고, 죽은 자는 오시리스가 되
는 것이다.
  무덤에 넣기 직전, 미라 처리되어 관 속에 안치된 시체는 무덤의 입구에 세워지고, 개구의
식을 통해 '생명의 호흡'이 주어진다.  이러한 상징적 절차에 따라  부활한 미라에게 갖가지
음식이 봉헌되고 그런 다음  미라는 무덤으로  들어간다.  무덤은 이제 그가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거처할 장소'이다.
  매장과 함께 시작되는 제2의 인생은 신왕국의 화가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명계의 문지기인 아누비스는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그를 오시리스의 재
판정으로 데려간다. 이 장면에서 오시리스는 아주 근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죽은 사람은 두 번 '부정의 고백'을 행해야 한다.  신과 인간에 대하여 특정한 혹은 일
반적인 죄를 진 것이 없다고 주장한 다음, 특히 다음과 같은 사항을 선언해야 한다.
  "나는 저울의 무게를 보태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우유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심장의 무게 달기 의식을 치러야 한다. 저울 한쪽에 올려놓은 심장은 깃털(진리와
정의의 여신인 마아트의 상징)처럼 가벼워야 한다. 만약 심장이 너무 무거우면-바꾸어 말해
서 죽은 사람의 악행이 선행보다 많으면-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던 사람 잡아먹는 여신 아
미트가 죽은 자를 씹어 영원한 제2의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 기록의 신인 토트는 오시리스
와 다른 신들이 지켜보는 데서 그 재판의 결과를 기록한다. 

 

 

 


    죽은 사람은 이제 관문을 통과하여 자유롭게 지하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
  죽은 자의 명계 여행길을 안내해 주기 위해 <<사자의 서>>하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관
속 미라 곁이나 오시리스 조상의 받침대로 쓰이는  상자속에 넣어 둔다. <<사자의 서>>는
사후세계의 여러 장면을 보여 주는 그림을 담고 있다.  그림들은 사후세계가 이상하고 무서
운 존재들이 득실대는 곳임을 알려 준다. 이 책에는 죽은  사람이 여행중에 만날 장애를 극
복하는 방법과 축복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법을 알려 주는 마법의 주문이 들어 있
다. 이책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라는 사후세계에서 계속되는 생존을 보장받았다. 신
학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다른 장례용 서적-<<관문의 서>><<동굴의 서>><<두아트(명계)
의 서>>등-이 왕의 무덤에 장식용으로 놓였다.
  신왕국시대에 처음 나온 <<사자의 서>>는 고대의 전승을 집대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중
왕국시대 석관의 외벽에 새긴 명문에서부터,  5왕조(약 B.C. 2494~2345년) 이후  피라미드의
현실 벽에 쓰인 명문가지 모든 명문이 총망라되어  있다. 당초 왕들에게만 사용되었던  '피
라미드 비문'은 점차 내용이 일부 수정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쓰였다.  <<사자의 서>>에는
많은 판본이 있어 파피루스 한 장으로는 그 많은 시를 다 적을 수 없었다.

   

Page from the Book of the Dead of Hunefer

이집트 사자의 서


 

 


    동물의 미라
  고대 이집트 무덤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미라도 들어 있다. 21왕조시대에 활약한
테베 여사제의 무덤에서는 긴팔원숭이 미라가 발견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무덤에서도 개, 고
양이, 새 따위의 미라가 발견된다. 이들  애완용 동물들은 아마도 그 주인이 사후에도  함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넣어 주었을 것이다. 어떤 동물은 관까지 갖고 있다. 아메노피스  3세
의 맏아들인 투트모시스 왕자가 좋아했던 고양이는 석회석 석관에 넣어져 매장되었는데  석
관 바깥에는 '심판의 과정을 통과한 고양이 오시리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고대 이집트
인은 동물을 미라 처리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 동물과 인간을 엄
격하게 구분하지 않았고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신은 인간의 모습뿐 아니라 동물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동물숭배는 이집트 문명이 견지한 지속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신들은 역사발전의 단계
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만 그 본질적 속성은 변함이 없다. 이리하여 고대 이
집트에서 왕권의 상징이던 호루스 매는 그냥 새 모습으로 표상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새
의 머리를 한 인간으로 표상되기도 했다. 멤피스에 있는  아피스 황소, 멘데스의 숫양, 엘레
판티네의 숫양 등은 고대 이집트 문명 내내 그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되었던 이들 동물은 미라 처리를 통해 영원의 거처로 들어가게 되
어 있었다. 이들은 그만큼 독특한 존재였다. 가죽에 있는 독특한 표시로 금방 알아볼 수  있
는 아피스 황소는 딱 하나뿐이다. 이 황소는 경배자들이  경배를 올리는 예배소와 추종자들
이 알현하러 몰려오는 신성한 사당이 갖추어진 신전에서 살았다. 이 황소는 죽었을 때 당연
히 미라 처리되었고, 그 장례식은 인간의 장례식과 흡사하게 치러졌다. 황소의 시체는  거대
한 화강암 석관에 넣어져 독립된 무덤에 안치되었고, 후에 거대한 집단 현실인 사카라에 있
는 유명한 세라페움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세라페움 근처에는 아피스의 어머니, 신성한 암소
에게 헌정된 공동묘지가 있다. 헬리오폴리스의 므네비스 황소,  아르만트의 부치스 황소, 멘
데스의 숫양, 엘레판티네의 숫양 등도 살아 있는 신으로 여겨져 생시에 커다란 숭앙을 받았
고 죽어서는 장엄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파이윰과 콤 옴보에서는 악어신 소베크가 숭상되었
고 소베크 신전에는 많은 신성한 악어들이 살았다. 그리고 그중 한 악어는 신의 화신이라고
간주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테베와 파이윰의 주민들이 악어를  길들여 먹이를 주고 돌본다는
이야기를 그의 책에서 들려준다. 악어는 귀걸이를 하고 앞다리에 팔찌를 차고 또 신성한 음
식을 제공받았다. 4세기 뒤에 스트라본은 이렇게 기술했다. "신성한 악어는 호수에  혼자 살
면서 음식을 제공받았다. 사제들은 악어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알고 있었고 그를 수코스(소
베크)라 불렀다."
    특정한 신을 상징하는 동물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바스테트신을 표상했고 따
오기와 원숭이는 토트신을 나타냈다
  공동묘지에서 발견되는 수십만개의 따오기와 고양이 미라는 사후세계로 떠나는  순례자가
신들에게 바치기 위해 돈을 주고 사서 미라 처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바스티스에 있는
바스테트 여신 사당과 헤르모폴리스에 있는 토트신의 사당은 희생용으로 성스러운 따오기와
고양이를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B.C. 1000년 전에 널리 퍼졌던 풍습이었다. 다른 동
물들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두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거세된 성인 남자 미라의 다리 사이에서는 개구리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한 신화는 세트에게 죽음을 당한 오시리스의 내장이 몽땅 들어내졌으며, 오시리
스의 성기는 나일강에 던져져 물고기의 먹이가 되어 버렸다고  전한다. 두치에서 발견된 남
자 미라는 이 신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재생의 상징인  개구리는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세계 신앙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저승에서의 삶을 이승의 삶과 같이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어 주었다. 그중에는 값이 상당한 귀중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도굴꾼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도굴은 이집트 도처에서  자행되었고 소박한 무덤이라해도 도
굴꾼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Medinet Habu (Ancient Egyptian: Tjamet or Djamet Coptic: Djeme or Djemi)는

이집트 룩소르 반대편 나일강의 West Bank 에 있는

Theban Hills 의 발치에 위치하고 있어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람세스3세의 신전과 관련된 유물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제 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장례기념물과 부장품이 너무나 화려하여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재산의 많은 부분을  유택
을 짓는 데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왕릉은 그 좋은 예이다. 왕들의 계
곡에 있는 피라미드와 현실의 건축에는 막대한 노동력과 경비가 들어갔음을 짐작할 수있다.
또한 케프렌의 밸리 신전이나  람세스 2,3세의 라메세움과 메디네트  하부 같은 장례신전을
건조하는 데에도 역시 엄청난 비용이 투입되었다. 일반 서민들의  무덤 축조에 들어간 돈도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
    무덤의 건축양식은 수세기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무덤의  기본적인 유형은 손에 꼽
을 정도이다
  무덤의 건축양식은 지리적 조건과 무덤 주인의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평범한 무덤
의 구조는 시대의 변화에 상관없이 언제나 똑같았지만, 한층 복잡한 구조를 갖춘 무덤은 몇
가지 점에서 진화를 거쳤다. 마스터바-무덤의 수직갱도 위로 낮은  직사각형 건물을 세우는
것-는 고왕국과 중왕국에 주로 건립되었고, 석벽을 깎아 내는 무덤은  고왕국 말에 처음 등
장했다. 피라미드 모양의 지상구조를  가진 무덤-가장 정교한 것은  고왕국시대의 것으로서
케오프스, 케프렌, 미케리누스 등의 피라미드를 들 수 있다-은 신왕국시대에 들어서서도 개
인 무덤으로 지어졌으나 여전히 소규모였다. 누비아 상류의 메로에에서도 같은 양식이 채택
되었다. 최후로 등장한 양식은 예배소가 추가된 무덤인데 신왕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다.
    무덤은 죽은 자의 새로운 거처요, 마법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다른 방식의 존재가  계속
되는 곳이다
  죽은 자가 이승에서 누렸던 쾌락을 즐길 수 있도록 일상생활의 환경을 여러 방식으로 무
덤 속에 전시해 주어야 했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죽은 자가 음식이 가득 차려진 테이블  앞
에 앉아 있는 그림, 사냥하는 장면, 농사짓는 장면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그림들에
등장하는 소재는 죽은 자가 경험한 특정한 추억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이승의 생활을  그에
게 상기시켜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같은 이유로 죽은 사람은 늘 젊고 원기왕성한 상태로 묘사되어  있다. 이 경향은 특히 파
라오의 경우에 현저한데, 이것은 파라오들이 아직 젊고 정력적인 시절, 그러니까 등극  직후
부터 무덤의 축조 작업을 실시했던 까닭이다. 중왕국시대의 일반 서민들의 무덤에서도 이승
에서의 일상생활을 일깨워 주는 물건들이나 '영혼의 집'이라 할 작은 집이 빈번히 발견된다.
이런 것들을 보면 죽은 자들이 정말로  사후에도 계속 '생활'했구나 하는  느낌을 지워  버
릴 수 없다.
    "제물이 봉헌되었고, 빵, 맥주, 고기, 가금, 향등도 바쳤다"
  음식을 봉헌하는 것은 죽은 자에게 먹을 것을 바쳐 사후에도 살아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
에서였다. 일상생활의 유용한 물품들-화장품, 옷, 천, 도자기, 돌그릇, 무기 등-도 죽은 자에
게 바쳐졌다. 예를 들어 투탄카멘 왕릉에는 무기가, 아메노피스 2세의 경우에는 활이 놓여져
있었으며, 직업에 관련된 도구들, 필기도구, 의학 관련  파피루스, 베틀의 북과 물레, 심지어
장난감 등도 부장되었다.
  이런 도구들은 죽은 자가 살아 있을  적에 즐겨 사용하던 물건들이지만 순전히  장식용인
물건도 있었다. 투탄카멘의 황금 전차는 파라오가 살아 있을 때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다.

 

 


    무덤은 또한 다양한 의례물을 보관했다
  무덤에는 카노픽 항아리와 우샤브티스 같은 물품이 들어 있었는데, 이러한 물품은 중왕국
시대 이후 널리 부장되었다. 신왕국시대에 들어와서는 400여  가지에 이르는 작은 인물상들
을 관 주위에 놓아두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1년을 365일로 잡아 하루에 한 개꼴로 인물상
이 필요했고 그 나머지는 '감독하는 사람'인  것이다.) 죽은 자의 하인인 우샤브티스는 주인
이 사후세계에서 오시리스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왕국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징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체의 여자 인물상
이 남자와 여자의 무덤에 함께 넣어졌다. '죽은 자의  첩'이라고 알려진 이런 인물상은 사자
가 사후세계에서도 원만한 성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미라는 각종 보호 용기 속에 안치되었다. 그 용기가  얼마나 정교한가는 사자의 재산상
태에 따라 다르다
  가장 바깥에 있는 용기는 석관-왕이나 고관의  경우-이거나, 또는 대부분 목관이었다. 석
관의 형태는 직사각형이거나 인체의 윤곽을 따랐다. 석관이나 목관의 장식은 수세기에 걸쳐
많이 바뀌었으며, 주로 의식적 주문, 신화적 장면, 개인적 사항(죽은 자의 이름, 지위,  직업)
등을 새겨 넣었다.
  석관은 원래 그 안에 인체의 윤곽을 한 목관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22왕조(B.C. 945
년경)에 들어와 이 두 번째 목관은 아마포나 파피루스를 회반죽이나 풀로 굳힌 관재로 대체
되었다. 이 관재는 황금 장식으로  찬란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관재에서는  시신의
윤곽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얼굴 부분은 가발을 씌워서 고도의 표현을 기했다. 하지만
이런 표현도 정형화되어 있었다. 파라오와 부유한  개인의 미라는 제3의 관을 갖고  있었다.
파라오는 또한 견고한 황금 가면도 갖고 있었다. (프수세네스와 투탄카멘의 황금 가면이 오
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수의와 붕대가 친친 감긴 미라가 나온다.
  오로지 부유한 자만이 목관과 관재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생
략한 채 수의와 붕대에 묶여 매장되었다. (그리고  아주 가난한 사람은 미라 처리조차 하지
않았다.) 후대에 내려오면 황금 가면은 도금 혹은 채색 회반죽 가면으로  바뀌었고, 또 그리
스-로마 시대부터는 나무에 왁스로  그린 초상화를 얼굴 부분의  붕대 안섶에다 끼워 넣는
풍습이 정착되었다. 이러한 초상화는 파이윰 지방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파이윰 초상
화라고 한다.
  이제 미라는 사후의 세계를 시작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무덤-'앞으로 100만 년 동안의 거
처'-에 들어갈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은 자는 관문을 하나  더 통과해야 되었다.
그것은 이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공격성과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왕들의 계곡:   상(上)이집트 룩소르지방의 서안에 있는 신왕국시대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계곡. 동쪽 계곡과 서쪽 계곡으로 나뉘며 62개 무덤이 여기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25개가 왕의 무덤이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것은 1922년 발견된 투탕카멘왕의 무덤이다. 이 계곡에 처음으로 왕의 무덤을 만든 것은 제18왕조 3대째 왕 투트모세 1세이다. 그는 장제전(葬祭殿), 무덤을 별도의 장소에 만들고, 무덤을 지하 암반 속에 설치하는 새로운 설계를 하였는데, 이것은 호화롭고 웅장한 무덤은 아무리 견고해도 도굴자의 손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뒤 제19왕조와 제20왕조의 왕이 이것을 모방했는데, 왕 외에 왕자·왕족도 경우에 따라 여기에 묻혔다. 크기는 다양하며, 입구에서 널방[玄室(현실)]까지 100m를 넘는 대형으로는 105m의 호렘헤브 무덤과 110m의 세티 1세 무덤이 있다. 널방에 도달할 때까지 방·함정·통로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벽면은 종교적인 문자와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도굴은 이미 제20왕조 때부터 시작되어, 그 재판기록도 남아 있다. 왕가는 어떤 때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왕의 미라를 한데 모아 은밀한 장소에 다시 매장하기도 했다. 도굴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19세기에 고고학자가 무덤에 들어갔을때, 무덤은 이미 도굴당한 뒤였다. 거의 피해가 없었던 것은 투탕카멘왕의 무덤뿐이었다.

 

 

 

 


    미라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나?
  무덤의 약탈은 아주 오래 전부터 널리 퍼진 악습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이런 도굴
꾼들을 물리치기 위해 점점 더 세련된 무덤 축조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무덤 축조가와
도굴꾼 사이의 소리 없는 경쟁이 1왕조에서 시작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피라미드에 멋지 부장품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피라미드를 노략질한다는  것
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경비를 서는 보초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 했다. 1중간
기 동안 중앙의 왕권이 약화되고 그에 따라 사회가 불안해지자, 피라미드는 더 이상 도굴꾼
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경비병과 내통을  했더라도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라미드 내부의 여러 장치, 예를 들어 내리닫이 창살문, 가짜
복도, 숨겨진 입구 등은 돌더미로 막혀 있어서 돌파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모든 피라미드는 도굴되었다. 그리하여 고고학자들이 현실에 도착했을  때 그 안은 거
의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신왕국에 들어와 종교와 보안을 이유로 파라오들은 자신의 왕릉을  건설할 때, 피라미드-
그건 너무 쉽게 눈에 띄었다-방식을 버리고 보다 안전한 지하묘식을 선택했다. 왕들의 계곡
이나 왕비들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석회석 벼랑에  거대한 무덤을 몰래 파 들어갔던  것이
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랬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를 교묘하게 위장했다. 그래도 도굴을 막
을 수는 없었다. 바깥에는 보초가 있고 내부는 방어장치-깊은  수직갱도, 막다를 통로, 엄청
나게 무거워 거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화강암 석관 등-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하묘
실도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도굴당했다. 노략질의 증거는 람세스 9세(재위, B.C. 1131~1112
년) 치세시에 약탈꾼을 치죄한 문서에 잘 드러나  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도굴꾼의 진
술서에는 고위직과 내통한 사실도 암시되어 있다. 또 공동묘지를 관할하는 경비대장도 연루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수많은 무덤이 도굴되었다. 왕들의 계곡에 있는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무덤도 약
탈당했다. 그리하여 B.C. 1070~945년  사이에 아문의 고위 사제는  18, 19, 20왕조의 파라오
미라를 모두 파내어 비밀스런 동굴에다 감추어 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 미라가 옮겨진
위치는 19세기 말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튼 도굴된 미라들은 죄다 귀중품을 박탈당했고
다시 붕대처리를 한 후 재매장되었다.
  두치에 있는 그리스-로마 무덤에서는 19세기에 작성된 편지(당나귀에게 건초를  주어야겠
다는 내용)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부주의한 도굴꾼이 현장에 흘리고 간 것이었다. 어떤 때는
도굴꾼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무덤의  천장이 무너져 결국 도굴꾼의 해골이  미라들의
저승 친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하트셰프수트 사원

하트셰프수트 (Hatshepsut ):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5대 여왕(BC 1503∼1482). 건축·신앙·무역의 여왕이기도 하다. 투트모세 1세의 딸이자 상속녀로 이복오빠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 BC 1512년 함께 왕위에 올랐다. BC 1504년 남편이 죽자 하렘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의붓아들 투트모세 3세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하였으며 BC 1503년 왕으로 자칭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약 21년 동안 국정을 운영하면서 행정개혁·무역확대 등을 강조하여 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푼트(소말리아)에 대상선대(大商船隊)를 파견하여 흑단(黑檀)·동물가죽·비비(拂拂)·몰약(沒藥) 등 신전용품들을 수입하였으며 그녀의 가장 독창적인 건축인 테라스식 데이르엘바리신전을 장식할 나무도 들여왔다. 아시아·누비아·리비아 등에서 공물(貢物)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그녀는 힉소스(전아시아왕)가 이집트를 통치할 때 파괴된 곳을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카르나크(테베)신전에 있는 그녀 아버지의 홀을 개수하고 높이 30m 정도의 거대한 오벨리스크(方尖塔) 4개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녀의 뛰어난 업적으로는 테베 서쪽 데이르엘바리에 웅장한 신전을 세운 것인데,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에는 그녀의 통치기간에 있던 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개인의 무덤도 약탈되다.
  도굴꾼들은 값나가는 부장품들이 많이 매장된 왕릉만을 골랐을 것이고, 그러니 일반 서민
의 무덤은 약탈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
지 않다. 람세스 9세 왕릉 도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무덤들도 모조리 도굴되
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고대 이집트인이, 사후세계에서 죽은 자들이 생존하
는 데 사용할 물건을 그처럼 노략질했다는 것이 기이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보
면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당시 사람들은 너무 가난했던 것이다.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 나가
기가 벅찬 사람들에게 돈이 되는 물건이 지하에 잔뜩 쌓여 있다는 사실은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한 때에는 그런  유혹을 떨치기가 더욱 어려
웠으리라. 그래서 약탈자는 전문적인 도굴꾼이라기보다 공동묘지  근처에 사는 장인이나 농
부인 경우가 허다했다. 무덤의 노략질은 20세기까지 계속되어 고대 유물들이 꾸준히 암시장
으로 흘러들었고, 수많은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 파괴되고 말았다.


    고대 무덤은 다시 사용되었다
  무덤을 재사용하는 것은 널리 퍼진 풍속이었다. 특히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했다. 미라들이
잔뜩 쌓인 가족용 무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여왕들의 무덤도 이런 불명
예를 당했다. 이럴 경우 원래의 미라가 손상됨은 물론이다.
  파라오 자신들도 석관, 장례물품, 무덤까지 '재활용'하는  선례를 남겼다. 타니스에서 발굴
된, 사람의 얼굴을 한 사자의 몸에는 서도 다른 세 왕을 위한 명문이 적혀 있고, 프수세네스
1세(21왕조)는 원래 19세기 왕조의 고관 미라를 담았던 석관에 넣어져 매장되었다.
  붕대와 덮개를 제거당한 미라는 보석류를 탈취당했으며, 종종 '100만 년의 거처'로부터 쫓
겨나는 모욕도 겪었다. 그렇게 거처를  옮긴 미라들이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집트학이 정립되면서 미라는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거나 제약원료 정도로 취급되던 미라가 현대 과학의 집중  탐구대상이 된 것이다. 도굴꾼의
손에서 미라를 구출해 낸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 귀중한 인
간 자료를 분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심형을 기울이고 있다.

 

  

 

The Mortuary Temple of Queen Hatshepsut

이집트 "왕들의 계곡" 근처 나일강의 서쪽 제방에 있는 Deir el Bahari 절벽 밑에 위치한 헤트셉수트 여왕의  영안 사원이다. 건축가 Senemut에 의해 설계되어 태양신 아몬-라에 봉헌되었으며 파라오 Mentuhotep의 영안 사원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제 5장 과학적 연구
  19세기만 해도 미라의 붕대를 푸는 일은 선택된 몇몇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는 특별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행사에 모인 사람들이란 과학적 탐구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는 단순히 미라를 구경한다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1881년에 발생한
대단한 사건은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 놓았다. 데이르엘바하리에서 왕들의 미라 저장소로 쓰
인 동둑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 남은  이 미라들은 어떠한 수단을 동
원해서라도 온전히 보존돼야 했다. 따라서  새로운 조사방법의 도입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런 절차 없이 또한 너무나도 성급하게 붕대를 풀어내는 작업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이 미라들은 처음에는  카이로 교외의 불라크에  보관되었다가 1902년에는 새로
지어진 카이로 박물관으로 이송되었다.
  이때부터 붕대를 풀어내는 과정에는 완벽한 검시과정이  첨가되었고, 이 과정으로부터 미
라 처리 과정에 대한 정보가 하나 둘 수집되기 시작했다.  또한 미라가 생존 당시에 앓았던
각종 질병이나 사고의 흔적을 찾아낼 수도 있게 되었다.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
라트 뢴트겐은 엑스레이를 발견했고, 같은 해 11월 8일  자기 아내의 손을 엑스레이로 찍었
다(노출 시간 30분). 영국의 위대한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은 이집트학에
엑스레이를 동원하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1896년에 처음으로
미라를 엑스레이로 촬영했다.
    마침내 이집트학 연구자들은 미라를 손상시키지 않고 검사를 수행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엑스레이 촬영숙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엑스레이 촬영 장비와 그 기술 수준은 미라의 팔다리를 찍는 정도에 불과
했다. 1912년,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가 카이로에 보관된 왕들의 미라에 대한 방대한  보고
서를 출판했을 때, 엑스레이 촬영 정보는 전체 내용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엑스레이를
이용하려면 관련 요소를 한자리에  집결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고고학자, 방사선학자,
장비, 미라를 모두 한곳으로 모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트모시스 4세의 미라는  택시에
태워져 카이로에서 최초로 방사선과를 설치한 병원까지 이송되어야 했으며, 이런 점이 엑스
레이의 미라 연구 응용에 따르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엑스레이 기술이 발달하면서 방사선학에 대한 관심은 점차 커졌다. 1913년, 과학자들은 미
라에서 발견된 요골-좌골 이상을  처음 보고했다. (오늘날에도 널리  발견되는 이런 유형의
아상은 좌골통과 요통을 일으킨다.) 1931년 로이 L. 무디는 17구의 미라에 대한 방사선 정보
를 기록했다. 그리고 P. H. K. 그레이는 1967년까지 유럽 여러 박물관, 특히  영국과 네델란
드에 보관된 총 133구의 미라를 엑스레이로 촬영했다.
    제임스 해리스와 켄 윅스는 카이로 박물관에서 왕들의 미라를 조심스럽게 연구했다
  1973년과 1980년에 발간된 이들 학자의 연구결과는 미라에서 발견되는 질병과 육체적  특
징을 확인해 주었고, 이로써 가계를 확정짓고 또 고대 문헌의 기록을 고증할 수 있었다.  예
를 들어 B.C. 16세기의 파라오 세케넨레 2세는 전장에서 장렬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왔는
데, 이 사실은 그의 미라 중 두개골 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점과 또 두개골에 가해진
심한 충격을 엑스레이가 확인해 줌으로써 검증되었다.
  엑스레이 연구는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투트모시스(재위,
B.C. 1504~1492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미라의 골격을 조사해 보니 긴  뼈 끝에 연골이 달
려 있음이 밝혀졌다. 이것은 그 뼈의  주인이 죽을 무렵까지도 계속 성장했음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사망 당시 18세 정도였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 파라오의 오랜 통치기간
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또 하나 의심스러운 점은 그 미라의 양손이 생식기를 가리고 있다
는 사실이다. 그런데 투트모시스의 후예 중 이런 자세로 미라 처리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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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2,500 year old mummy resides at the Academy of Natural Sciences in Phila., PA


    오늘날 미라 연구에는 다양한 기술이 사용된다
  방사선 이외에도 조직학, 피와 조직 그룹의 연구, 내시경 검사, 다양한 화학,  물리적 정밀
검사법이 동원된다. 최근에는 컴퓨터 단층촬영(CT) 같은 의학적 촬영방법도 이용된다. 그러
나 수소원자에 반응하며 작동하는  고성능 장비인 핵자기 공명  단층촬영(MRI)은 사용되지
못한다. 인체에서 물분자 형태로만 나타나는 수소는 건조한 미라에서는  발견될 수 없기 때
문이다.
  방사성탄소측정법도 흥미있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이 방법도 인체조직의 정확한 연대를 측
정하기에는 부정확한 측면이 있다. 아미노산 연구 등 기타 방법도 미라 연구에 일정한 도움
을 줄 수 있다. 아미노산 연구가 방사성탄소측정법보다 유리한 점은 아주 작은 조직에도 적
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 조직이 어느 온도에서 보존되었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단점이 있다.
  최근에는 전세계적으로 여러 팀들이 귀중한 연구를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아이단 콕번이
이끄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연구팀은 PUM(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 I~IV라고 명명된 이
름없는 미라 네 구를 완벽하게 검사했다.  첫 세 구에 대한 연구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나,
네 번째 미라 PUM IV는 여러 가지 정보, 그중에서도 인간의 피부조직에 대한 값진 정보를
제공했다. 1976년, 리오넬 발루와 콜레트 루베가 이끄는 프랑스팀은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복
원하고 정밀연구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로잘리  데이비드가 이끄는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 팀은 신왕국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르는 17구의 미라를 연구했다.
  한편, 인류학자들은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다수의 유골을 대상으로 연구를 계속했으며,  그
들은 박물관에 소장된 미라를 연구하는 데에는 피할수 없는 약점이 있음을 밝혀 냈다. 박물
관에 모아 놓은 미라들은 출처와 제작년대가 불확실하고, 적은 숫자에 비해 종류가 너무 다
양해, 특정 인구집단을 드러낸다고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동질성을 가진 인구집단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인류학자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인류학자들
은 유적지 현장에 나가서 엑스레이를 찍는 방법을 채택한다.  그렇게 하여 통계적으로 균일
한 인구집단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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