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특징에 관한 연구_이대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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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신학과실천 / KCI등재 2016. 05
http://www.praxis.or.kr/index.html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특징에 관한 연구
- 신앙과 실천의 관계를 중심으로 -
이대성 (연세대학교 교수 / 실천신학 / 조직신학)
■ 초록 ■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에 관한 연구는 증가하는 추세이다. 대부분의 연구는 그가 기독교인이고 그의 시가 기독교적 이념을 담고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중요한 한 가지 한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그 연구들이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가 어떤 것인 지에 대해 정확한 분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기독교가 윤동주 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까지만 관심을 두었지, 그다음에 물어야 하는 더 중요한 질문, 즉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가 “어떤 기독교였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특히 윤동주의 많은 시들은 신앙을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고 민하는 가운데 써졌으므로 그가 어떤 유형의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종교이므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고, 특히 윤동주가 살아왔던 시대는 서양의 기독교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독특한 유형의 신앙 형태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시기였다. 윤동주가 경험했던 기독교를 백과사전에서 기술하는 일반적인 정의와 동일하다고 여기거나, 2016년 한국 기독교의 모습과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었던 매우 특수한 유형의 기독교의 특성을 밝히고, 그 유형이 신앙과 실천의 관계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윤동주의 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본 연구는 실천신학, 조직신학, 교회사적 접근을 적용한 다학제적 관점에서 윤동주의 생애를 몇 시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로 그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특징을 살펴 보려고 한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본 연구는 윤동주가 체득한 기독교는 일반화할 수 있는 보편적 이념이 아니라 한국의 근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수많은 우연한 요소들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이루어낸 매우 구체적이고 특수한 형태의 신앙 체험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가 기독교적인 핵은 유지하면서 종교와 민족과 시대의 경계를 초월하여 두루 넓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체험한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의 유형으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기독교상을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밝히려 한다.
주제어
신앙과 실천, 윤동주, 기독교 시, 북간도, 한국초기교회사, 기독교 유형론
사진출처 : 통일의 집
▲용정 중앙교회 찬양대원 기념사진(세번째 줄 오른쪽 두번째부터 윤동주, 문익환) ⓒ통일의 집
I. 들어가는 말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윤동주에 대한 관심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7년을 앞두고 더욱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1) 윤동주와 그의 시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기독교와의 관계이다. 그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적 분위기가 강한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기독교 학교에 다니면서 평생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시 전체에서 기독교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시 중에서 종교시 혹은 기독교시라고 분류할 수 있는 시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런 시에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한다. 다른 이들은 그의 시를 일반시와 종교시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의 시 전체에는 기독교적 이념이 스며들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 어느 입장을 택하든, 윤동주의 시를 기독교와 떼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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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동주에 관한 연구물은 2014년 기준으로 225편의 석사학위 논문과 36편의 박사학 위 논문을 포함하여 총 500편이 넘는다. 이남호,『윤동주 시의 이해』(서울: 고려 대학교출판부, 2014), 5.
그러나 윤동주의 시와 기독교의 밀접한 관계를 당연시 여기는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연구는 중요한 한 가지 한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그 연구들이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정확한 분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기독교가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까지만 관심을 가졌지, 그 다음에 물어야 하는 더 중요한 질문, 즉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가 “어떤 기독교였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3)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종교이므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고, 특히 윤동주가 살아왔던 시대는 서양의 기독교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독특한 유형의 신앙 형태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시기였다. 윤동주가 경험했던 기독교를 백과사전에서 기술하는 일반적인 정의와 동일하다고 여기거나, 2016년 한국 기독교의 모습과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4)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었던 매우 특수한 유형의 기독교의 특성을 밝히는 것은 윤동주의 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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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광수는 윤동주의 궁극적 관심은 당시의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종교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윤동주의 시를 천편일률적으로 신앙적인 고백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고 한다. 윤동주의 시의 주제는 특정한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데, 그의 시를 단순히 종교적 시로 단정한다면 그의 시 세계를 너무 좁게 한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한다. 마광수,『윤동주 연구: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5), 182-184.
3) 윤동주의 생애 중 특정한 시기에 한정하지 않고 그의 생애 전체를 통틀어서 그가 어떤 다양한 기독교 유형을 만났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4) 백과사전식으로 이해할 때, 기독교는 결국 서구중심적, 비정치적, 관념적으로 파악 될 것이다.;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 “기독자유당”이라는 당명으로 출마한 정당의 유인물을 보면 “동성애는 에이즈를 유발한다,” “국내에 힐랄단지를 조성하여 무슬림이 30만명 거주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테러 위험국으로 전락한다,” “간통죄를부활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는데 여러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이들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고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반드시 “어떤 기독교인가”를 묻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가 어떤 기독교였는지에 대해 깊은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은데는 문학 분야 학자들보다는 신학분야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신학자가 실천신학, 조식신학, 교회사 등의 영역의 논의들을 반영하여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가 어떤 기독교였는지를 밝히는 것은 윤동주 연구를 위한 신학의 중요한 다학제적 공헌이 될 수 있다. 5) 본 연구는 실천신학, 조직신학, 교회사의 접근방법을 적용하여 윤동주의 생애를 몇 시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로 그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형태를 살펴 보고 그 신학적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분석하려고 한다. 6) 이런 분석을 통하여 본 연구는 윤동주가 체득한 기독교는 일반화할 수 있는 보편적 이념이 아니라 한국의 근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수많은 우연한 요소들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이루어낸 매우 구체적이고 특수한 형태의 신앙 체험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가 기독교적인 핵은 유지하면서 종교와 민족과 시대의 경계를 초월하여 두루 넓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체험한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의 유형으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기독교상을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밝히려 한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첫 번째 부분인 서론 이후, 둘째 부분에서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다양한 기독교 신앙의 유형을 살펴보려고 한다. 셋째 부분에서는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특징을 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1. 북간도 시절, 2. 평양 숭실 중학교 시절, 3. 연희전문학교 시절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넷째 결론 부분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특성을 심도 있게 분석해보고, 이 논의가 윤동주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또한, 오늘의 기독교의 역할을 새롭게 자각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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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특히 실천신학적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가 중요하다: 신앙과 실천, 전도, 설교, 목회, 기독교적 문화 참여. 오늘의 윤동주가 있게 된 데는 김약연 목사를 비롯 한 주위 목회자들의 설교와 목회적 돌봄이 크게 작용했음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실천신학적 관점의 적용은 윤동주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교회사적 관점과 조직신학적 관점은 윤동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해석하며 신학적인 의미를 규정하는 등의 작업을 위해 기본적으로 적용된다. 6) 윤동주의 생애와 시에 관한 연구서는 이미 많이 나와 있으므로 그 부분은 최소한으로 기술하려 한다.
II.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기독교의 다양한 유형들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친 기독교의 특성을 자세하게 살펴보기 전에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어떤 기독교 신앙 유형이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선교사들의 교단적, 국가적 배경의 차이,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인의 상황, 시대적, 지리적 조건 등에 따라 때로는 명백하게 대조되는, 때로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형태의 다양한 기독교 신앙 유형이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유형을 통합하여 하나의 유형론을 제시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상황과 주제에 대해 상반되는 견해를 갖는 여러 사례들을 소개함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1) 황사영 유형과 정하상 유형: 황사영은 국가배타 신앙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국가나 민족도 초월하여야 한다는 견해이다. 황사영은 백서(1801)에 우리나라는 망하여도 교회는 남 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교황권 절대주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죄악시하는 극단적 보수주의, 신앙 양심에 비추어 국가적 의무도 거부하는 소종파운동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7) 정하상 유형은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국가와 민족의 이상과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정하상은 『상재상서』(1839)를 통해 천주교가 공맹정주(孔益程朱)의 정학에 거슬리는 일이 없고, 성서는 시서예악(詩書禮樂)의 전통 고전과 빗나가는 것이 없 음을 논증했고, 천주교 신앙은 조선백성의 얼과 충심에 조금도 반하지 않는다 고 말하고, 천주교를 믿는 자들이 진정한 임금의 적자라고 호소했다. 8) 민족교회, 토착화, 일본 기독교 메이지시대 기독교 수용자, 천황제에 적응한 일본 기독교, 한국 초기 충군애국교회, 일제 말기 일본적 조선 기독교 등은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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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한국사회주의와 기독교 관계 연구』(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365.;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 한국 민족교회 형성 과정사』(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07), 72-75.
(2) 1895년 유형의 기독교와 1905년 유형의 기독교 유형: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 지 10년이 되는 1895년까지 동학혁명,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국가적 위기를 불러오는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이 보여 준 우호적인 태도와 그들의 국가의 막강한 영향력을 실감하면서 기독교가 나라를 구할 종교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어 기독교를 수용하는 한국인이 많이 생겼다. 1895년 유형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충군애국적인 이유로,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는 국가의 종교인 기독교를 수용하는 경우이다. 10) 1905년 을사조약의 영향으로 온 국민의 배일정서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상황에서 성서에 나오는 모세, 예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다. 1905년 형 유형은 기독교 국가의 외면적인 힘보다는 기독교 자체의 정신적인 내용에 더 가치를 두면서, 기독교를 믿으면 일본을 이기고 나라를 지킬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고 기독교를 수용한 경우이다. 11) (3) 종교-국가 일치 유형과 종교-국가 분리 유형: 유럽의 개신교는 국가 단위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의 일치를 강조했고, 선교도 본국과의 긴밀한 원조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적 교파형 교회는 종교- 국가 분리 유형인데, 여기에는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전통에 서서 서구문명의 우월감이나 강대국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복음전파의 열정으로 선교지 에 온 내한 선교사들이 포함된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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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 90.
9)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366.
10) Ibid., 364.; 조재국, "초기 기독교수용의 성격에 관한 한일 비교연구,"「신학과 실천」 41 (2014), 499.
11) Ibid., 164-165.;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 249.
12)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368.
(4) 19세기 이전의 선교 유형과 19세기 이후의 선교 유형: 19세기의 선교는 서구 제국주의의 확장과 병행하여 이루어졌다. 다른 민족을 야만민족으로 여기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압력을 동원하여 기독교적 문명을 확산시키는 것을 선교적 사명으로 생각하는 유형이다. 13) 19세기 이후에는 세계를 보는 시야가 다양해졌고,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순수한 복음전파를 목표로 한 선교가 확장되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국주의와의 관련성이 약하고 개인적 신앙 동기에 의해 선교지에 온 선교사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내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이 유형에 속한다.
(5)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유형: 복음주의는 문화에 대해 낙관적 태도를 취하며, 학교, 병원, 고아원 등을 통해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14) 이에 반해 근본주의는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하며 개인 영혼의 구원만을 중요시하고 문화에 대한 비관론적 태도를 취하며 사회 개혁을 위한 참여를 도외시하고 축자영감설에 근거 한 성경관을 갖고 있어서 성경을 유연하게 해석하는 것을 죄악시 한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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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Ibid., 366.; 선교사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불순한 동기로 제국주의적 동기, 문화적 동기, 교회식민주의를 들 수 있다. 이후천, "하디의 전인적 선교사역에 대한 선 교학적 평가 - 하디의 선교보고서를 중심으로,"「신학과 실천」 36 (2013), 659.
14) 1880년대 중반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은 교육 사업에 큰 공을 들였다. 백종구, "구 한말 기독교학교 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의식(1885-1910),"「신학과 실천」15 (2008), 241.
15)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여 구별을 하지 않고 있으나,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한 다양한 유형의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다. 복음주의는 18-19세기 영미 부흥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특히 1800-1840년에 있었던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챨스 피니 (Charles Finney)가 중요한 역할을 한 제2차 대각성운동은 칼뱅주의적인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학보다는 아르미니우스나 신인협력적인 입장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현실 역사에 대해서는 낙관적 입장을 갖고 있는 후천년설(번영의 천년이 지나면 예수가 재림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였고,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죄악된 사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회적 각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복음주의적 기독교는 문맹퇴치, 노예해방, 해방노예 귀향 원조, 무료 학교 운영, 금주운동, 고아원 설립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재근,『세계 복음주의 지형도』(서울: 복 있는 사람, 2015), 144, 168-170. 이에 반해 근본주의는 19세기 영국의 다비 (J.N. Darby)가 창시한 세대주의 전천년설 (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의 영향으로 생긴 것으로, 이 입장은 역사가 배교와 전쟁으로 천년동안 극악의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후에 역사를 심판하기 위해 예수가 재림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현세에 대해 비관적이고 반지성적이고 타교단이나 타문화에 대해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반감을 갖고 있다. 이들은 합리적이고 비평적 성서해석을 배격하여 축자영감설을 강력하게 믿고 있다. James West Davidson, The Logic of Millennial Thought: Eighteenth-Century New Englan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7), 28.
(6) 사도적 기독교와 토착적 기독교 유형: 사도적 기독교는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지향하는 유형으로 국가와 문화를 초월하여 드러나는 동일한 형태의 신 앙을 강조한다. 토착적 기독교는 선교지의 민족적 정황이나 문화를 더 존중해 주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16)
(7) 서북지방, 서울지방, 함경도지방의 기독교 유형: 서북지방의 기독교는 평 양을 중심으로 하여 선교사들의 주도 하에 형성된 유형으로 수적으로 가장 많았고, 신앙은 보수적이었으므로 충군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고, 오랜 세월동안 지역 차별 때문에 소외를 받아온 자작농, 지주 등 중산층과 하류층 출신들도 많았다. 17) 서울지역의 기독교는 선교사들과의 접촉은 있었지만 선교사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지는 않았고,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적극 개입하려는 지식인들과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기독교인의 유형이다. 이들은 개혁주의적 입 장을 취했고 반봉건주의 반군주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18) 함경도지방의 기독교는 이 두 유형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띠고 있었다. 이 지역은 주로 캐나다 장로교 출신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들은 서구문화에 대한 월등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한국 고유문화를 존중했으며, 한국인의 배일정신에 공감을 했었다. 19)
(8) 하류층의 기독교, 양반층의 기독교, 중산층의 기독교 유형: 오래된 반상 구분 때문에 초기 기독교 선교는 하류층의 기독교와 상류층의 기독교로 구분되 었다. 이전의 가톨릭 신앙이 양반층에서 시작되어 점차 하류층으로 확산되었다면, 개신교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하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에 주력하였다. 후에 자세하게 살펴볼 전덕기 목사나,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제중원에서 교육 받아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된 박서양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편 이동휘처럼 개화기 신분구조가 변형되면서 생겨난 중인 계층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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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371.
17)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 242, 247.
18)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369.
19) 이 유형은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후에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9) 민족주의적인 기독교와 역사 초월적 기독교 유형: 민족주의적 기독교는 민족의 문제를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유형이다. 한국의 경우 배일 애국 운동과 기독교 신앙을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신자들이 많았다. 21) 이 유형의 기독교는 한편 히틀러 치하의 독일교회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민족주의적 이념을 신성화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역사 초월적 기독교는 현실의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내세에 대한 믿음과 역사의 단절로 이해되는 종말에 대한 기대가 중심이 된 신앙형태이다. 22)
(10) 문화와 대립하는 기독교, 문화를 변혁하는 기독교, 문화에 속한 기독교 유형: 한국 기독교 신앙의 다양한 형태를 분류하는 데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제시한 유형론이 도움이 된다. 23) 문화와 대립하는 기독교는 문화에 대해 비관적 입장을 갖고 있으며 개인 영혼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고 사회적 참여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24) 근본주의가 그 대표적 인 사례이다. 나머지 두 유형은 모두 문화에 대한 낙관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문화를 변혁하는 기독교의 유형에서는 사회에서 기독교가 빛과 소금과 같은 역할을 감당함으로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혁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문화에 속한 기독교 유형은 문화에 대해 가장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문화도 하나님이 창조 질서 속에 포함되므로 참된 문화는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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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Ibid., 370.
21) 조창연, "한국사회의 변화에 따른 개신교의 변화와 그 이념적 분화,"「신학과 실천」 19(2009), 244.
22)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369.
23) 니버는 이 책에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 한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이 중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서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유형을 택하였다. 리처드 니버/홍병룡 옮김,『그리스도와 문화』(서울: IVP, 2007).
24) 신앙공동체 구성원이 스스로의 죄성에 관한 자각과 사회 정치 영역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사회 변혁을 위한 참여에 소극적인 것에 대해 라인홀드 니버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참고: 박우영, “신앙공동체의 실천과 기독교 현실주의와의 관계성 연구- 기독교 현실주의의 재해석 필요성을 중심으로,”「신학과 실 천」 39(2014), 244.
(11) 통합지향적 신앙, 분리지향적 신앙, 변혁지향적 신앙 유형: 이 분류는 이덕주가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에서 제시한 것이다. 통합지향적 신앙은 복음과 민족의 구원을 일치시키는 유형이다. 이들은 애국운동에 적극적이었고 민중 계몽운동은 물론 배일 무장투쟁에도 가담했다. 또한 토착문화와 기독교 복음을 연결하는 노력이 이 유형에서 보여진다. 26) 분리지향적 신앙은 민족의 현실이나 전통 문화를 기독교와 분리해서 보는 유형이다. 엄격한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일제의 탄압이나 봉건주의의 폐해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고 현실도피적, 내세지향적 경향이 강했으며, 토착문화와 전통을 평가절하하는 입장 이었다. 금주, 금연 등과 같은 청교도적 윤리를 중요시 여겼다. 이것은 한말 상황에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입장이다. 27) 변혁지향적 신앙은 기독교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이에 근거하여 민족 전통을 변혁하려는 입장이다. 통합지향적 신앙이 기독교를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나 이 입장은 확고하게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서 반제국주의, 반봉건 주의적 투쟁을 하며 기독교가 지향하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는 이상을 갖고 있다. 토착 문화를 무시하거나 배격하지 않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완성시키려고 노력을 한다. 28)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난 다양한 기독교 신앙의 형태를 살펴 보았다. 서로 중첩되는 부분도 있는 여러 유형을 열거해 본 이유는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유형이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 유형들은 관점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분류를 해 볼 수 있다. 선교사의 신학과 관련된 유형(3,4,5,6,8,10),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인의 태도와 관련된 유형(1,2,5,7,8,9,11), 시대적 상황에 따른 변화와 관련된 유형(1,2,4) 등이 몇 가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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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Ibid., 178,
26) 이덕주,『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367.
27) Ibid., 367.
28) Ibid., 368-369.
전체적으로 보면 문화, 개인의 영성, 사회정의, 국가권력, 제국주의, 봉건주의, 일제와의 관계, 계층 등이 기독교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 모든 유형들을 신앙과 실천의 관점에서 접근해볼 수도 있다.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신앙이 기독교인들의 문화적, 사회적 상황과 어떻게 관련된다고 가르치는가에 따라 믿음을 통한 개인 영혼의 구원을 강조하는 입장과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의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입장이 구분될 수 있다. 이 모든 유형을 합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려는 유혹도 생기지만, 이런 다양하고 복잡한 상태가 실제로 윤동주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수용할 때 접했던 상황에 더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윤동주는 직간접적으로 이와 같은 다양한 유형의 기독교를 체험하면서 그만의 고유한 신앙의 유형을 형성했던 것이다.
III. 각 시기별로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특성
1. 북간도 명동촌과 용정에서 접한 기독교
1) 윤동주 출생 이전 명동촌의 형성과정과 기독교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문병규, 김약연, 남도천, 김하규의 가문에 속한 총 141명이 그들이 살던 두만강변 종성과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이주하여 형성한 마을이다. 29) 윤동주의 가문은 1900년에 윤하현(윤동주의 조부)이 식솔 18명을 이끌고 이주하여 명동촌 형성의 초기단계부터 동참하였다. 이들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 경제적 독립을 하며 인재를 기르기 위해 이주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30)
원래 명동촌 문화는 유교적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1908년 “명동학교”를 개교하였으며, 김약연(윤동주의 외삼촌)이 교장을 맡으면서 신학문을 가르칠 교사로 용정에서 활동하던 정재면을 초대하면서 그를 통해 명동촌은 기독교 마을이 되었다. 정재면은 우수한 교사들을 영입하여 명동학교 학생 뿐 아니라 명동촌 주민을 대상으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주의와 신문화를 교육 하였다. 명동촌은 기 독교마을이 되면서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와 같은 역할을 감당했고 1917 년 윤동주가 태어났을 때 명동촌은 모범적인 농촌운동, 독립운동, 평등의식 교 육의 중심지로서 자리를 확고하게 잡고 있었다. 31) 명동촌에 뿌리내린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정재면, 이동휘, 그리고 캐나다 선교사들의 기독교 신앙의 형태를 자세하게 분석해 보아야 한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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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송우혜,『윤동주 평전』(서울: 푸른역사, 2004), 42.
30) 김형수,『문익환 평전』(서울: 실천문학, 2004), 85, 91.
2) 정재면의 기독교 신앙
명동촌에 기독교를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정재면(1884-1962) 이다. 정재면은 평남 숙천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 33) 그는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신앙형태를 갖고 있었던 모친 김성약과 유교적이고 유일신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부친 정학전의 신앙형태를 물려받아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을 존중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독립을 위한 싸움에 예수를 장수로 따르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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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평등의식이 명동촌 주민들의 삶에 구체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한 예로 명동촌 여성들이 남자와 똑같이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되고,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일을 들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남녀구별 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평등의식에 근거해서 명동촌에 여성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믿음의 식구라는 의미로 믿을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어, 신묵, 신이, 신태, 신애 등의 신자 돌림 이름을 가진 여성이 50명이나 되었다. 문영미, “나의 할머니, 김신묵 의 살아온 이야기,”(서울: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47.
32) 명동촌 기독교 신앙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김약연에 관한 내용은 다음 부분에서 다룬다.
33) 1884년 이전에 숙천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서굉일은 추측한다. 서굉일,『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경기도: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8), 275 34) 모친 김성약이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마르틴 루터가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였는데, 이 찬송가에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그 장수 누구뇨, 주 예수 그리스도”란 구절이 있다. 김성약은 홍경래가 이런 장수라고 생각하고, 예수가 홍경래보다 더 강한 장수로서 시대를 변혁하고 민중을 폭압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서굉일,『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76.
그는 구국의 열정을 갖고 1903년에 상경하여 전덕기 목사(당시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35) 정재면은 전덕기 목사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 자주독립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갖게 되었고, 민족운동이 곧 선교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36) 정재면은 상동교회 내에 세워진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이곳에서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근대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37) 그는 이동휘, 안창호, 김구, 전덕기 등이 1907년에 조직한 애국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이동휘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동휘는 신민회 교 육사업의 일환으로 정재면에게 운영이 어려워진 용정의 서전서숙을 재건하라 는 임무를 주었다. 용정을 방문한 정재면은 서전서숙의 재건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대안을 모색하는 중 당시 성공적인 한인 이주 집단 부락 공동체로 잘 알려진 명동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약연은 명동학교에서 신학문을 교육하기 위해 정재면과 같은 선생을 꼭 필요로 했지만, 정재면(당시 22세)은 신민회의 노선에 입각하여 나름대로 명동촌을 기독교화하여 북간도 지역의 기독교적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정재면은 특히 명동촌이 유학적 전통으로 무장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마을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부친으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던 그로서는 유교적 전통을 갖고 정신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경우보다 용이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8) 김약연은 과감하게 정재면의 제안을 받아들여 명동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매일 예배를 드리는 조건을 수락하여 정재면은 명동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정재면은 1913년 명동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1919년에는 용정교회 전도사로 북간도의 교회가 독립운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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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고아였던 전덕기(1875-1914)는 17세에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여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는 남대문 일대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였고,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유수한 젋 은이들을 기독교적 구국운동에 참여하도록 끌여 들였다.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 33.
36) “정재면은 자신이 평소 품어온 하나님사랑, 민족사랑, 나라사랑은 하나이며,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은 일제의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굉일,『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77.
37) 서굉일,『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78.
38) Ibid., 281.
3) 이동휘의 기독교 신앙
이동휘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승교는 계몽운동에 관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계급적이고 불평등한 양반 정 치에 대해 큰 불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40) 이동휘는 1896년에 그 무렵 새로 생긴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친기독교적 성향을 띤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처음 기독교와 접촉하게 되었고, 후에 상동청년회와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기독교적 독립운동에 적극 개입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41) 1897년 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동휘는 청렴강직과 충성심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 을 받고, 고종의 신임도 얻어, 지방군대의 재정을 감사하는 검사관으로 근무를 하였고, 1903년에는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임명되어 1905년까지 근무했다. 이동휘는 강화도에 근무하면서 근대 학교 교육과 계몽운동에 투신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42) 상동청년회와 신민회에서 알게 된 인사들을 통하여 관서 관북지역의 조직도 관리하고 방문도 하면서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함경도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할당받아 선교를 하는 캐나다 선교사 중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한국명 구례선)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43) 조사로서 그와 함께, 혹은 독자적으로 순회 전도를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44) 그는 마을마다 방문하면서 대사경회를 열었는데 그때마다 주변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45) 이 때 행한 이동휘의 설교 내용은 그와 그의 설교를 들은 이들의 신앙의 유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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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정재면은 1919년에는 김약연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도 참여했으며, 1923년 에는 용정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였다. 1925년 남경 금륭대학 신학부에 유학 하였고, 1928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 고 함경북도 지역에서 목회를 했다.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457-458.
40) Ibid., 28,29.
41) 이동휘는 독립협회에서 전덕기를 알게 되었고,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전덕기를 통해 상동청년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후에 그와 함께 1907년에 신민회의 발기인 7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32-34, 40, 64.
42) Ibid., 39.
43) Ibid., 421.
44) “조사”(助師,helper)는 지금은 없어진 직책인데, 한국기독교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사는 한국인이 목사가 되기 전에 선교사를 도와 목회를 돕는 일을 했으며, 선교사의 전도, 치리, 순회심방 등을 보좌하고, 단독으로 목회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북간도 도처에는 망명 한인들의 부락이 많이 생겼는데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그들은 교회와 학교를 지어 자녀들에게 신앙과 애국사상을 가르쳤는데, 이는 그리어슨과 이동휘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이들은 협력하여 헌신적으로 활동을 했다. Ibid., 275, 315, 424.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학교를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그래야만 우리도 서양문명국처럼 잘 살 수 있다. 삼천리 강산 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삼천개의 교회와 학교가 세워 지는 날 우리는 독립할 것이다. 46)
이동휘는 1910년 이후 북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김약연을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힘을 합하여 북간도지역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4) 북간도 지역 캐나다 선교사들의 선교 신학
북간도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데는 캐나다 선교사들의 공헌이 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47) 북간도 지역에서는 캐나다장로교 선교사 그리어슨이 1902년부터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1906년 이후 화룡면, 광제암, 용정 등에 교회를 세웠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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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그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어서 수많은 청중들이 흑흑 흐느껴 울고, 그 자리에 반드시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Ibid., 148.
46) 김형수,『문익환 평전』, 89.
47) 문백란, “캐나다 선교사들의 북간도 한인사회 인식- 합방 후부터 경신참변 대응
시기까지를 중심으로,“『동방학지』 144(2008/12), 104.
48) 그리어슨은 한국에 먼저 와 선교활동을 하다가 사망한 맥켄지(William J. McKenzie, 1861-1895)를 이어 활동을 하기 위해 캐나다장로회가 파송한 선교사이다. 그는 1898년 한국에 도착하여 맥켄지 선교사가 활동하던 황해도 소래에서 선교를 하려고 했으나, 이미 미북장로회에서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어서 다른 선교지를 고려하던 중, 원산지역을 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1899년 원산에 도착하여 캐나다 선교구역인 함경도 지방 곳곳을 다니면서 선교여행을 했다. 1901년에는 성진에 함경북도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제동병원을 설립하였다. 제동병원은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濟衆院)의 이름 을 따서 동쪽에 있는 제중원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데, 이는 언더우드의 권고 를 따른 것이다. 이 지역에 세워지는 병원들은 제혜병원, 제창병원식으로 “제”자 로 시작하는 이름을 갖게 된다.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304-310.
이동휘가 캐나다 선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 데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서 이미 활동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미국 선교사들보다 더 사회적 정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민주적이고, 평등적이고, 진보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49) 캐나다 선교사들은 일부 미국 선교사들처럼 피선교지를 자기들의 문화처 럼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강압적이거나 우월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50) 미국선교사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확고해지면서 선교를 계속하기 위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고 정치 불간섭과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였는데,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집단적으로 강한 친한·반일적 성향을 갖고 정치적인 문 제에 적극 개입을 했다. 51)
캐나다 선교사들과 미국 선교사들의 이런 입장 차이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미국은 일제와 관계를 맺고 있어서 미국 선교사들은 1910년 이후 일제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미국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종교가 정치에 적극 개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반해 캐나다는 당시 여전히 영국 왕실과 전통을 존중하고 있었고, 종교가 정치에 영향력 을 끼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던 캐나다 선교사들은 조선 왕조의 왕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고 왕비가 시해되는 것을 보고 미국 선교사들과는 다른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캐나다는 신생국가로서 정의와 평등, 다양성 등에 관한 순수한 이상을 아직도 강력하게 추구하고 있 었다고 볼 수 있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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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캐나다 선교사들은 신생국가 캐나다가 가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순수한 이상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미국 선교사들과 종종 입장의 차이를 드러냈다. 미북장로교 회의 선교 방침은 “일제의 만행이 있어도 다소간 불의를 참고 견디면서 본국과 협조하여 선교의 수확을 거두라”는 식이었다면, 캐나다장로회의 방침은 “비인도적인 잔인함과 불의를 보고 침묵한다는 것은 비겁한 것이므로 선교사라면 응당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한다”는 식이었다고 한다. Ibid., 247,291.; 미국 선교사들은 미국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이고 이 세상을 구원할 나라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서 우월의식이 있었다는 평도 있다. 류대영,『초 기 미국선교사 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145, 147.
50) 한 예로 캐나다선교회는 기독교인들이 사당과 성황당을 파괴하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캐다다선교회는 타문화, 타종교에 대한 관용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신학을 가진 일부 미국 선교사들과는 대조가 되었다.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271.
51) 1901년에 의결된 장로회 선교공의회 문서는 정교 분리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는 미국적인 교파교회의 윤리관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민경배는 해석 한다.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 296.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271.
5) 윤동주의 출생과 명동 소학교 시절에 접한 기독교 (1917-1931)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과 모친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였던 윤하연은 교회 장로로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받 고 있었다. 부친은 윤동주가 태어날 때 명동학교 선생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윤동주의 어머니 김용은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이었다. 윤동주는 3달 먼저 태어난 고종 사촌 송몽규와 같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에서 주 일학교에 다니면서 같은 집에서 성장했다. 두 사람은 1925년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문익환과 함께 소학교에 다녔는데, 정재면에 의해 기초가 다져진 명동소학교에서 철저한 기독교적 민족교육을 받았다. 김약연은 명동소학교에서 가르칠 때 국경일이나 국치일마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숙연히 민족애를 설파하여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기창 선생은 어떤 작품이든 조선 독립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기독교 정신과 민족교육을 강조하는 학교의 분위기와 명동촌의 정서는 윤동주의 삶과 문학에 평생 남 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53) 명동소학교는 경제적 공황의 여파와 공산주의 영향의 확대로 1929년에 교회학교의 형태에서 인민학교로 넘어가고 곧 중국 정부에 의해 공립으로 강제 수용되었다. 54) 김약연은 이 때 명동학교를 떠나 환갑 한해 전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수학한 후 특별한 배려로 목사안수를 받고 1930년 다시 명동촌으로 돌아와 명동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김약연은 명동소학교에서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당시 14살이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김약연으로부터 직접 맹자와 시경과 성서를 배울 기회를 가졌다. 윤동주는 1931년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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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Ibid.
53) 김응교, “윤동주와 걷는 새로운 길 1. 명동촌: 유교·민족·기독교 공동체,”『기독교 사상』 650(2013/2), 221.; 이대성, “연세학풍이 피운 꽃, 윤동주,” 조재국 외,『연세 의 개척자들과 연세학풍』(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15), 216-217.
54) 송우혜,『윤동주 평전』, 546.
6) 김약연의 기독교 신앙
김약연이 윤동주에게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앞에서 살펴본 이동휘와 정재면 등이 갖고 있었던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윤동주는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김약연을 통하여 충실하게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윤동주가 초등 학생이던 시절 김약연은 이미 기독교 신앙을 십 수 년 믿어오면서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고,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하여 북간 도지역의 중요한 지도자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김약연은 맹자를 만번 읽었다 고 알려질 정도로 유교에 정통한 학자였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계속 유교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김약연이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은 “마치 공자가 제자들에게 도를 행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김약연의 사상은 유교, 기독교, 민족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약연의 기독교 신앙을 분석할 때 살펴봐야 할 부분이 그가 평양신학교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하는 것이다. 당시 평양 장로교신학교는 보수적이어서 새로운 신학적 경향을 경계시하고 근본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서 문화나 사회 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55) 이는 그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기독교 신앙과 잘 조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환갑이 넘어 사상이 완 숙해 있었고 민족 지도자로서의 위상이 확고했던 김약연은 그런 신학교의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다. 김약연은 후에 은진학교 이사장으로 재직 하던 1937년에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자 김재준을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초빙하 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그의 신학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신학적 수업은 강의실이나 책을 통해 이루어 졌다기보다는 신학교에서 수학하기 전에 민족운 동에 헌신하는 가운데 만난 선교사와 이동휘, 정재면 등의 기독교 활동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상당부분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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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초석을 쌓은 마펫은 1919년 설교에서 “조선교회 형제여! 40 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를 전합시다...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라고 할 정도로 새로운 신학적 흐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민경배, 『한국기 독교회사』, 400.; 당시 신학교에는 한국 사람으로 처음 교수가 된 남궁혁이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사였던 김재준과 신학적 교감을 하고 있었다. 미국 남침례교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근본주의적 성향의 박형룡이 1931년 평양 장로회신학 교 교수가 되자 신학교의 보수적 성향은 더 강화되었고 1932년부터는 총회적으로 신학적 분열이 확산되었다. 김약연이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신학적 대립이 그 렇게 심각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 495-496.
7) 용정 은진 중학교 시절에 접한 기독교 (1932-1935)
윤동주 집안은 40년을 넘게 살던 명동촌을 떠나 용정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 사한 후 윤동주는 용정중앙교회와 은진 중학교에 다녔다. 1934년 12월 그의 사촌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숟가락”이라는 콩트를 출품한 것이 당선된 것에 자극받고 윤동주가 시 창작에 몰두하였고, 자기 작품을 소중하게 챙기고 그것을 쓴 날짜를 정확히 적기 시작하였다. 그가 남긴 시 중 가장 오래된 3편은 1934년 12월 24일 이라는 날짜가 적혀있다. 이 시절 윤동주가 받은 기독교적 영향을 검토하려면 용정중앙교회와 은진중학교와 관계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1) 용정중앙교회와 문재린 목사
윤동주는 용정중앙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했고,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들 을 가르기도 했다. 당시 이 교회의 담임목사는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 (1932-1946 재직)였는데, 이 교회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나 일본 유학 중에도 방학이 되면 돌아와 출석하고 여름성경학교 교사로 봉사를 하던 교회였다. 윤동주의 장례식이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거행되었고, 묘지가 용정중앙교회 묘지내에 마련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교회는 윤동주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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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규암은 40세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처음 그는 근대 교육과 민족 운동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지만, 곧 참된 신앙인이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속에서 민족에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영적인 구원, 영의 해방뿐만 아니라 민족의 해방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를 통하여 얻은 구원과 자유는 구속을 통하여 획득한 영의 자유와 해방에서 민중의 해방, 민족의 자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한민족을 향하여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서굉일, 김재홍 편저,『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서울: 고려글방, 1997), 86.
문재린은 김약연이 운영하던 서당 규암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명동중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1910년에 정재면 선생에게 감화되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명동교회 장로, 평양신학교 졸업(1926), 목사안수(1927) 등을 거쳐 명동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다가 1928년에 캐나다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교로 유학을 가서 1931년에 학위를 마친 신학자이며 목회자였다. 57) 문재린 목사는 “생각에 깊게 뿌리박힌 실학”의 영향 때문에 “내세나 영생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하였고 민족의식도 매우 강조했다. 58) 이 교회는 청년회와 주일학교가 활발하게 운영되었고, 형편이 어려운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50명 규모의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 유학을 마친 실력 있는 목회자를 가까이서 대하면서 그의 설교와 목회적 실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은진중학교의 기독교 교육
1932년 4월(16세) 윤동주는 송몽규, 문익환 등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은진중학교는 1919년에 캐나다장로교 선교사 부두일(William Foote)에 의해 세워졌으며 요한복음 1장 14절의 “은혜”와 “진리”의 앞 글자를 따 교명을 지었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구역인 “영국덕”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국제법상 캐나다는 영국 연방국 중 하나여서 “영국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이런 명칭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국덕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 학교와 병원 등을 설립하고 운영했었고, 그 중에는 은진중학교 외에 명신여학교, 제창병원 등도 있었다. 1932년 3월 일본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북간도 지역에서 일본의 지배는 더욱 강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진중학교 학생들은 치외법권적 보호를 받으며 철저한 민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59) 김약연은 이 시절 은진중학교로 부임하여 1934년까지 성서와 한문을 가르치면서 계속해서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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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문영금,『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문재린 김신묵 회고록』(서울: 삼인, 2006), 743-744.
58) Ibid ., 155.
59) 박창해, “윤동주를 생각함,”『나라사랑』 23(1976/6), 129.; 이대성, “연세학풍이 피운 꽃, 윤동주,” 202.
윤동주는 이 학교에 다니면서 철저한 기독교적 민족교육을 받았다. “거기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목청껏 부를 수 있었다.” 특히 이 학교의 명희조 선생은 철저한 애국자였다. 그를 통해 학생들은 한국의 역사를 동양사와 세계 사의 관련 속에서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고 조국의 광복을 먼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60)
8) 북간도 명동촌과 용정에서 접한 기독교의 유형
지금까지 윤동주가 명동촌과 용정에 살던 시절 그에게 영향을 끼친 기독교 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았다. 위에서 살펴본 다양한 신앙유형을 적용해볼 때 몇 가지 유형에 대해서는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성격이 명확하게 드 러난다. 즉, 정하상 유형(1), 종교-국가 일치 유형(3), 19세기 이후의 선교 유형 (4), 토착적 기독교 유형(6), 함경도지방의 기독교 유형(7), 중산층의 기독교 유형(8), 민족주의적 기독교 유형(9), 문화를 변혁하는 기독교 유형(10), 변혁지향 적 신앙 유형(11)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61) 1885년 유형(2)과 1905년 유형에 관해서 논하자면,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정재면, 이동휘, 김약연 등은 처음에는 1885년 유형의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신앙을 내면화 하면서 이들은 기독교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이를 통해 민족을 구하고 문화 를 완성시키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1905년 유형으로 전이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동휘 같은 이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대부분의 국내 기독교 인들이 역사초월적 기독교 유형(9), 분리지향적 신앙 유형((11)으로 바뀌면서 탈정치화하고, 항일 구국 지도자들은 교회를 떠날 때, 캐나다 선교사들의 영향 과 함경도지방의 기독교 유형(7)의 영향으로 계속하여 변혁지향적 신앙 형태(11)를 유지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62) 윤동주의 경우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김약연, 문재린과 같은 목회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신앙교육을 받아왔고, 최고 수준의 기독교적 민족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고, 공자와 맹자를 배우고, 문학 수업을 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매우 강한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고, 사회와 문화에 대해 낙관적이며 참여적인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북간도 시절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었던 기독교는 개인 구원과 함께 민족의 구원을 중요시 하였고, 한국 고유문화와 전통을 존중하였고, 한국인이 주도가 되어 수용하고 발전되고 전파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윤동주가 북간도에서 체험했던 기독교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바로 그 시기 그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던 특이한 형태의 조합이었다. 스크랜턴 → 전덕기 → 이동휘 → 정재면 → 김약연 → 윤동주로 이어지는 중심 라인에 문재린 목사, 그리어슨 선교사, 명동초등학교 교사들, 은진중학교 교사들을 통한 영향이 추가되어 윤동주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최고 수준의 기독교 신앙 교육을 받아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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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명희조는 이광수의『흙』을 읽고 감동받아 이상촌을 갈망하며 계몽운동을 하겠다는 학생들을 야단치며, 지금은 힘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하는 때라고 역설할 정도로 독립에 관한 열망이 강했다. 그는 송몽규와 나사행 등 학생들을 군관학교로 보 내기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은진중학교동문회,『은진 80년사: 북간도의 샛별』 (서울: 은진중학교동문회, 2002), 57-58.; 송우혜,『윤동주 평전』, 122-123.
61) 유형을 언급하는 경우 앞에서 각 유형을 소개할 때 적용했던 번호를 괄호 안에 표시했다. 즉 “정하상 유형(1)”은 1번 유형 중 정하상 유형이라는 뜻이다.
2. 평양 숭실 중학교에서 접한 기독교 (1935-1936)
윤동주는 1935년 9월 숭실중학교로 진학했다. 숭실중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베어드 (William Baird, 한국명 배위량) 선교사가 1897년에 세운 후 비약적 발전을 이룬 숭실학교의 중학부 과정이었다. 그러나 윤동주가 숭실중학교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 가질 못했다. 일제는 이 무렵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거부하던 숭실중학교는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 숭실학교의 교장은 맥큔 (George McCune, 한국명 윤사온)이었는데, 그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1936년 3월 21일 교장직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36년 4 월(20세) 새 학기가 시작하자, 학생들은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강요와 부당한 압박에 대한 저항과 맥큔 교장선생에 대한 지지의 표시로 동맹퇴학을 감행하였다. 숭실학교는 결국 1938년 3월 19일 폐교되는데, 이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학교를 폐교함으로 종교의 순결성과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로 결단한 것에 따른 결과였다. 63) 윤동주에게 숭실 시절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신의 시풍을 만들어가며 많은 시를 지었던 기간이었고 투철한 기독교 정신과 민족주의 정신을 통하여 사상적인 깊이를 심화시키는 기간이었다. 윤동주는 숭실학교 자퇴 후 용정으로 돌아와서 1936년 4월 6일(20세) 친일계열 광명학교 중학부로 입학하여 2년 동안 다니게 된다. 이 시절 윤동주는 용정중앙교회 문재린 목사와 외삼촌 김약연 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을 심화시켰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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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서정민,『이동휘와 기독교』, 365.
평양시절 윤동주가 접한 기독교의 유형을 판단하는 데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제는 신사참배에 관한 것이다. 신사참배를 하느니 차라리 폐교를 택한 맥큔 교장 등 학교 운영진의 결정이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는지 종교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함이었는지에 따라 이들의 신앙의 유형이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라면 민족주의적인 기독교 유형(9), 통합지향적(11) 혹은 변혁지향적 신앙 유형(11)으로 분류할 수 있겠고, 후자의 경우라면 역사 초월적 기독교 유형(9), 분리지향적 신앙 유형(11)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평양지역은 평양신학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근본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전자보다는 후자의 요소가 더 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64) 그동안 캐나다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윤동주로서는 숭실 중 학교에서 경험한 기독교의 형태가 색다르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숭실 중학교에 다닌 기간은 7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3.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접한 기독교 (1938-1941)
1) 연전에서 접한 기독교와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의 성숙
윤동주는 1938년 2월 17일(22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합격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졸업을 할 때까지 사년은 윤동주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고 풍요로 웠고 자유로웠던 시기였다. 연전은 그동안 윤동주가 살아오면서 배우고 익혀왔던 기독교 신앙, 민족정신, 문학성을 잘 조화시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형태로 꽃피우게 하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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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송우혜,『윤동주 평전』, 195.
64) 그러나 숭실 중학교는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사회 속에서 교육을 통해 복음 을 전하고 실천하고자하는 입장에서 운영되었으므로 극단적인 근본주의(5)와는 다 른 유형으로 여겨진다.
윤동주는 그동안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를 통하여 싹을 내고 키워왔던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연전에 와서 마음껏 꽃피울 수 있었다. 최현배, 하경덕, 김윤경, 이양하, 손진태, 유억겸, 현제명, 원한경 교수 등은 윤동주에게 지적 도전과 큰 감화를 주었다.
윤동주가 입학할 당시 연전은 다음과 같은 교육방침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있었다.
기독교주의 하에 동서(東西) 고근(高近) 사상의 화충(和衷)으로 문학, 신학, 상업, 수학, 물리학, 화학에 관한 전문교육을 시(施)하야 종교적 정신의 발양(發揚) 으로써 인격도야를 기(期)하며 인격도야로부터 돈실(敦實)한 학구적 성취를 도(圖)하되 학문의 정통에 반(伴)하야 실용능력을 겸비한 인재 배출로써 교육방침을 삼음 65)
연전의 교육 목표의 핵심은 동서(東西) 고근(古近)의 화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하여 동양과 서양, 고대와 근대의 학문과 사상을 조화시켜 높은 학문적인 식견과 실용 능력을 갖춘 인격적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윤동주는 동서 고근의 화충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뼛 속 깊이 새기고 연전에 입학했다. 그의 고향 명동촌의 문화와 맹자를 만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기독교 목사가 된 김약연의 영향을 직접 받은 윤동주는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한 화충을 체득하고 연전에 들어왔다. 연전은 그에게 더 고차원적인 화충의 길을 열어 주었고, 그는 시를 통하여 미학적 차원으로 화충 을 승화시킴으로 시대와 문화의 경계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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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1932년『연희전문학교상황보고서』의 내용임. 김석득, “조선학의 요람, 연전 문과,” 연세의 발전과 한국사회 편찬위원회 편,『연세의 발전과 한국사회』(서울: 연 세대학교 출판부, 2005), 44.; 연전시절의 윤동주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많이 인용함: 이대성, “연세학풍이 피운 꽃, 윤동주.”
또한 연전의 기독교는 초교파적이고 초교회적인 넓은 지평을 갖고 있었다. 연전의 기독교 정신은 그 설립과정이나 운영에 있어서 초교파적이었다. 66) 연전의 기독교 정신은 또한 초교회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를 가르치는 것이 어떤 특정 교파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에 나가 일할 기독교적인 덕목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67) 교단과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고를 하면서 교회 밖에도 익명의 기독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유연한 관점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에 관심을 두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교수나 학생을 뽑을 때도 기독교 신자 여부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교회 안”과 “교회 밖”의 구분을 넘어서는 진 보적이고 포용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왔다. 68) 연전에 입학한 학생은 채플에 의 무적으로 참석해야 했고 성경과목을 매 학년 수강해야 했지만 연전의 기독교적 분위기는 개종을 강요하거나 억압적이지 않았다. 69) 이와 같은 특징을 통하여 연전의 기독교 신앙 유형은 개인의 구원과 더불어 민족의 해방도 강조했고, 기독교 밖의 일반 문화도 가치가 있다는 문화적 낙관론을 견지하면서 기독교의 외연을 확장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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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Ibid., 44.; 세브란스의학교는 한 때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라는 교명을 가질 정도로 처음부터 기독교 연합정신에 의해 세워졌다. 박형우, “세브란스의전과 의 학의 토착화,” 연세의 발전과 한국사회 편찬위원회 편, 『연세의 발전과 한국사 회』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103-104.; 특히 에비슨의 모교 캐나다 토론 토 대학에서는 그가 재학하고 교수로 가르치던 시기에 에큐메니칼 정신에 근거한 연합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왜 연세의 기독 교가 초교파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선호, “올리버 알 에비슨 (Olover R. Avision)의 연희전문학교 사역,”「신학논단」 64(2011), 110.
67) 이와 같은 연전의 교육방침은 당시 평양 숭실대학과는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점 이 있다. 숭실은 신학교 예비학교와 같은 성격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교역 자와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준식, “연희전문학교와 근대 학문 의 수용 및 발전,”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근대학문의 형성과 연희전문』(서 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26.; 원한경은 1935년 연전 3대 교장 취임사에서 “우리는 장로교인이나 감리교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나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사업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합니다.” 라고 말했다. 정선이, “연희전문 문과의 교육,”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근대 학문의 형성과 연희전문』(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68.; 이는 마펫 선교사 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대조적인 입장과 관계된다. 최영근, “초기 미국 선교사 언 더우드와 마펫 비교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02), 115.
68) 연세대학교백년사 편찬위원회,『연세대학교 백년사 I 연세통사 (상)』(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168.
이런 기독교적 풍토는 윤동주가 지금까지 접해왔던 기독교의 형태와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연전은 윤동주가 갖고 온 종교적 맹아를 성장시키고 꽃피우게 하는 최적의 여건을 제공했고, 윤동주는 그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통하여 한껏 기독교의 의미를 깊고 넓게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적 상투어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보편화시켰고, 그의 시를 종교 시와 일반시로 나누려는 시도가 무의미할 정도로 기독교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70) 그 결과 윤동주의 시는 종교, 이념, 민족을 초월해 모든 인류의 심금을 울리며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71)
2) 연전의 윤동주가 접한 기독교의 유형
윤동주가 연전에서 접한 기독교를 앞에서 제시한 11가지의 신앙 유형과 관 련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연전의 기독교는 다음의 유형과 관련하여 뚜렷하게 한 쪽에 가까운 입장을 취한다. 72) (1) 황사영 유형과 정하상 유형, (2) 1895년 유형과 1905년 유형, (4) 19세기 이전과 19세기 이후의 선교 유형, (5)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유형, (6) 사도적 기독교와 토착적 기독교 유형, (9) 민족주의적인 기독교와 역사 초월적 기독교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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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연전에서 교수로 가르치다가 1928년 콜롬비아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으로 박사학위 를 취득하고 연전으로 복귀한 피셔 (J.E.Fisher) 교수는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기독교 개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욱 잘 이해하고, 가장 풍 부하고 윤택한 삶을 살도록 하는 요소들을 더욱 잘 제어할 수 있게”하는 것이라 고 강조하며, 기독교 대학에서 종교 교육 외에 인문, 과학, 기술, 예술 등에 관련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대영,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관련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근대학문의 형성과 연희전문』(서 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416.
70) 류양선,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종교적 실존: ‘돌아와 보는 밤’ 분석,”「어문연구」35(2007.6), 169.
71) 이대성, “연세학풍이 피운 꽃, 윤동주,” 216-217.
72) 번호는 앞에서 소개한 순서이고, 각 유형 중 연전에 가까운 입장에 밑줄을 쳤다.
(11) 통합지향적 신앙, 분리지향적 신앙, 변혁지향적 신앙.” 그 외의 유형에 대 해서는 설명을 하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3) 종교-국가 일치 유형과 종교- 국가 분리 유형,”에 대해서는 연전의 기독교는 종교-국가 분리 유형에 속한다. 여기서 국가는 선교사의 본국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 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연전은 “(9) 민족주의적인 기독교”의 입장을 취하여 종교와 국가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았다. “(7) 서북지방, 서울지방, 함경도 지방 기독교 유형”에 대해서는 윤동주 재학시절 연전에 입학한 학생들과 교수들의 출신이 다양한 것을 생각해보면 어느 특별한 지역에 근거한 유형에 속한다고 판단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73) “(8) 하류층의 기독교, 양반층의 기독교, 중산 층의 기독교유형”에 관해서는 윤동주의 재학시절에는 이전의 신분구조가 많이 바뀌었고, 다양한 계층 출신이 학생 교수로 연전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연전의 기독교가 특별히 한 입장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연전에 속한 사람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 속했을 것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 “(10) 문화에 대립하는 기독교, 문화를 변혁하는 기독교, 문화에 속한 기독교 유 형”에 관해서는 연전의 기독교가 문화와 대립하는 기독교 유형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문화를 변혁하는 기독교 유형이 연전의 기독교와 가장 가깝지만,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는 문화에 속한 기독교 유형과도 접근한다. 윤동주 가 기독교적인 상투어를 최대한 줄이면서 기독교적 진리를 시로 표현하려고 했 다면 이는 문화에 속한 기독교 유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IV. 나가는 말
지금까지 기독교가 윤동주에게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생애를 추적해보았다. 윤동주가 기독교를 접한 과정은 한반도 역사의 복잡한 전개 과정 속에서 매우 독특한 조합으로 이루어 졌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식민지 2세들은 대부분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잃어버린 채 일본의 문화에 동화되면서 살고 있었던 시절에 북간도 명동촌과 용정은 당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한민족 고유 문화와 반일 저항정신,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보존되었던 공간이었다. 윤동주는 기독교 대학인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함으로 북간도에서 발아되었던 문학적 역량을 크게 발전시키면서 그의 시적 세계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가지 유형의 기독교 신앙 형태와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볼 때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었던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로, 윤동주가 접한 기독교는 문화에 대해 낙관적이고 개방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는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문화에 대해 비관적 태도를 견지하고, 동양적인 전통을 열등하거나 이교적인 것으로 여기고, 민족에 대한 관심과 문학과 같은 활동을 세속적이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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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위에서 언급한 연희와 숭실의 교육철학의 대조를 서울과 서북지방 유형의 대조와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전자는 선교사들의 입장과 연관이 있고, 후자는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인의 지역과 관련된다.
둘째로, 구원에 대해서, 윤동주가 접했던 기독교는 개인의 영혼 구원과 함께 사회적 구원도 강조했다. 김약연의 경우 시간적인 순서로 볼 때 먼저 관심을 두 었던 것은 민족의 구원이었고 그 후에 개인 영혼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는 것을 앞에서 확인하였는데, 이는 명동촌에서 기독교인이 된 대다수의 사람 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연전의 기독교적 민족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이 해할 수 있다.
셋째로, 선교와 관련하여,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었던 기독교는 교회의 선교 (Missio Ecclesiae)보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경향을 띠었다. 74) 교파 의 장벽 뿐 아니라 교회의 범주도 뛰어 넘는다는 점에서 매우 포용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김약연의 선교 활동의 관심은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을 늘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연전의 교육도 신학이 아니라 모든 학문 속에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진리가 담겨있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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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마펫은 Missio Ecclesiae의 선교 신학을, 언더우드는 Mission Dei의 선교 신학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최영근, “초기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마펫 비교 연 구,” 57-58.
넷째로, 교회에 대해서, 윤동주가 접한 기독교는 에큐메니칼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교회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고 다른 교파나 세상과 고립된 채 새로운 개종자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기독교의 모습은 윤동주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시인으로서의 윤동주를 성숙시킨 연전은 창립 때부터 교단 간의 협력을 강조하여 왔다.
다섯째로, 성경에 대해서, 윤동주는 축자영감설보다는 좀더 유연한 방식으 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기독교의 분위기와 많이 접촉했다. 축자영감설의 한계를 강하게 지적했던 김재준은 윤동주가 졸업하고 2년 후인 1937년에 은진 중학교의 교목으로 부임하게 되어서 윤동주가 직접 김재준에게 배울 기회는 없 었지만, 김재준을 발탁한 김약연이 김재준의 성서관을 충분히 수용한 것으로 간주해볼 때, 김약연의 영향을 받은 윤동주의 성서관이 축자영감설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은 합당하다. 윤동주는 자유스러운 기독교 분위기의 연전에서 성서 과목을 4년 동안 수강하면서 성서에 대한 다양한 비평에 대해 배웠을 것이고 이를 통해 서서히 축자영감설의 한계를 넘어서는 성서관을 수립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윤동주의 시에는 수많은 성서적 소재와 주제가 등장하 는데, 축자영감설을 수용한 상태에서는 기도나 간증류의 신앙시 이외의 다른 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가 유연한 성서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다양한 유형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런 다양한 유형의 조합이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였는지 를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하여 살펴보았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 모두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는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한국의 근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수많은 요소들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낸 매우 구체적이고 특 수한 형태의 신앙 체험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윤동주의 시가 기독교적인 핵은 유지하면서 종교와 민족과 시대의 경계를 초월하여 두루 넓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체험한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의 유형으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기독교상을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의 유형을 살펴본 것은 오늘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오고 대부분을 기독교학교에 다닌 윤동주는 오늘날 교회에서 만나게 되는 기독청년의 모습이다. 평범한 모범적 기독청년 윤동주가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된 데는 그가 자라면서 접한 기독교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기를 장려하는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훌륭한 목회자와 선생님의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그들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가 갖고 있었던 문학적 소양은 이런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무르익고 개화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윤동주가 위대한 시인이 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오늘의 한국 교회에 실천신학적인 중요한 도전을 준다. 그 어려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가 윤동주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을 생각해 볼 때, 오늘의 자유스러운 외적인 조건 하에서 기독교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비관론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는 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의 특징을 연구하고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발전시켜 적용해보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요약한 기독교적 특징, 즉 문화 적 낙관론, 사회적 구원에 대한 관심, 하나님의 선교적 접근, 에큐메니칼적인 유대, 유연한 성서관은 오늘날도 중요하게 여겨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과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앞둔 이 시점은 설교, 전도, 선교, 교육, 상담, 지역사회 참여, 사회적 정의 실현 등 여러 목회의 영역을 통해 기독교가 어떻게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윤동주라는 인물을 배출한 한국 기독교의 전통을 상기하면서 오늘의 기독교도 제2, 제3의 윤동주를 길러낼 수 있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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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
What Types of Christianity Influenced Yun Don-ju?
-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Faith and Practice -
Lee, Dae-Sung
Yun Dong-ju is one of the most favorite poets among Korean people. There is increasing academic interest in his life and his poetry. Most researches on Yun acknowledge that he is a Christian and his poems carry Christian ideals. They agree that Christianity has great influence on Yun. But most of these researches have one serious flaw: they don’t ask what types of Christianity influenced Yun. When we consider that many of Yun’s poems were written while he was struggling to apply his faith into practice in difficult situations, it is important to analyse various types of Christianity Yun encountered.
Just as any other religions, Christianity is experienced in a specific historical context. The concrete ways how people meet Christianity are diverse. Particularly the time period of Yun’s life was filled with various types of Christian faith which cannot be found in any other places. If we rely on the definition of Christianity from a popular encyclopedia, or if we take today’s common view of Christianity, we cannot discern the profound influence of Christianity on Yun’s poems. We have to carefully examine what different kinds of Christianity influenced Yun in different stages of his growth as a poet and as a Christian. Particularly we have to pay attention to the relationship between faith and practice.
This study takes a multi-disciplinary approach incorporating the fields of Practical Theology, Systematic Theology, and Church History. Through this
analysis, we will discover that Yun was exposed to diverse types of Christianity in his life. And we will argue that the greatness of Yun’s poetry comes from his ability to compose a unique image of Christianity from these various types. In this image, Yun could maintain the essential core of Christian faith while communicating with people from other religious, national, and historical backgrounds.
Key Words
Faith and Practice; Yun Dong-ju; Christian Poetry; North Jiandao; Korean Early Church History; Typology of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