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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기도

[마음의길]백 번의 기계적 예배와 마음의 주의

작성자nari|작성시간26.06.06|조회수28 목록 댓글 8

신시아 부조 《마음의 길: 향심기도와 깨어나기》

제4부, 향심기도와 깨어나기

11장, 마음에 주의를 기울임, 173쪽

"마음의 주의"

 

"마음의 주의"라는 말은 10세기 말 그리스 정교회의 영적 스승인 신 신학자 시메온Simeon the Neq Theologian에게서 왔다. 이상하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주의집중과 기도의 세 가지 형태들"(Three Forms of Attention and Prayer)이라는 그의 소론은 향심기도가 더 넓은 그리스도교의 내적 기도 전통에 자리 잡는 데, 또한 향심기도가 혁신적이지만 전적으로 정통적인 출발점에 서 있음을 입증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시메온은 당대뿐만이 아니라 어떤 시대라도 가장 뛰어난 영성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949-1022)는 정확하게 천 년 전이지만, 그가 고심했던 주제들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본질상, 시메온은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식적인 현존의 차원을 주장한다. 이것은 많은 신학적인 논쟁에서 그를 잘못된 편에 올려놓았다. 예를 들어, 그가 사제가 주의를 두는attention of priest 특질이 미사의 유효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던 것을 보자. 그것은 신적 은총을 인간의 행동에 의존시키게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 신학적으로는 방어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사실 경험적으로는 확실히 타당하다. 사제가 하루에 여섯 번의 미사를 기계적으로 빠르게 드리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유효한지 몰라도, 본질적인 요소는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 현존, 혹은 시메온이 말한 "마음의 주의"는 한 존재의 모든 수준에 충분히 참여하는, 즉 하나님과 현재의 상황 둘 다에 생생하고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능력이다.

 

시메온은 마음의 주의를 발달시키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지복을 완성하는 데 충분한 내적 힘을 얻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 그의 통찰을 해석하자면, 시메온은 분명히 일상적 알아차림 자체는 복음을 실행하는 데 무력하다고 본다. 단지 정신이 영적 알아차림이라는 더 깊은 샘물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마음 안에"in the heart 있을 때만 위선과 탈진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 수 있다. 복음은 염려와 두려움에 지배 받는 에고의 능력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개방과 자비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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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그린 | 작성시간 26.06.06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눈물'과 '빛'으로 만나는 것!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게 보이려고'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내면서 에고에 휘둘리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진짜 삶을 살게 해주세요. 생생하게요.
  • 작성자하루 | 작성시간 26.06.06 '복음은 염려와 두려움에 지배 받는 에고의 능력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개방과 자비를 요구한다.'
    어젯밤 꿈여정에서 어렸을 적부터 엄마를 염려하고 아빠를 두려워했던 나, 그것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집밖으로 나가려 무던히 애썼던 나를 만났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패턴은 계속되었고요.
    위선과 탈진 없이 주님께, 내 일상에 온전히 참여하고 싶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 작성자피오나 | 작성시간 26.06.06 “생각이나 정신의 주의가 아니라 "마음의 주의"를 일깨우는 훈련을 위한 기도”
    에고의 작용이 어떤 것인지 배웁니다. 마음의 주의를 일깨우는 훈련을 위한 기도. 기도합니다.💛
  • 작성자새해 | 작성시간 26.06.06 "더 깊은 샘물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마음 안에"in the heart 있을 때만 위선과 탈진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 수 있다" 이 문장에 마음이 머무네요. 위선과 탈진 없이.
  • 작성자새로운 길 | 작성시간 26.06.08 교회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하기 전에 시편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어려워 참석을 꺼려합니다. 저도 어렵습니다. 음을 따라 부르기도 어렵고, 낯설지만 저는 그냥 그 시간에 앉아 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어떤 의미 보다 제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 here and now - 기도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혹, 제 분별이 잘못 되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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