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곳에서 '신앙 사춘기 너머' 북클럽을 진행하게 되어서
SNS에 홍보글을 적어보려다가 엉뚱한 글을 쓰게 되었어요ㅎㅎ
제가 자주 그러합니다.
이곳에도 살짝 공유해 봅니다.
신실쌤뿐 아니라 저의 선생님들께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 올해는 특히 더욱 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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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선생님 (다소 긴 글)
정신실 선생님을 처음 뵌 건 2015년 2월 제주에서였다. 선생님은 예지가 일하던 청소년 갭이어 프로그램 ‘꽃다운 친구들’의 학부모님이셨는데, 다른 일정으로 제주에 오셨다가 같이 뵙게 되었다. 방주교회 카페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콩국수로 유명한 ‘남춘 식당에서’ 같이 점심도 먹었다. 그날 나는 깊이 절망한 상태였다. 오래 바라왔던 일이 무산되었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선생님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화창했던 그날의 날씨와 반쯤 넋이 나가 있던 내 마음속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2020년에 선생님을 다시 뵈었다. 그때는 (당시 ‘정신실 마음성장연구소’였던) 루아 영성심리연구소의 프로그램인 ‘에니어그램과 내적 여정’의 진행자와 참여자로 만났다. 처음 그 프로그램에 관해 들었을 땐 다소 시큰둥했다. 에니어그램은 신대원 다닐 때 학교 상담소에서 검사를 받았던 경험이 전부였고, 그 경험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사람의 성격을 유형으로 나누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던 데다, 기독교 영성과도 일부러 거리를 두며 지냈다.
나에겐 당장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를 쓰는 일, 그리고 첫 시집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준비했던 원고가 출판사 심사에서 탈락했다. 처음 투고 제의를 받았을 땐 정말이지 될 줄 알았다. 그것만 바라보면서 1년이 넘는 시간을 시집 한 권 분량인 50편을 만드는데 할애했다. 투고 후 몇 달 뒤에 돌아온 반려 메일은 냉정했다. “신인들을 떠올려 봤을 때, 저마다의 시에는 각자의 인장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시인의 경우 그 인장이 뚜렷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 문장을 읽어나가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여기까지구나 싶어서.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그 시기에 ‘에니어그램과 내적 여정’의 문을 두드렸던 것 같다. 더는 쓸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든 감당해보고 싶어서 뭐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찾아갔다. 모임은 따뜻했고 신실쌤 강의는 재밌었다. 저 많은 유형 중 나는 무엇일까에 대해선 감이 오지 않았지만 흥미롭게 관찰하며 들었다. 내가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은 “감정에는 윤리가 없다”는 문장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그전까지 나는 기독교 모임에서 저런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동일한 표현을 기독교 울타리 바깥에서 듣는 것과 안에서 듣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저 문장에 기댄 채 나의 기억, 기억 너머의 과거, 잊었던 감정들을 유유히 흘러 다니며 모든 과정을 수강했다. 즐거운 대화 속에서 내가 가장 겁내고 있었던 것들, 도저히 솔직해질 수 없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볼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처음 시쓰기 수업을 듣던 날들이 떠올랐다. 근사한 시를 쓰고 싶어서 여러 노력을 기울였었다. 꽤 괜찮아 보이는 비유를 시도해 보기도 했고, 평소의 나보다 위악적인 화자를 내세워 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 선생님은 나에게 늘 용기가 부족하다고 하셨다. “풍관씨는 시에서 자기 자신을 너무 지키려고 하는 것 같아요.” 나는 한 학기 내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시에게 졌다는 생각만 안고 종강을 맞았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선생님의 말을 이해했다. 나는 내가 너무 아까워서 나를 버리지 못했다. 내가 멋있는 사람으로 비춰지길 갈망해서 나의 결핍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은 채, 보고 있는 척만 했던 거였다. 그런 모습을 시창작 수업에서는 포즈만 잡는다고 말했다.
내 안의 형편없는 진실을 보는 행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진실을 포장하지 않고 드러내는 행위에는 조금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성장하면서 그런 용기를 배우지 못했다. 나를 둘러싼 신앙의 언어들, 삶의 모든 영역을 설명하겠다는 듯한 그 촘촘하게 정답인 언어들이, 내가 나의 몸으로 부딪히며 생의 용기를 배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끈질기게 가로막았다. 신학을 배우며 다양한 질문과 어휘를 습득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닌 척했고 아니길 바랐지만 내 안에는 한국교회가 여전히 너무 많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고 나 또한 20대 내내 비판적으로 따져 물었던 한국교회의 문제들이 더 촘촘하고 교묘한 형태로 내면화되어 있었다.
시를 쓰면서 그것을 들켰다. 시 쓰기 교실에서는 단 몇 문장 속에서도 화자의 기만이 탄로나는 경우가 잦았다. 선생님은 지금 이 시인이 시적 대상을 내려다보는지 아닌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지 아니면 타인을 충분히 응시하고 있는지가 다 보인다고 하셨다. 시와 시적인 문장은 달랐다. 아무리 시적인 문장이어도 우리 자신의 감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소용 없었다. 그게 너무 신기했다. 쉬운 연민과 빠른 교훈, 적당한 결론 모두가 모두에게 거추장스러워질 때까지 합평을 거듭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는데 성공한 수강생들의 문장은 기운이 달랐다. 그가 쓴 시 안에는 지난 시간과는 다른 사람이 살아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시가 너무 좋았고, 시 선생님이 좋았고, 나도 시로써, 시를 쓰는 행위로써 그곳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금세 이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출판사로부터 받은 반려 메일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는 안 돼.” 그렇구나 생각했다. 내 문장에는 나만의 인장이 없었으니까.
‘에니어그램과 내적 여정’은 나에게 다른 말을 들려주었다. 인장이 없어도 괜찮다고. 고유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런 말들을 끊임없이, 전방위로 말해주었다. 정신실 선생님은 매 시간마다 나 자신의 누추함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부지런히 마련해 주셨다. 내가 나의 결핍을 응시할 수 있도록 유쾌하고 사려깊게 등 떠밀어 주셨다. 그것이 나에겐 시 수업 바깥에서 누렸던 시적 경험이었다. 나에게도 기도가 가능하다는 걸 처음으로 발견한 계기이기도 했다.
좋은 시란 뭘까. 새롭고 세련된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라고 배웠다. 이 세상과 타자를, 눈앞의 사물들을,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을 뚫어지게 볼 수 있는 용기가 좋은 시를 이룬다고 배웠다. 나는 나의 결핍을 잘 보고 싶다. 나의 어쩔 수 없는 누추함과, 그 어떤 노력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불안을 반가운 증상처럼, 친구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싶다. 그래야만 간신히 숨을 쉬며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줌에 불과하더라도 나만의 용기를 내 손에 쥐여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정신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내가 세상에 없던 시절부터 자라 온 누군가의 용기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 같다. 그 용기를 무작정 동경하고 선망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자라게 했던 상실과 여전히 들끓는 결핍의 자리를 함께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러고 나면 나도 나만의 여정을 내디딜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시 선생님을 뵙고 돌아올 때마다 내 시를 쓰고 싶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