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일 먼저 사라진 난지도(蘭芝島)
난지도는 본격 매립 이전 사라진 섬으로 경서동의 서단(西端)인 금산의 정북 300m에 놓여 있었다. 난지도에 대한 옛 문헌 기록으로 주목할 것은 1789년(정조 13)에 간행한 『호구총수』이다. 이 책은 당시 전국 인구분포 상황을 부·군·방·계·면 등 행정조직별로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녀 인구 수까지 기재했고, 방리의 명칭을 부기해 이 시기의 인구사 연구와 지방행정 조직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의 부평부 모월곶면에 난지도(蘭芝島) 지명이 실려 있다.
한약재의 명약 난지초(蘭芝草)가 자생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난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난지염’의 음운변화이다. 사멸된 우리말에 ‘염’이라는 것은 바위로 된 작은 섬이라는 단어였다.
뭍에서 가까워 경서동의 한 마을로 여겨져 왔다. 형체는 몸을 크게 편 해파리 같은 모습이었다. 금산과의 사이에는 큰 갯골이 하나 있어 밀물이 들어찼을 때는 건너가지 못했다. 뭍과 워낙 가까운데다 간척사업을 하면서 만든 방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육지화되었다. 현재는 인천공항고속도로가 난지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놓여 있다.
인천 서구 섬들의 정확한 좌표 기록이 있다. 아버님 회고에 의하면 서곶출장소장으로 계시던 1960년 정부는 일제가 1910년대 초반 근대식 삼각측량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하며 모든 지명을 한자로만 적은지라 재래지명을 회복할 겸 행정의 정확을 기하기 위해 대대적인 지명조사를 명령했다. 서곶출장소도 아버님 지휘로 현지출장으로 지명을 확인하고 정확한 지명을 적어 올렸다. 그것은 1961년 4월 21일 국무원고시 제16호로 『표준 지명 사용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책자로 제작되어 정부의 관보로 발간되었다. 난지도는 동경 126도 38분, 북위 37도 33분이다.
기록된 난지도 관련 스토리텔링 자료 중 가장 오랜 것은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1418년 6월 계양산 경명현에서 매사냥을 하고 난지도 앞바다에서 낚시하며 3일을 놀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아우가 자신보다 영특하여 장자 상속을 비켜가 왕위에 올랐다면 그 형인 대군은 소리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법, 양녕대군로서는 매사냥도 하고 바다낚시도 하는 서곶이 더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 일 외에 난지도가 세상의 눈을 끌 일을 없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 원창동, 청라도, 난지도에 정부 양곡을 보관하는 전조창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크게 주목할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열강의 군함들이 인천 앞바다에 출현하는 일이 일어났다. 난지도 관련기록도 있다. 강화 교동현감 등의 보고서이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몇 달 전 일이다.
고종 3년 8월 14일(庚子) 이 날 아침에 「프랑스」국 군함 「데루레드」호는 인천부 (仁川府) 제물포 팔미도 외양(外洋)으로 향하여 수원부(水原府) 풍도(楓島) 외양에 정박 중 인 요함(僚艦) 「프리모게」 및 「타루디프」호 등과 합류하다. 잠시 후 다시 팔미도 앞 바다를 거쳐 부평 경내에 들어와 강화부(江華府)를 향하여 북상하다. 이 때「프리모게」 호는 난지내서(草芝內嶼)에 머물다가 다시 난지도 전양(前洋)에 정박하다.
고종12년 1875년 8월 21일에는 운요호(雲楊號) 사건 때 일본군함이 난지도 옆을 거쳐 한강을 타고 북상, 22일 중앙에 보고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병인양요와 운요호 사건, 두 사건이 즉시 보고된 것을 보면 간이봉수라도 있었을 것 같다.
난지도는 지대가 낮아 아닐 것이고 필자는 최단거리 육지인 금산으로 본다. 금산은 범머리산 혹은 호두산(虎頭山)이라고도 불렀다. 원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금산에 망루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봉수는 국내의 전체 봉수를 계통적으로 집성한 『한국의 성곽과 봉수. 상.중.하』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양선 침범을 보고 받기 위한 연변봉수(沿邊烽燧)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연변봉수란 국경선이나 해륙 연변에 제1선을 설치하여 기점 구실을 하였다. 통신이외에 국경의 초소와 수비대 기능도 가졌다.
또 다른 기록을 보자. 10여 년 뒤인 1887년 11월 25일 난지도의 전조창에서 한양으로 운송하는 세곡의 분실과 도난이 자꾸 일어났다. 조정은 부평부사 조병하(趙秉河)를 토포사(討捕使)로 임명했다. 그 시기는 고종 24년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민란이 일어나던 시기, 배가 고픈 우리 고장 선조들이 조금 훔쳤는지, 해적들이 본격적으로 훔쳤는지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본다.
그렇게 조선 후기가 지나가고 세곡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폐지되자 난지도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필자가 기억하는 40~50년 전에는 30여 가구가 어업으로 삶을 영위하였다. 남자들이 잡아온 어획물들을 아낙네들이 머리에 이고 서곶 12개 마을을 돌며 곡식으로 바꿔 갔다. 어획량이 많지 않아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초등학교 동창들 중 그곳에 사는 친구가 여럿이었는데 납부금을 내지 못해 집으로 쫓겨가곤 했다.
난지도는 그 후 돈 많은 사람들이 간척사업을 하면서 경서동 사이의 갯벌을 메워 논으로 만들자 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서곶의 섬들 중 가정 먼저 육지화되었다.
다시 부활시킬 만한 문화 콘텐츠로 풍어제를 겸한 도당굿이 있었다. 도당굿은 단순히 말하면 샤머니즘이지만 지난날 서곶 지방이 가진 마을제였다. 인접한 경서동 연희동 등의 도당굿이 추수감사제 성격을 가진 데 비해 난지도는 풍어를 기원하는 성격이 강했다. 경서동에는 북서곶 6개 동의 무속을 관장하는 이 씨 부자(父子) 무당이 있었고 난점 도당굿도 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소나무 숲에서 용왕에게 어선의 무사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도당 굿은 일부 선주들에 의해 당고사 정도로 축소되었다가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