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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원규의 서재

인천 서곶의 섬 2 이명수방죽과 사렴 까투렴

작성자이원규|작성시간17.02.19|조회수286 목록 댓글 0


2. 이명수방죽과 사도(蛇島), 까투렴

 

사도는 사렴 또는 뱀섬이라고도 불렀다. 경서동의 서단인 금산에서 남쪽으로 700m, 연희동 용의머리 반도의 서단에서 북서서 800m에 자리잡고 있던 섬이었다. 오른쪽 끝은 남동동으로, 왼쪽 끝은 북서서로 길게 누운 섬이었다. 뱀이 유난히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 40~50년 전 그 곳에서 백사(白蛇)가 여러 마리 잡혀, 땅꾼들이 드나들었다.

 

필자의 고향 마을 연희동에서는 뭍의 끝 용의머리산(용두산)에서 보면 좁은 우측면이 보여 작은 섬 같지만 경서동에서 달랐다. 중학교 다닐 무렵 여름방학에 경서동 사는 친구들을 찾아 놀러 가면 금산에 가곤 했다. 친구네 원두막에서 가까이 보이는데 연희동에서와 달리 꽤 넓어 보였다.

 

저 섬까지 둑을 막는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농토가 생기겠지. 그러나 물살이 빨라 못한다. 노인들 말씀을 들으면 여러 번 둑을 막으려다가 실패했대.”

 

경서동 친구들이 말했다. 그러니까 경서동 주민들은 매립시도를 한 것 같다. 그 마을은 인접한 연희동이나 백석동보다 논이 적어 가난했으니까 그런 꿈을 가졌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연희동에서나 금산에서나 뱀섬 사이의 물살이 빨라 둑을 쌓기는커녕 배가 다니기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서곶의 대부분의 섬이 그랬듯이 뱀섬은 썰물 때 뭍에서 걸어 나갈 수 있었으나 경작지도 적고 밀물 때 물살이 빨라 배를 대기 어려웠다. 그래서 민가가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필자가 인천고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데 중반, 토박이 서곶 사람들은 꿈으로만 꾸던 금산 앞바다 매립이 시작되었다. 외지 사람인 김옥창이었다. 이분은 서곶의 역사, 청라도의 연혁, 나아가 인천의 인물로 중요한 사람이다.

 

이분은 남해에서 포경업과 어업으로 번 돈을 서곶 앞바다 매립에 쏟아 부었다. 저절로 경서동과 연희동 사람들이 그에게서 노임을 받고 둑을 막는 공사에 참여했다. 그의 목표는 청라도까지 갯벌을 매립해 수백만 평의 농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첫 공사는 경서동 금산에서 뱀섬의 서단까지, 섬 동단에서 다시 경서동으로 두 개의 둑을 쌓는 일이었다. 위에서 말한 바대로 이곳은 밀물 썰물 때 물살이 빨라 난공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사는 진척이 되어 뱀섬까지 둑이 이어졌다. 경서동 출신인 가까운 친구 추태일 형의 회고에 의하면 그 후 둑은 바로 북쪽의 섬 까투렴으로 뻗어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곳 방죽을 경서동과 연희동 사람들은이명수방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명수라는 분이 사업권을 넘겨받았던 것이다. 군사정부에서 막 정부가 민간에 이양된 시기에 정치 줄을 잡고 비상한 수단가로 알려진 이명수 사장이 어떤 절차로 김옥창 씨에게 보상을 하고 넘겨받았는지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명수 씨는 군의 공병장비를 끌어와 투입하고 미국 정부의 잉여농산물을 방죽 공사의 노임으로 풀어 경서동과 연희동 주민들이 굶주림을 면했던 건 것은 사실이다

 

김옥창 사장과 이명수 사장, 필자가 인천시사편찬위원회의인천 인물 아카이브작업의 부평, 계양, 서구, 검단 출신 인물들의 발굴을 맡아 집필하고 있으므로 이미 작성한 원고를 옮기면 이렇다.

   

김옥창(金玉昌 1918-2005)

전남 신안군 신안면 비금도 출생이다. 목포보통학교 4학년 때 지역유지이던 부친이 일   본인들의 강압으로 파산하고 흑산도로 이주하자 그곳에 있던 일본수산회사 지사 사환으로 일했다. 그 후 정식직원이 되고 본사가 있는 일본으로 가서 오사카(大阪)상업학교 야간부를 졸업하고 회사 포경부(捕鯨部)에서 8년간 일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중고 포경 어선 2척을 수입해 조선포경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울 진 장생포에서 한국 포경산업을 개척했다. 그해 416일 처음으로 작살을 사용해 고 래를 잡고 인천의 철강회사에 발주해 포경포를 장착했다. 120여 마리의 고래를 잡는 등 포경업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나 경남 출신 정치가의 강압으로 사업권을 놓쳤다.

이후 1949년에 서울에서 공동어업이라는 어업회사를 경영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인천 서구로 와서 청라도 갯벌 매립공사를 시작했다. 1964년 천해개발공사 대표로서 청 라도까지의 공유수면 매립사업권을 받았으나 당시 공화당 영등포을 지구당위원장이던 이명수가 구호양곡과 물자를 지원 받는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동업계약을 맺었다. 그 후 사 업에서 손을 떼었다. 뒷날 이명수 방죽으로 불리게 된 매립사업이 오늘의 청라 국제도시 개발의 시작이었으므로 그는 개척자로서의 업적이 있다.

   

이명수(李明洙 1919-1971)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청년기 삶은 알 수 없다 1964년 여당인 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 원에 출마한 기록이 있다. 1959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성광공민학교를 모태로 학교법인 봉덕학원을 설립했다. 그해 2월 봉영여자중학교를, 1961년 봉영여자상업고등학교(현 영상 고등학교)를 개교해 운영했다.

 이 학원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자녀와 전쟁고아의 육성사업을 하면서 미군 제 76공 병대의 지원을 받아 교사를 신축하고 부대의 잔반을 받아 양돈사업을 펼쳐 교직원 인건비 등 학교재정을 충당했다.

그는 민간단체의 물품을 지원 받아 영세민들에게 배분하는 난민구호사업도 펼쳤다. 그 것의 일환으로 청라도로 눈을 돌렸다. 노역자에게 밀가루를 배급하는 난민 정착사업과 자 조근로사업장인 청라도 앞바다 매립사업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1964년 천해개발공사(대표 김옥창)이 신청한 청라도 매립사업권을 놓고 동업계약을 맺 고 회사대표가 되었다. 당시 공화당 영등포을 지구당위원장이던 그가 구호양곡과 물자를 지원 받는다는 조건에서였다.

그는 경서동의 금산-장도-일도-청라도-문점도-장금도-소도를 잇는 7,800미터의 방조 제를 쌓는 공사에 착수했다. 갯골이 있는 장도-일도, 청라도-문점도, 문점도-장금도 사이 둑이 자주 무너져 난공사가 이어졌다. 서곶 사람들은 이곳을 이명수방죽이라 불렀다.

준공을 눈앞에 둔 197012월 갯벌이 공업지구로 변경되어 도로 배수시설 및 해밯 10m 높이로 추가 매립하라는 건설부의 명령을 받았다. 결국 매립권을 동아건설에 넘겨주 었고 서구 앞바다 매립에서 손을 떼었다. 그가 경서동 주민들에게 약속한 내용, 즉 공사 에 참여하여 노동력을 제공한 청라도와 경서동의 주민들에게 1정보씩 분배하기로 한 약 속은 폐기되었다.

그는 아내 이봉덕(李鳳德 1921-2010)을 앞세워 교육사업을 펼쳤다. 1952년 학교법인 봉덕학원을 설립해 서울에서 그가 사망한 후에는 양천여자고등학교(현 양천고등학교)와 자립형사립학교인 한가람고등학교도 설립했다. 그리고 봉덕학원은 2008년 청라지구에 Dalton외국어학교를 설립했다.

 

두 분을 사도 설명 글에서 소개한 것은 그들의 노력으로 제일 먼저 뭍이 된 것이 이 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청라국제도시가 들어앉은 청라도를 포함한 광대한 매립지가 두 분 주도와 경서동, 연희동, 그리고 청라도 사람들의 혼신의 노력으로 상당 부분 매립되었고, 동아건설이 시공한 것은 그것을 확장해간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천 서구의 광대한 갯벌이 모두 동아건설에 의해 매립된 걸로 단순히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뭍과 가까운 여러 섬들이 이미 두 분에 의해 뭍으로 바뀌었다.

 

기호일보는 금년(2016년)에 들어 여러 차례 청라매립지 사업 관련 보도를 했다. 그 중에는 경서동 사람들이 매립이 완공되면 3,000평씩 나눠준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완공 전 동아건설에 넘기는 바람에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내용도 있다. 오래 전에 필자도 잘 아는 선배인 경서동의 김 아무개 선배가 동아건설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을 거라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인천을 대표하는 대기업가 한 분이 청라매립지 앞을 차로 지나다가 동승한 필자도 아는 지인에게 저기 내 땅도 있네라고 말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일개 소설쟁이니까 그런 풍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금싸래기같이 비싼 청라국제도시, 그 곳을 지날 때면 어린시절 푸르게 보이던 청라도의 모습이 떠오른다

   

김옥창 이명수 두 분의 주도에 의해 처음 뭍으로 변한 사도까지의 갯벌은 지금 서부공업단지(옛 명칭 주물단지)이다. 사도의 1961년 관보 좌표는 동경 12638, 북위 3732분이었다.

 

까투렴은 한자 지명이 자치도(雌雉島)였다. 꿩이 많아서 붙은 이름으로 짐작된다. 뱀섬보다 서쪽에 놓였던 섬이다. 이곳도 이명수방죽으로 연결되어 뭍이 되었다. 1961년 관보의 좌표는 동경 12638, 북위 3731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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