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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등단작

기정옥 <즐거운 세탁소> (2003년 [경인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작성자이원규|작성시간04.03.29|조회수397 목록 댓글 0
 

즐거운 세탁소

                                                                           

  대문을 연다. 거친 바람이 달려든다. 흙먼지가 날린다. 도시의 외곽지역인 이 곳은 산과 가까워서인지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거칠게 불어댄다. 문을 닫고 절뚝거리며 신작로를 걷는다. 신작로 옆의 논에는 벌써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군데군데 이미 벼를 베어 낸 곳도 있다. 참새들이 논바닥에 앉아서 종종대거나 벼이삭 위를 맴돌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와 깡통소리에 놀라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논 곳곳에 서 있는 허수아비들이 바람살에 몸을 뒤흔든다. 입고 있는 각양각색의 옷들도 바람에 펄럭인다. 간혹 허수아비의 머리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깜찍한 참새들도 있다. 

  윗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목이 칼칼하다. 가래침을 돋우어 바닥에 뱉는다. 신작로를 빠져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비닐과 종이 조각들이 흙먼지와 함께 바람에 날린다. 저만치 버스가 오는 것이 보인다. 차가 정류장 앞에 선다. 나는 버스에 올라탄다. 

  바지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다. 셔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물쇠를 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주워서 옆구리에 끼고 셔터를 위로 밀어 올린다. 쇳소리를 내며 셔터가 밀려 올라간다. 출입문을 연다. 가지고 들어온 신문을 인체 프레스기 뒤켠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건조한 바람이 유리문에 부딪치더니 맞은편 건물의 희망 컴퓨터대리점 쪽으로 내달린다. 재봉틀 위에 신문지 반 장 만한 햇빛이 창백한 얼굴로 떠 있다. 실내엔 솔벤트 냄새가 배여 있다. 뒷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출입문도 열어 놓는다. 통유리 앞에 졸졸이 서 있는 선인장 화분들을 마른 바람이 와서 핥고 간다. 아내도 저 선인장 화분들처럼 어딘가에서 날마다 흙먼지를 한 움큼씩 삼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제 저녁 무렵에 미처 다 하지 못한 아이롱을 끝마쳐야 한다. 나는 인체 프레스기에 전원을 넣는다. 벗어놓은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보일러 쪽으로 걸어간다. 옷걸이에서 고동색 양복 상의를 벗겨 프레스기에 걸친다. 스팀이 나온다. 곧이어 바람이 나오기 시작하고 프레스기 위에서 구겨졌던 양복이 서서히 팽창한다. 담배연기를 다시 한번 빨아들인다. 한 손으로 양복 상의를 벗겨낸다. 벗겨낸 상의를 바큠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흰색 와이셔츠를 다시 프레스기에 걸친다. 와이셔츠가 팽창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 남아 있는 담뱃불을 재떨이에 눌러서 끈다.

  희망 컴퓨터 대리점의 김 사장 와이셔츠다. 종종 이 곳에 맡길 적마다 홀아비인 그의 누렇게 뜬 얼굴처럼 셔츠도 군데군데가 싯누렇게 변색되어 있다. 그만 다른 것으로 사입으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는 꼭 이 옷을 고집해서 입곤 했다. 오래 전에 그가 커피를 마시면서 생일 날 아내가 선물로 사주었다고, 아주 비싼 거라고 자랑했던 바로 그 셔츠다. 조금 더 입어도 돼. 아직 입을만해... 이 사람아.

  형광증백제를 사용해서 형광처리를 한 것도 지금이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의 낡고 누렇게 변색된 와이셔츠가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의 퇴색해버린 인생도 덩달아 팽창한다. 인체 프레스기에서 구겨지고 변색해버린 그의 과거가 다림질되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과거를 벗겨 바큠 테이블 위에 놓고 미처 다림질이 덜 된 부분을 다린다.

  김 사장은 한창 사업이 잘 되던 이 년 전 아내와 아이들을 호주로 이민 보냈다. 그는 컴퓨터를 열심히 팔았고 올 초에 대리점을 정리하고 아주 그 곳으로 이민을 가려고 계획했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여자였다. 그녀는 이민 2세와 바람이 났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김 사장은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몹시 괴로워했다. 그러더니 그 동안 비싼 비행기 값 때문에 딱 한 번 밖에 나가지 않았던 호주를 어느 날 갑자기 컴퓨터 속에 새로운 아이콘을 만들듯 순식간에 다녀오더니 그 후에는 그 곳을 한번도 클릭하지 않고 있다. 이혼해달라는 아내의 애원도 뿌리치고 별거를 하고 있는 그는 지금도 아내를 잊지 못하고 있다.

  나도 아직껏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엔 아내를 많이 원망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애써 잊어버리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자식들의 엄마이고 돌이켜보면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 아내도 나에게 이민을 가자고 했다. 아이들은 오뉴월 논의 벼포기처럼 마구 커 가는데 놀이공원 한번 제대로 가 본적이 없다며 툴툴거렸다. 아이들의 교육을 제대로 시킨다는 것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늘어가는 거품 투성이 사교육비 때문에 힘든 일이라고 했다. 난, 어릴 적부터 아이들 손잡고 놀이공원에 다니고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버지를 가진 애가 제일 부러웠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한번 달아나버린 시간들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거지... 아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투정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 즈음의 난 한창 교육기자재 사업 때문에 고전을 하고 있었다. 넉넉한 형편으로 개업 한 것도 아니었고 자금의 흐름도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한 사립학교의 기자재를 입찰할 때 가격을 잘못 상정하는 바람에 많은 손해를 보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납품을 해야했다.  

  그때 아내가 바라던대로 사업을 정리하고 이민을 떠났더라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내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을까. 나는 몹시 잘 나가던 회사에 재투자할 공금을 어느날 밤 포커판에서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나중에야 몹시 후회하듯 가끔 지난 날들을 떠올려 본다.   

  김 사장이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걸어 오는 것이 유리문을 통해 보인다. 그는 아침마다 커피 두 잔을 자신의 가게 앞에 서 있는 자판기에서 빼서 가져오곤 한다. 김 사장이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온다. 나는 웃으며 종이컵을 받아들고 탁자 쪽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한다. 그가 의자에 앉고 나는 프레스기 전원을 끈다. 김 사장은 의자에 앉으며 재봉틀 옆에 차곡차곡 올려진 수선물들을 보며 혀를 찬다.

  “쯧쯧... 이 사람아! 이젠 그만 수선을 제대로 할 사람을 찾아봐...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재봉질이나 제대로 돼? 그래도 저렇게 해내는 걸 보면 정말로 용하지, 용해...”

  그는 내 다리를 건너다보며 혀를 찬다. 나는 빙그레 웃고는 몸을 기우뚱거리며 몇 발짝 걸어서 그의 맞은편 의자에 가 앉는다. 다리가 불편해서 수선은 조금씩 천천히 하고 급한 것은 전문적으로 하는 곳에 의뢰했다. 아내가 돌아오면 저 재봉틀 앞에 아내를 앉히고 싶다. 잘나고 좋은 자리도 아니고, 몸이 약했던 아내는 몹시 힘들어하겠지만 다시 함께 시작하고 싶다. 정말, 그녀만 돌아온다면 열심히 살고 싶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쓰다. 종이컵을 내려놓는다. 김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매일 하다시피 하는 말을 마치 녹음기의 테이프를 돌리듯 또 다시 반복한다.

  “김 사장이나 제발 그 안대 좀 벗어버려요. 이젠 그만 벗을 때도 됐지 않나? 공기가 통해야지 염증도 빨리 낫는다구요. 언제까지 그걸 눈에 대고 다니려고 그래요? 가뜩이나 경기도 좋지 않아 힘이 드는데 눈병인 줄로 오해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도 안 들어오겠어요.”

  김 사장은 머쓱해 하며 종이컵을 내려놓고 건너편의 스타 미용실과 희망 컴퓨터 대리점 쪽을 힐끔 쳐다본다. 그리고는 항상 그렇듯이 안대를 한번 퉁겼다 놓으며 말한다.

  “미스 지와 김 기사가 있는데, 뭘... 어제도 안과에 다녀왔는데 아직까지도 염증기가 조금 남아있다는구만. 내참, 뭐 하는 수 없지.”

  어찌된 일인지 김사장의 눈은 호주에 다녀온 후에 발병해서 아직까지 깔끔하게 낫지 않고 있다. 안대를 떼어내버려야 빨리 낫는다고 얘기를 할 때면, 세상을 반쪽만 믿으라는 팔잔가봐... 라고 중얼거리면서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튼 그는 항상 안대를 하고 다닌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종이컵을 감싸쥔다. 커피 맛은 여전히 씁쓸하다. 김 사장이 한마디 한다.

  “아니, 커피 맛이 왜 이리 써? 이 사람들이 설탕을 넣지 않고 간 거 아냐? 자판기 관리를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쯔쯧...”

  나는 커피가 쓴 것이 아니라 김 사장의 지나가 버린 어제가 이제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은 것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묵묵히 종이컵만 내려다본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니까 컵 밑바닥에 녹다 만 설탕들이 엉겨있다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김 사장이나 나는 저 녹다 만 설탕 같은 내일들을 기다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세월에 안대를 해주고 다림질을 해대며.

  김 사장이 나가자 마자 키가 작고 통통한 남자가 들어온다. 주공 빌라 1동 301호에 사는 남자다. 그의 아내는 우리 세탁소의 단골이다. 여자와 함께 슈퍼에서 산 식료품과 과일을 들고 가던 남자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가게 문을 열고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단골인데 요사이 그녀는 보이지 않고 덩달아 드라이클리닝하는 그의 양복도 줄어들었다. 남자가 이렇게 세탁물을 가져오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저 번에는 회색 면바지의 바지길이를 줄이러 왔었다. 처음 보는 면바지였다.

  그는 검정색 면바지의 허리를 잡고 이 바짓단 좀 줄여주실라요잉. 거기 접어둔 데 까장 줄이면 될 것이요잉... 한다. 남자의 심한 사투리에 그의 아내의 세련된 서울 말씨가 생각난다. 행방이 궁금하다. 사모님께선 어디 가셨나요? 라며 운을 떼 본다. 아, 우리 마누라요?... 담배 있으믄 한 대만 줘 볼라요. 남자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한숨을 쉰다. 사실은 요번에 지가 허던 사업이 잘못되부러서 그만두게 되어부렀네요. 건축 일이라는 거시 점점 사양길이 돼부렀잖소. 아이들까장 시골 엄니헌티 맽겨불고 집사람이 보험회사에 나가고 있잖소, 시방... 한다. 예, 보험회사요.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남자는 다시 한번 담배를 빨아대더니 ...근디,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밖으로 나댕기면 집안 꼴이 안되등만요. 허, 참... 하며 뒷통수를 긁적인다. 나는 웃으며 바지길이를 가늠해본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밖으로 나간다.

  재봉틀 앞에 앉는다. 윗실을 검정색으로 바꾼다. 전원 스위치를 넣는다.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남자의 바지에 초크로 표시를 한다. 사람들은 유난히 길거나 폭이 맞지 않는 바지 같은 현실에 맞춰서 자신을 재단해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초크로 표시한 부분을 가위로 잘라낸다. 잘라낸 바지 길이 만큼이나 그의 희망도 줄어들었을 것만 같다. 어쩌면 그의 잘려 나간 바지 길이 만큼이나 그의 아내의 소망도 조금씩 잘려나가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의 재단되어버린 현실을 재봉틀의 노루발 밑에 끼워 위치를 잡는다. 나는 짧아져버린 그의 소망을 왼쪽 손바닥으로 고정시키고 천천히 재봉틀의 발판을 밟기 시작한다.    

  아이롱을 얼추 끝내놓고 바큠 테이블 옆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소방도로 건너편 금양상가 옆엔 주공빌라 다섯 동이 줄지어 서 있다. 빌라들의 옥상 위에 놓여있는 노란색 물탱크가 선명한 색상을 뿜어내고 있다. 드라이 클리닝 기계 만한 물탱크들 사이사이로 오랜만에 새파랗게 높은 하늘이 각진 얼굴을 내밀고 있다. 군데군데 떠 있는 연한 회색구름을 휘저어 놓으며 새들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바람이 다소 잠잠해진 거리를 느린 걸음걸이로 걷고 있다.

  아이롱을 하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힘들어질 때면 의자에 앉아 쉬기도 한다. 그럴 때면유리문을 통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렇게 무연히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이따금 사람이 아니라 허수아비들이 걸어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허수아비가 아닐까. 추수가 끝나버린 황량한 논에서, 거친 비바람에 몸을 뒤흔드는 허수아비.  

  통유리를 바투 대고 빨간색 스커트를 입은 허수아비가 지나가고 흰색 면바지를 입은 허수아비가 지나간다. 건너편 보도블록엔 검정색 모바지를 입은 허수아비가 분홍색 투피스를 입은 허수아비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검정색 모바지는 폭이 몹시 넓어 보인다. 바짓가랑이가 바람에 나풀댄다. 저 허수아비는 이 도시가 무척 답답한가 보다. 그래서 갑갑증이 나는, 꽉 끼는 쫄쫄이 바지 같은 현실을 넉넉한 폭으로 재단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모바지는 드라이 클리닝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옷감이 줄어들고 상해버리고 만다. 저 분홍빛 투피스는 100% 순면이 아니다. 혼방직물이다. 아마도 순면 50%와 폴리에스테르 50%의 혼방직물일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가 100% 순면보다 혼방직물을 더 좋아한다. 관리하기 쉽고 편안하며 구김이 잘 가지 않는 혼방직물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들은 혼방직물처럼 입기 편안하고 구김살이 가지 않는 삶을 원하는 것이다.

  종종 사람들의 삶도 옷감 같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직조된 폴리에스테르나 순면이나 순모 같은 옷감. 그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들을 걸치고 살아가는 허수아비들... 깡마른 몸피에 걸처져 있는 그들의 닳아지고 낡아 가는 드라이 클리닝 같은 삶, 물빨래 같은 삶.

  사람들은 마음속에 세탁소를 하나씩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이따금씩 이 곳에 들러 자신들의 지나버린 시간과 추억들을 드라이클리닝하거나 물빨래를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양복 한 벌이나 투피스나 원피스 따위를 보면서 나와 아내는 어떤 옷감 같은 인생일까 문득문득 생각해보곤 한다.

  긴 생머리의 여자가 출입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선인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보는 여자는 아니다. 낯이 익다. 한 달 전부터 가게 앞에 졸졸이 서 있는 선인장 화분들을 길을 가다가 멈춰 서서 내려다보던 바로 그 여자다. 여자는 흰색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었다. 한참동안 넋 나간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가시들이 돋아 있는 몸통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빤다. 가시에 찔린 모양이다. 절룩거리며 뛰어나가 여자의 입 속에 있는 손가락을 낚아채서 얼마나 많이 찔렸나 확인해 보고 싶다. 여자의 여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펴보고 깊숙이 박혀 있는 뾰족한 가시들을 단번에 뽑아 내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다.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왼쪽 팔뚝엔 원피스가 걸쳐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는 머뭇거리며 드라이 클리닝을 맡기려고요. 건너편의 주공빌라로 이사를 왔어요. 라고 말하며 옷을 바큠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나는 예, 라고 응대하며 옷을 보일러 옆 스테인레스 봉에 걸쳐놓는다. 드라이클리닝 할 옷들을 이 곳에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한다.

  여자가 입고 있는 흰색의 스웨터 같은 하얀색 이를 드러내며 잠깐 웃었던가. 나는 아까 가시에 찔린 곳은 어떠십니까, 괜찮으세요? 라고 물으며 여자의 얼굴을 살펴본다. 여자의 얼굴이 너무 환해 나는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괜찮다고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말한다. 선인장의 가시를 아주 좋아하죠. 전 저 가시를 하나씩 제 피부 속에 심고 싶어요... 얼굴을 돌려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갑자기 형광등이 깜박거린다. 램프를 갈아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깜박거리는 형광등 때문일까. 여자의 얼굴은 더 이상 환하지 않다. 눈 밑의 실밥 같은 주름과 검은 주근깨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다시 형광등이 깜박거린다. 전, 아주 날카로운 가시로 만든 갑옷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간다. 나는 사다놓았던 형광등 램프를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잠시 멍하니 서 있는다.  

  아내는 신혼 초부터 내가 귀가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사업 초기에도 힘들게 영업을 해야 하는 나를 기다리며 온 집안의 불을 다 켜놓았다. 그건 아내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아내는 어릴 적 집에서 혼자 엄마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다. 미리 자라고 아무리 얘길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달이면 보름이 넘게 밤을 꼬박 세우고 들어오는 당신 때문에 우리 집의 형광램프는 다른 집보다 훨씬 더 자주 갈아주어야 해. 아내는 식탁의자 위에 올라서서 형광램프를 갈아 끼우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아이들이 생기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무남독녀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내는 혼자 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너무 좋아해서 죽고 못살아하는 성격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다만, 이따금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소연을 하기는 했다. 병원에 가보라고 하면 별거 아니라고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생기자 하나하나 챙겨 주고 보살펴주는 것을 버거워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을 힘들어했고 아이들에게 매를 자주 드는 것 같았다. 그 날 백색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실핏줄이 터진 빨간 눈으로 노려보던 아내... 그때 나는 들고 있던 선인장 화분을 스르르 놓쳐버렸다.


  문이 열리고 건너편의 희망 컴퓨터 대리점과 붙어 있는 스타 미용실 원장이 들어온다. 그녀는 이 동네의 터줏대감이다. 입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쉴새없이 말을 하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뭘 먹어댄다. 주공슈퍼로 담배를 사러 갔다가 주전부리를 잔뜩 사들고 나오는 여자를 자주 보았다. 

  저 여자의 입에선 머리를 자른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아내의 가출이 튀어나왔다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가 손님들의 긴 머리를 자르고 퍼머넨트를 하거나 컷을 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소문도 그렇게 부풀어오르고 잘려 나갔을 것이다. 아마 나에 대한 소문도 아내의 얘기와 더불어 손님들의 머리에 중화제처럼 발렸다가 샴푸와 함께 수돗물에 씻겨나갔을 것이다. 그 잘나가던 회사 사장님이 한 순간에 부도를 내고 세탁소를 차렸다고, 거기에다가 다리까지 다쳐 병신이 되었다고. 

  건물 주인 오 씨는 월세를 받으러 올 때마다 저 여자가 과부니까 한 번 잘해보라고 말한다. 그는 노골적으로 음흉한 얼굴을 드러내며 건너편의 미용실을 건너다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밖에 모르는 것이지, 암... 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떠난 여자는 뭣땜시 기다리나. 여자가 한 둘 인가, 이 사람아! 이 골목엔 정말 홀아비 지천이라니까. 그는 침까지 튀겼다.

  정말이지 누구보다 먼저 홀아비가 되고 싶은 사람은 주인 남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은 항상 더디 오게 마련인가 보다. 주인 여자는 오 씨보다 훨씬 젊고 건강해 보였다. 나는 동일 스포츠센터의 셔틀버스에서 어깨에 운동가방을 걸치고 내리는 그 여자를 자주 보았다.

  “홍 사장님! 저번에 맡겨놓은 투피스 좀 주세요”

  저 여자는 나를 부를 때면 꼭 ‘사장’ 이란 말을 넣는다. 오늘도 여자는 미용실의 간판처럼 옷을 정말 스타처럼 입었다. 패션모델 뺨친다. 얼마전 그 일이 있고 나서 이따금 길에서 스치곤 했을 때도 서로 머쓱한 표정이었는데 이젠 많이 밝아진 얼굴이다.  

  “예... 잠깐만 기다려요.”

  여자가 맡겼던 옷 한 벌을 생각해낸다. 그녀는 그 투피스를 입고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었다. 적당히 술에 취한 음성으로 미용실이 정기 휴일이니까 하루만 세탁소 문을 닫으면 안되느냐고 전화를 했다. 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평상시의 그녀는 누구나가 호감을 느낄 만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약속 장소는 근처의 호프타운이었다. 여자가 생맥주 2000CC를 시켰다. 술에 알맞게 취해 있던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자꾸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나에게 술을 권하기도 하고 따라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술잔에 손이 갔다. 나는 급작스레 취해가는 여자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너무 늦었으니 그만 일어서자고 했다. 여자는 일언반구도 없이 마른 오징어 같은 얼굴로 혼자 술잔을 비우기 시작하더니 또 다시 생맥주 2000CC를 시켰다. 그리고는 반이 넘게 마셔버렸다. 보다못한 내가 그만 가봐야한다고 벌떡 일어섰더니 비틀비틀 따라일어서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취한 여자는 내 등에 업혀있는 것도 몰랐다. 다리가 불편해서 너무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미용실 앞에서 내려 여자의 핸드백을 뒤져 열쇠를 찾아냈다. 아무거나 맞춰보다가 세번 째 열쇠가 맞아 겨우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눈이 신경쓰였지만 다행히도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여자가 기거하는 듯한 방문을 열었다. 혼자 사는 여자의 방에서는 그런 냄새가 난다는 것을 나는 그때 확실하게 알았다. 향기라고나 할까, 아니 체취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갑자기 정신이 까무룩해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맡아본 여자냄새였다.

  여자의 방은 아담했다. 좁은 방인데도 있을건 다 있었다. 다섯자나 될 듯한 장롱 옆에 하얀색 화장대까지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놓고 소파에 축 늘어져있는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여자는 전혀 일어설 기미가 없었다. 그냥 놔두고 가버릴까 하다가 밤기온이 너무 차다는 생각에 여자를 다시 끙끙거리며 업어서 방에다 눕혔다. 발을 돌리는데 거짓말처럼 여자가 나를 불렀다. 홍, 사장님...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짓말처럼 여자는 눈을 반짝 뜨더니 느린 몸짓으로 일어나 앉았다. 여자에게서는 술냄새가 났다. 나는 뒷통수를 새총으로 한 방 맞은 듯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딸꾹질을 심하게 해댔다. ...딸꾹 딸꾹... 딸꾹질 소리와 함께 여자가 앞으로 푹, 고꾸라지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우리 둘이서... 딸꾹... 자알, 해봐요... 딸꾹... 그렇게 기다린다고 당신... 아내가 올것 같아요? 흐흥, 바보같은 남자... 이리와봐요. 비틀거리며 여자가 일어섰다. 어느덧 여자의 딸꾹질은 멈춰 있었다. 술냄새를 풍기며 여자가 나에게로 쓰러지는가 싶더니 붉은색 루즈가 묻은 입술을 내 입 언저리에 비벼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처음엔 당황했지만 나도 모르게 여자의 더운 입김에 기분이 몽롱해졌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순간, 여자가 내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등 뒤의 바지춤에 슬며시 손을 댔다. 여자가 뜨거운 숨을 다급하게 내쉬며 내 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블라우스 속으로 밀어넣었다. 여자의 가슴이 위 아래로 심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내 바짓속의 남성도 격하게 성을 내었다. 나는 그런 자신이 몹시 못마땅했다.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여자를 확 떠다밀어 버렸다. 여자는 엉거주춤하다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돌아서는 나의 등 뒤로 화장품 용기들과 함께 여자의 욕지거리가 날아왔다. 자세히 생각나지 않지만 전혀 스타답지 않은 욕인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여자도 나처럼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과거를 열듯 천장에 매달린 터널식 비닐 옷장의 자크를 연다. 스테인레스 봉에는 무수히 많은 옷걸이들이 비닐커버 안에 옷을 넣은 채로 걸려 있다. 우리는 옷걸이에 매달려 있는 저 양복 한 벌이나 원피스가 아닐까. 허수아비들은 현실이라는 저 옷걸이에 매달려 서로의 등허리를 바라보며 외롭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라는 옷장 안에 갇혀 고통과 같은 비닐커버를 뒤집어쓴 채로.

  붉은 색 투피스를 내려서 스타에게 건네준다. 술과 구토물로 범벅이 되어 여러 군데 전처리를 하고 드라이 클리닝을 했던 옷이다.

  적당히 살집이 붙은 엉덩이를 패션모델처럼 흔들며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여자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아마 저 여자는 나에 대한 마음의 길도 횡단보도를 건너듯 건너가버렸을 것이다. 모델같이 아름답고 마술의 손을 가진 스타에게도 세탁소는 필요한 모양이다. 그녀는 나에 대한 추억을 드라이 클리닝해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과 현실을 바꿔치기라도 하듯 시시때때로 옷을 사고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세탁소에 바꿔 입은 옷들을 맡기러 온다. 그들은 양복 한 벌이나 투피스나 실크 블라우스 따위를 맡기면서 자신들의 때 묻고 구겨져버린 이상과 여기저기가 얼룩지고 실밥이 터져버린 현실까지도 맡기고 싶은 것이다. 쉴새 없이 부풀어오르는 욕망처럼 너무 풍성한 옆구리를 줄여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하고 때로는 옷의 여러 군데에 요란하게 매달려 있는 프릴같은 허영심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내 달라고 한다. 

  터널식 천장용 옷장에서 아내의 원피스를 꺼내서 비닐커버를 벗긴다. 그냥 옷걸이에 걸어두기만 했는데도 옷은 변색되어 누르스름하다. 혹시, 아내의 삶도 이렇게 누릿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현듯 조바심이 인다. 원피스를 옷걸이에서 벗겨 클리닝 기계 옆에 쌓아놓은 옷들 위에 올려놓는다.

  모아진 옷들을 바큠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전처리할 옷들을 고른다. 심하게 얼룩이 묻어있는 부분에는 카본을 스폰지에 묻혀서 살살 닦아주어야 한다. 회색 양복바지 무릎 부근에 커피색깔 같은 혈흔이 묻어 있다. 먼저 과산화수소 0.3%로 닦아낸다. 간혹 황갈색이 남아있을 때는 철분이므로 수산으로 처리한 다음 충분히 헹구어 내야만 한다. 베이지색 바바리 코트 군데군데에 곰팡이가 피어 있다. 분무기로 곰팡이 핀 곳에 물을 충분히 뿌려 둔다. 그런 후에 과망간산을 발라놓는다. 십분 가량 지나면 환원제인 옥살산으로 발라놓은 과망간산을 제거한다. 의자에 앉아서 남자 한복의 마고자 단추를 은박지로 싼다. 양복 상의에 매달려 있는 고급 단추도 은박지로 싼다. 옷도 색깔별로 구분한다. 연한 색깔의 옷부터 클리닝을 해야만 한다.

  옷을 구분해 놓고 드라이 클리닝의 준비공정을 한다. 마지막 단계다. 용제를 순환시켜 투명하게 보이는 사이드 글라스를 한 번 쳐다본다. 카본에 솔벤트를 첨가하여 진흙상태로 된 것을 투입구에 투입한다. 클리닝 기계의 문을 연다. 골라놓은 옷들을 그러모아 통 속에 밀어 넣는다.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잠근다. 다이얼을 돌린다. 클리닝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아내를 정신없이 찾아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너편에 제과점이 보였다. 유리문으로 따뜻한 주황색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내와 무척 흡사한 여자가 빵을 고르고 있었다. 그 여자를 본 순간 내 가슴도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부풀어올랐다.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급한 마음에 앞으로 내달렸다. 그 순간, 부아앙 소리와 함께 뭔가가 왼쪽 허벅다리를 세차게 치받았다. 오토바이였다. 나는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넘어진 왼쪽 무릎 위에서 다시 오토바이가 헛바퀴를 몇번 돌리다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고개를 외로 꼬고 뒤틀려버린 무릎을 부여잡았다. 잇새로 통증을 깨물고 있는 사이 오토바이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흐릿한 시야로 여자가 제과점 문을 밀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가 내 눈앞에서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렸듯이 오토바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수 없이 많은 까만 밤들... 거실에 불을 켜놓은 채로 사라져버린 아내와 오토바이를 뒤따라갔다. 꿈의 마지막엔 어김없이 오토바이의 바퀴가 내 가슴 위를 몇 바퀴 돌다가 돌연 사라져 버렸다.

  다리를 절룩대면서 할만한 직업은 드물었다. 자금이 넉넉지 않아서 어렵게 끌고 가던 사업이었지만 그래도 왕년에 사장 행세를 했던 나였는지라 재활의지가 빈약했다. 순식간에 드라이클리닝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물빨래 같은 삶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낮술에 취해서 자다가 깨어나던 어느 날 오후, 신문지 사이에서 떨어진 일간지 귀퉁이에는 고용촉진 운운 하는 담뱃갑 만한 광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곧장 세탁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처음엔 자존심도 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달라져 갔다.

  클리닝이 끝났다. 기계의 문을 연다. 지독한 솔벤저 냄새가 확 달려든다. 이따금 나는 아내에게 이 솔벤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에게도 아내는 이 솔벤저 같기만 하다. 세탁을 해주지만 독한 냄새와 잔류물을 세탁물에 남겨놓는 이 솔벤저처럼 아내는 자꾸만 과거의 나를 세탁해주고 그럴 때마다 지독한 그리움을 남긴다.

  옷들을 꺼낸다. 바큠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옷걸이에 하나씩 걸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남학생의 체크무늬 교복바지를 집게 옷걸이에 걸친 후 밖으로 나온다. 고개를 쳐들고 옷걸이들을 통유리와 셔터 사이에 매달려 있는 줄에 건다. 솔벤저 냄새에 젖어 구겨져 있던 옷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전화가 올 때면 항상 마음이 조급해진다. 서두르는 몸짓으로 탁자 위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든다. 예, 즐거운 세탁솝니다. 갈라지고 누가 들어도 전혀 즐겁게 느껴지지 않을 내 목소리 속으로 여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뛰어든다. 오빠! 큰일 났어. 윤이가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대. 담임 선생님한테서 방금 전화가 왔어.한 두번도 아니고 도대체... 어이구, 이젠 나도 몰라! 박 서방 눈치보여서 죽겠어. 윤이는 오빠가 데려가!... 여동생의 성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튀어나와 빨래방망이처럼 아들녀석과 나를 마구 두들긴다. ...그래. 알았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문다. 날이 갈수록 느는 건 담배와 아들녀석에 대한 걱정이다. 그 녀석이 집에 다니러 온 날 새벽녘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나에게 들켰던 일을 생각하면 담배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지건만 어찌된 건지 되레 늘어만 간다. 초등학교 오학년 녀석이 담배를 피우다니 뒤로 넘어갈 일이다. 녀석은 또 보나마나 장모님 댁에 갔을 것이다.

  여동생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처음엔 내가 둘 다 키우다가 나중엔 장모님이 키웠는데 밤이 늦도록 비닐하우스의 꽃을 돌보는 일 때문에 아이들끼리만 자는 날이 많아져서 하는 수 없이 동생이 맡아 키우고 있다. 그 녀석은 아직도 과거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옷장 안에 갇혀 있는 옷처럼... 딸아이는 그래도 고모에게 마음을 붙여 잘 적응하고 산다. 밤에 자기 전에 자주 우는 것만 빼고는. 나와 아이들은 언제쯤이나 과거라는 옷장의 문을 왈칵 열어젖히고 현실로 뛰쳐나올 수 있을까.

  바람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비가 오려나 보다. 바람이 잦아지고 거칠어지면 곧이어 비가 내리곤 했다. 통유리 너머로 밖에 걸어 놓은 옷들이 펄럭거리는 것이 보인다. 아내도 어딘가에서 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들처럼 자신을 현실에 잘 매달아놓고 살아가고 있을까.

  커튼 뒤에 놓여있는 싱크대로 간다. 수납장 문을 열고 밑이 넓은 플라스틱 그릇을 꺼내 수돗물을 받는다.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아내는 선인장 화분에 단 한번도 물을 주지 않았다. 발을 절룩거릴 때마다 그릇에 가득찬 물이 출렁거린다. 출입문 앞에 세워진 선인장 화분들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성게 선인장, 둥근 선인장, 게발 선인장...

  언젠가 화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종류가 달라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아내가 화분들을 사왔을 때 나는 왜 그것들의 이름조차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단지 지나가버린 일들은 다 후회가 되기 마련이기에 이제서야 그 생각이 나는 걸까. 자그마한 화분들은 정확하게 열 세 개다.

  아내는 집을 나갈 때 선인장들을 화분에서 죄다 뽑아놓고 갔다. 화분을 던지기도 했는지 몇 개는 깨져 있기도 했다. 그때 아내는 셀 수 없이 많은 선인장의 가시에 손가락을 찔렸을 것이다.

  그 즈음 아내는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하는 나를 조금씩 무시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자신감이 점점 사라져 갔다. 어릴 적부터 앞에 나서지 못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어머니의 눈에 차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완벽한 형과 달리 매사에 지적과 멸시를 받고 자란 나는 어머니의 말대로 정말 한심한 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쩌다 가끔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까지 그런 눈빛을 보일 때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내향적인 나지만 술을 마시면 무서운 것이 없어졌다. 대담해지고 난폭해졌다. 아내가 날 멸시한다는 느낌이 들자 어머니한테 느꼈던 모멸감까지 되살아났다. 술이 조금씩 늘어갔다. 내 자신을 제압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술을 마시고 나면 속에서 아주 날카롭고 강한 가시들이 하나 둘씩 돋아났다. 나는 점점 술에 빠져들었고 내 속의 가시들도 조금씩 자라가기 시작했다.

  선인장에도 물을 주나요? 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든다. 하얀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출입문 앞의 계단에 걸터앉는다. 그렇죠. 가끔주어야해요.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서 안 되지만요.

  아내는 자신의 뿌리가 썩어버릴까봐 나를 떠나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토록 100% 순면처럼 습기를 싫어했던 까닭도 그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군요. 뿌리가 썩는군요. 전 물을 무척 좋아하는데... 남편은 술을 좋아했어요. 결혼한 그 날부터 술을 입에 달고 살았죠. 시어머니도 알코올 중독이었대요. 대대로 그랬다고 시누이가 그러더군요. 내가 술 냄새가 싫어 고개를 돌리고 자면 손찌검을 했어요. 술을 마시지 않을 땐 몹시 착한 사람인데... 날이 갈수록 술을 더 좋아했죠. 거기에다가 의처증까지 생겼고... 난 남편에게 맞는 게 너무 싫었어요. 하지만 참았죠. 아이가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이가 자랄 수록 남편의 손찌검은 점점 더 잦아졌죠. 칼까지 들이대며 설쳤어요. 아일 놔 두고 도망쳤어요. 이번에는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젠 아이가 뾰족한 가시가 되어 절 마구 찔러대는군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여자가 천천히 일어선다. 여자의 등뒤로 세탁소 안의 비닐 옷장과 바큠 테이블이 드문드문 보였다가 어스름 속으로 슬몃슬몃 사라진다. 바람이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그릇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는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원피스에 비닐커버를 씌워서 여자에게 건네준다. 여자가 돈을 지불하고 등을 돌린다. 잠깐만요. 내 목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돌린다. 출입구로 가서 게발 선인장 화분 하나를 들어올린다. 선인장엔 어느덧 꽃망울들이 맺혀있다. 나는 게발 선인장을 여자에게 안겨준다.

  그 전날 심하게 구타를 당한 아내는 비슬거리며 밖으로 나가 선인장 화분 하나를 사왔다.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선인장 화분이 하나씩 늘어났다. 난 아내가  꽃가게를 하는 장모를 닮아 화분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사려면 예쁜 꽃들이나 살 것이지 가시투성이인 선인장만 사는 이유가 뭐냐고 몇 번 얘기했지만 조금씩 말이 없어진 아내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현관 옆의 신발장 위에는 선인장 화분들이 하나하나 늘어갔다. 어느덧 신발장 아래까지 선인장 화분이 놓이기 시작했다. 내 속에도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들이 빈틈없이 들어차서 자라고 있었다.

  그 날도 나는 여기저기 돈을 융통하러 다니다가 새벽녘에야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나는 아예 현관문 열쇠를 가지고 다녔다. 밤 늦게 들리는 초인종 소리 때문에 애들이 놀란다면서 아내가 복사해서 준 열쇠였다. 막 문을 따고 들어오는데 바늘처럼 따끔한 것이 복사뼈 근처를 쑤셔댔다. 그 즈음 여기저기서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는 전화들이 내 옆구리를 끊임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내려다보니 선인장 화분이었다. 와락 울화가 솟았다. 선인장은 내 옆구리까지 함께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내 속에 촘촘하게 들어차 있던 시침바늘 같은 가시들이 와와 소리를 내며 일제히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화분을 냉큼 들어올려서 거실에 내동댕이쳐버렸다. 백색 형광등이 깨진 화분조각들 사이에 나동그라진 선인장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방 문이 열리고 아내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뿌리 뽑힌 선인장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사실, 너무 놀란 아내의 얼굴을 보고 무척 미안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늦게 들어오는 주제에 생활비조차 가져다주지 못하고... 정말 아내에게 미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전혀 다른 행동으로 터져 나왔다. 난 또 다른 화분 두 개를 내던지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그때 아내가 나를 향해 울부짖던 말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술에  취해 있었지만 아내의 그 말만은 내 손으로 날마다 다림질하곤 한다. 이런 건 사는 게 아냐! 폭력은 짐승한테나 쓰는 거야! 난, 사람이지 짐승이 아냐!

  아내는 내가 잠든 사이에 아이들까지 놔 두고 사라져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를 찾았지만 헛일이었다. 화장실 앞엔 아내가 벗어둔 잠옷과 전날 입었던 하얀색 원피스가 아이들 옷과 함께 깨진 화분조각들과 흙더미 사이에 나뒹굴고 있었다.

  장모에게 뛰어갔지만 아내는 그 곳에 없었다. 이 사람아! 그 불쌍한 것을... 눈물만 훔치던 장모는 말했다. 고것이 제일 못 참고 살 일을 저질렀구먼. 자네 장인이 날 때리곤 했어. 그럴 때마다 윤이 에미가 어찌나 울고 불고 싫어하든지 장인이 놀래서 어지간할 때면 그만 두곤 했어. 술이 심하게 취했을 때는 소용도 없었지만... 어찌나 걔가 지 아버질 싫어했든지 술병으로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사실, 그 앤 내 친 딸이 아니네. 자네한테 미리 말 안한 건 정말로 미안허네만, 언니가 달랑 고거 하나만 냄기고 죽었을 땐 결혼도 안 허고 고것만 바라보고 살려고 혔지. 다 잘 키우지 못헌 내 잘못이네.

  안으로 들어온 나는 형광등의 스위치를 올린다. 형광등이 제멋대로 몇 번 깜박거리다가 불이 나가버린다.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통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본다. 굵은 빗방울들이 통유리에 부딪치며 흘러내린다. 희망 컴퓨터대리점의 김 사장이 스타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손님의 머리를 감기고 있던 스타가 고개를 돌리고 뭐라고 얘기한다. 김 사장이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본다. 다시 스타에게 뭐라고 얘기한다. 스타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미용실 문을 밀고 나오는 김 사장의 얼굴에는 언제 떼어냈는지 안대가 온데간데 없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 굵은 빗방울들이 들친다. 그는 머리에 오른 손을 얹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더니 다시 대리점 문을 열고 들어간다. 곧이어 간판에 불이 들어온다. 희...망... 컴퓨...터... 빗방울들이 후드득거리며 떨어진다. 바람에 빗줄기가 날린다.

  갑자기 거리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도로 가에 고개를 숙인 채로 서 있는 가로등에 반짝 불이 켜진다. 가로등 불빛에 빗줄기들이 반짝거린다. 거무스름한 실루엣의 허수아비들이 비바람에 떠밀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종종거리며 거리를 지나간다. 

  밖으로 나와 셔터를 내린다. 뒷문을 통해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형광등의 스위치를 올린다. 실내가 환해진다. 세탁소 안의 모든 사물들이 하나하나 살아서 나에게 얘기를 건네기 시작한다. 나는 거친 손놀림으로 비닐 옷장의 자크를 연다. 옷걸이에서 아내의 하얀색 원피스를 꺼낸다. 전원을 넣고 인체 프레스기에 옷을 입힌다. 몹시 단조로운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서 있다. 아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단정한 입매와 유난히 컸던 눈망울을 애써 기억해 본다. 스팀이 나오고 이어서 옷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아내를 처음 안았던 그 때처럼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프레스기를 꽉 껴안는다. 아내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 하다. 바지를 벗는다. 입고 있던 고동색 상의를 벗고 팬티를 내린다. 알몸이 된 나는 아내를 꼬옥 껴안는다. 따스하다. 아직 다 날아가지 못한 솔벤트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아내의 환한 얼굴이 여기저기에서 웃고 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있는 힘껏 원피스를 껴안는다. 아내를 꽉 껴안는다. 아내가 꿈틀거리며 벗어나려 한다. 더 힘껏 아내를 끌어안는다.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옷걸이 위에 걸쳐진 비닐커버처럼 가볍게, 가볍게 날아오른다. 하아하아, 거친 숨소리도 세탁소의 천장 위에 부딪쳤다가 조금씩 천천히 내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린다.  

  옷장의 자크를 연다. 옷걸이에 항상 걸어두었던 검은색 양복 한 벌을 나무막대기로 내린다. 팬티를 입는다. 비닐커버를 찢어낸다. 옷걸이에서 양복 상의를 벗긴다. 옷걸이 아랫부분에 걸려있는 검정색 바지를 빼낸다. 바지를 꿰어 입고 고동색 상의를 입는다. 빠른 손놀림으로 양복 상의를 걸친다. 프레스기에서 원피스를 벗긴다. 하얀색 옷을 왼쪽 팔뚝에 걸친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싱크대 옆에 있는 뒷문으로 나온다. 굵은 빗방울들이 얼굴과 머리 위에 후득후득 떨어진다. 차갑다. 

  버스에서 내린다. 마지막 버스다. 비가 오는 신작로는 괴괴한 느낌마저 든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멀리에서 경운기 모터 소리가 들린다. 소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절룩거리며 신작로를 걷는다. 논두렁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한참을 더 걷는다. 군데군데 서 있는 허수아비들이 바람에 깡통소리를 낸다. 비바람에 옷이 젖은 허수아비들은 깡마른 몸으로 양팔을 벌린 채 서 있다. 바람에 날렸는지 모자도 없다.

  논두렁을 걷는다. 벼를 베어내버린 논으로 걸어간다. 논 중앙에 허수아비가 서 있다. 비와 바람에 시달려서일까. 허수아비는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한쪽 팔조차 부러졌다. 나는 허수아비 앞으로 걸어간다. 부러진 한쪽 팔을 곧게 펴준다. 원피스의 뒤에 달린 자크를 열고 허수아비의 머리에 씌운다. 허수아비가 하얀색 옷을 입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양복이 순식간에 젖어버린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허수아비 옆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검은 하늘에서 수 없이 많은 비알갱이들이 얼굴과 어깨 위로 뛰어내린다. 맞은편에 옷을 바람에 날려버린 허수아비 하나가 맨몸으로 비를 맞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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