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등장하는 진희는 어머니가 없다. 아기였을 때 엄마는 자살을 했고 그래서 아이는 엄마에 대한 정이 없다. 진희는 지나치리만큼 성숙하다. 자신의 자아를 둘로 분리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설정하는 치밀함도 지녔다.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분리하여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영특함으로 내면에 비정상적으로 성숙된 자아를 빈틈없이 포장한다.
'보여지는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며 그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지 까지 예측하며 행동한다. 프롤로그의 제목('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처럼 진희는 이미 열두 살 이전에 내면의 성숙을 마쳤다. 동년배인 장군이와의 수준차이는 당연하며 21살된 이모(영옥)보다도 높다. 이미 주변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으며 그 사람들의 특성도 모두 파악한다. 즉 진희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주변 사람을 관찰하는 눈인 셈이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사실 진희를 어린아이라고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일반적인 어른보다 더 성숙한 진희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 글을 보면서 어린아이가 이렇게까지 능청스러울 수 있구나 하는 두려움까지 들었다면 지나친 발언일까?) 어른들의 세계가 거침없이 보여진다. 진희가 내면이 성숙한 아이라는 전제에 의해 작품은 유치하지 않았고 오히려 알 수 없는 매력을 자아냈다. 진희는 그 눈으로 이모를 바라보았고 할머니를 관찰하고 이웃사람들을 평가했다. 이모는 사랑에 기대어 남자에게 의존하는 수동적인 여성으로써 그런 여성에게 부여되는 전형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적당히 시선을 끌만한 외모와 모나지 않은 성격의 캐릭터다. 어느 것 하나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일에 급급해한다. 특정한 직업도 없고 꿈도 없다. 오로지 삶의 목표는 남자와 결혼이며 훌륭하지는 않지만 영어를 좋아한다는 이지적(?) 능력도 지녔다.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펜팔이 취미이며 '경자'라는 친구에 의해 '이형렬'이라는 군인을 만나 편지로 연애를 시작한다. 원체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사람은 세상에 어떤 일이 닥쳐도 그 일을 의심하지 못하는 우매함을 지닌다. 그 어리석음은 역경을 겪고 나서야 성숙해진다. 흔히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라는 말이 쓰이듯 인간이 성숙해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모는(모든 인물은 진희의 입장에서 보여지기 때문에 인물의 호칭을 진희가 부르는 대로 쓰고자 한다) 친구의 배신(경자이모)과 남자의 변심(이형렬)으로 한층 더 성숙해지고 멈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성숙했던 자아는 비로소 제 나이에 맞는 성숙함을 찾아간다.
진희의 삼촌은 서울의 명문대학을 다닌다. 주어진 원칙대로만 살아가는 삼촌은 딱딱하고 바른 길만 살아가는 지식인이다. 그래서 이모는 삼촌을 무서워하고 껄끄러워한다. 하지만 진희는 다르다. 진희의 성숙함에 한 몫을 한 건 삼촌이 없는 빈방이었다. 삼촌이 남기고 간 책들을 무작정 읽기 시작하며 진희는 어린아이로써 알 수 없는 단어들에 부딪히게 되고 그 단어들에 대한 호기심과 작품에 대한 집착으로 어린 나이에 몰라도 되는 어른의 세계를 너무 일찍 접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성(性)의 문제까지 적나라하게 파악하게 됨으로써 한동안 남자를 바라볼 때 성기를 중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자신을 추스리는데 많은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은 서울의 하숙집 아들이며 같은 학교에 다니는 '허석'을 데리고 집에 들어온다. 허석을 만나기 전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에서 들은 하모니카 소리와 한 남자의 실루엣을 가슴 속 깊이 새긴 채 집에 돌아온 진희는 허석을 보자마자 운명을 점지 받은 사람인양 설레임에 들뜬다. 그 때부터 이모는 자신의 연적이 되었고 이모를 바라보는 허석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진희는 어린애다운 순진함과 어린아이답지 않은 성숙함으로 허석에게 다가간다. 처음으로 '바라보는 나'를 조심스레 내비친 상대가 허석이었으며 어린아이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는 허석을 바라보며 진희는 뿌듯함을 느낀다. 자신의 삼촌 격인 남자를 감히 사랑한다고 느끼면서 사랑은 유치한 놀이와 같다고 여기던 부정적 시각에서 어느 정도 탈피한다. 하지만 진희에게도 쓰라린 이별의 아픔이 찾아오고 이형렬에 대한 상처로 휘청거리는 이모를 위해 헌신을 다하는 허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만 아픔을 삼킨다. 원체 밖으로 드러내놓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만큼 이모처럼 대놓고 이별의 아픔을 시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이가 바라보기에 진희의 사랑은 시작도 하지 않은 것처럼 끝을 맺을 것도 없는 것이었다. 허석과 이모가 가까워질 무렵 마을의 유지공장에서 불이 나고 그 공장에 이모 대신 취직해 있던 경자이모는 화제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친구의 죽음으로 이모는 자기 때문에 친구가 죽었다는 자책감에 빠지고 친구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친구와 그 남자를 용서한다. 허석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이모는 전과 다른 성숙함으로 눈에 띄게 달라진다. 하지만 얼마 후 이모는 진희에게 읍내에 있는 병원에 함께 가자고 하며 산부인과에 함께 가 낙태수술을 하는 이모를 기다리고 진희는 허석의 아이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된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이모를 부축하고 집에 가는 길에 버스는 눈길에 고장이 나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고,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모는 눈 위에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이모를 사모하는 동네 건달 '홍기웅'에 의해 이모는 안전하게 집에 돌아올 수 있게 되고 결국 결말에 이르러 이모는 암묵적으로 홍기웅에게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반면 진희도 내면의 성숙함에 걸맞는 신체의 성숙함을 함께 경험하게 되며 내면과 외면의 동시에 성숙되게 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이 소설을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진희가 바라보는 삶은 이모뿐만이 아니다. 광진테라 아줌마와 장군이 엄마, 미스 리 언니 등 가까운 주변의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눈은 지나칠 정도로 해학적이다. 지나친 해학은 항상 어느 정도의 씁쓸함을 동반하는 것이며,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도 나쁜 경험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인 것이다. 각기 다른 인물의 삶을 통찰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결코 순탄하지 않은 여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아픔을 갖고 있으며 그 아픔을 표출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전통적 인습에 눌려 남편과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억눌린 여성의 모습이 대부분이며 사랑에 기대어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수동적인 여성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의 입장에서 수긍할 수 없는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이 은희경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아마 진희는 작가 자신의 삶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전통적 삶에서 현대의 삶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살아온 독자가 어린 시절 구습에 얽혀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작품을 감상하는 좋은 관점이 될 것이다. 진희의 캐릭터는 역동적이며 진취적이다. 그래서 작품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 아닐까?
흔히 페미니스트들은 외친다. 여성은 불행하다고.....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여자로 태어나서 겪게되는 수모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느껴야 하는 사회적 자격지심을 남자들은 모른다고들 한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남자와 여자는 선천적으로 다르기에 여자도 남자를 전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남자들이 읽어도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여성의 억눌린 삶이다. 그 형태는 조금씩 달라도 여자이기에 느껴야 하는 순결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주입된 일편단심, 여자는 남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가부장적 관습의 모순을 보았다.
여성의 삶에 이토록 수많은 굴곡이 존재하기에 문학계에서 여성 작가들이 활보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비단 여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보다 훨씬 일찍 성숙함을 겪게되는 여성의 특성을 잘 반영한 말이 아닐까?
'보여지는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며 그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지 까지 예측하며 행동한다. 프롤로그의 제목('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처럼 진희는 이미 열두 살 이전에 내면의 성숙을 마쳤다. 동년배인 장군이와의 수준차이는 당연하며 21살된 이모(영옥)보다도 높다. 이미 주변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으며 그 사람들의 특성도 모두 파악한다. 즉 진희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주변 사람을 관찰하는 눈인 셈이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사실 진희를 어린아이라고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일반적인 어른보다 더 성숙한 진희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 글을 보면서 어린아이가 이렇게까지 능청스러울 수 있구나 하는 두려움까지 들었다면 지나친 발언일까?) 어른들의 세계가 거침없이 보여진다. 진희가 내면이 성숙한 아이라는 전제에 의해 작품은 유치하지 않았고 오히려 알 수 없는 매력을 자아냈다. 진희는 그 눈으로 이모를 바라보았고 할머니를 관찰하고 이웃사람들을 평가했다. 이모는 사랑에 기대어 남자에게 의존하는 수동적인 여성으로써 그런 여성에게 부여되는 전형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적당히 시선을 끌만한 외모와 모나지 않은 성격의 캐릭터다. 어느 것 하나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일에 급급해한다. 특정한 직업도 없고 꿈도 없다. 오로지 삶의 목표는 남자와 결혼이며 훌륭하지는 않지만 영어를 좋아한다는 이지적(?) 능력도 지녔다.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펜팔이 취미이며 '경자'라는 친구에 의해 '이형렬'이라는 군인을 만나 편지로 연애를 시작한다. 원체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사람은 세상에 어떤 일이 닥쳐도 그 일을 의심하지 못하는 우매함을 지닌다. 그 어리석음은 역경을 겪고 나서야 성숙해진다. 흔히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라는 말이 쓰이듯 인간이 성숙해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모는(모든 인물은 진희의 입장에서 보여지기 때문에 인물의 호칭을 진희가 부르는 대로 쓰고자 한다) 친구의 배신(경자이모)과 남자의 변심(이형렬)으로 한층 더 성숙해지고 멈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성숙했던 자아는 비로소 제 나이에 맞는 성숙함을 찾아간다.
진희의 삼촌은 서울의 명문대학을 다닌다. 주어진 원칙대로만 살아가는 삼촌은 딱딱하고 바른 길만 살아가는 지식인이다. 그래서 이모는 삼촌을 무서워하고 껄끄러워한다. 하지만 진희는 다르다. 진희의 성숙함에 한 몫을 한 건 삼촌이 없는 빈방이었다. 삼촌이 남기고 간 책들을 무작정 읽기 시작하며 진희는 어린아이로써 알 수 없는 단어들에 부딪히게 되고 그 단어들에 대한 호기심과 작품에 대한 집착으로 어린 나이에 몰라도 되는 어른의 세계를 너무 일찍 접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성(性)의 문제까지 적나라하게 파악하게 됨으로써 한동안 남자를 바라볼 때 성기를 중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자신을 추스리는데 많은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은 서울의 하숙집 아들이며 같은 학교에 다니는 '허석'을 데리고 집에 들어온다. 허석을 만나기 전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에서 들은 하모니카 소리와 한 남자의 실루엣을 가슴 속 깊이 새긴 채 집에 돌아온 진희는 허석을 보자마자 운명을 점지 받은 사람인양 설레임에 들뜬다. 그 때부터 이모는 자신의 연적이 되었고 이모를 바라보는 허석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진희는 어린애다운 순진함과 어린아이답지 않은 성숙함으로 허석에게 다가간다. 처음으로 '바라보는 나'를 조심스레 내비친 상대가 허석이었으며 어린아이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는 허석을 바라보며 진희는 뿌듯함을 느낀다. 자신의 삼촌 격인 남자를 감히 사랑한다고 느끼면서 사랑은 유치한 놀이와 같다고 여기던 부정적 시각에서 어느 정도 탈피한다. 하지만 진희에게도 쓰라린 이별의 아픔이 찾아오고 이형렬에 대한 상처로 휘청거리는 이모를 위해 헌신을 다하는 허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만 아픔을 삼킨다. 원체 밖으로 드러내놓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만큼 이모처럼 대놓고 이별의 아픔을 시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이가 바라보기에 진희의 사랑은 시작도 하지 않은 것처럼 끝을 맺을 것도 없는 것이었다. 허석과 이모가 가까워질 무렵 마을의 유지공장에서 불이 나고 그 공장에 이모 대신 취직해 있던 경자이모는 화제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친구의 죽음으로 이모는 자기 때문에 친구가 죽었다는 자책감에 빠지고 친구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친구와 그 남자를 용서한다. 허석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이모는 전과 다른 성숙함으로 눈에 띄게 달라진다. 하지만 얼마 후 이모는 진희에게 읍내에 있는 병원에 함께 가자고 하며 산부인과에 함께 가 낙태수술을 하는 이모를 기다리고 진희는 허석의 아이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된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이모를 부축하고 집에 가는 길에 버스는 눈길에 고장이 나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고,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모는 눈 위에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이모를 사모하는 동네 건달 '홍기웅'에 의해 이모는 안전하게 집에 돌아올 수 있게 되고 결국 결말에 이르러 이모는 암묵적으로 홍기웅에게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반면 진희도 내면의 성숙함에 걸맞는 신체의 성숙함을 함께 경험하게 되며 내면과 외면의 동시에 성숙되게 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이 소설을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진희가 바라보는 삶은 이모뿐만이 아니다. 광진테라 아줌마와 장군이 엄마, 미스 리 언니 등 가까운 주변의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눈은 지나칠 정도로 해학적이다. 지나친 해학은 항상 어느 정도의 씁쓸함을 동반하는 것이며,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도 나쁜 경험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인 것이다. 각기 다른 인물의 삶을 통찰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결코 순탄하지 않은 여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아픔을 갖고 있으며 그 아픔을 표출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전통적 인습에 눌려 남편과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억눌린 여성의 모습이 대부분이며 사랑에 기대어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수동적인 여성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의 입장에서 수긍할 수 없는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이 은희경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아마 진희는 작가 자신의 삶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전통적 삶에서 현대의 삶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살아온 독자가 어린 시절 구습에 얽혀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작품을 감상하는 좋은 관점이 될 것이다. 진희의 캐릭터는 역동적이며 진취적이다. 그래서 작품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 아닐까?
흔히 페미니스트들은 외친다. 여성은 불행하다고.....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여자로 태어나서 겪게되는 수모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느껴야 하는 사회적 자격지심을 남자들은 모른다고들 한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남자와 여자는 선천적으로 다르기에 여자도 남자를 전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남자들이 읽어도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여성의 억눌린 삶이다. 그 형태는 조금씩 달라도 여자이기에 느껴야 하는 순결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주입된 일편단심, 여자는 남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가부장적 관습의 모순을 보았다.
여성의 삶에 이토록 수많은 굴곡이 존재하기에 문학계에서 여성 작가들이 활보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비단 여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보다 훨씬 일찍 성숙함을 겪게되는 여성의 특성을 잘 반영한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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