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놀랍다. 중견배우들이 전혀 다른 모습을 TV속에서 천연덕 스럽게 연기해 낼 때,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어떤 삶의 애환과 고통을 겪어낸 인간의 경지에 다다른 느낌일 때가 있다.
고두심이 그러했고 윤여정이 그러했고 김해숙이 그러했듯, 중견배우들의 연기는 "어머니"였고 "눈물"이었고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이었더랬다. 그리고 그 비슷하면서도 180도 다른 연기들은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고 웃음보를 터뜨리게도 하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평범한연기를 할 때, 우리 가슴을 더 울렸고 더 깊은 감동을 전했다.
그러나 여기 그 공식에 약간은 빗겨난 조금 특별한 연기를 하는 중견배우가 있다. 그 이름은 바로 "김혜옥"
잔잔하고 평범한 그녀, 만화같은 그녀, 푼수같은 그녀, 악독한 그녀.
배우 김혜옥이 온전히 "김혜옥"으로서 주목을 받게 된것은 올드미스 다이어리라는 신선한 시트콤에서 부터였다. 할머니이기를 거부하는 만년 소녀같은 할머니, 터프하고 까칠하여 동네를 주름 잡는 할머니 "김혜옥"은 "귀여운" 할머니였고 매력적인 할머니였다.
이 매력적이고 귀여운 할머니는 사실 연극배우를 10년 넘게 하다가 1980년 MBC특채 모집에 선발되어 TV로 전환한 베테랑 연기자다.
여러 배테랑 연기자들 답게 그 역시 곳곳에서 때로는 눈에 띄지 않게 때로는 확실하게 존재감을 어필하면서 만족할 만한 연기를 펼쳐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의 느낌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부분이 있다.
"올미다"에서 주목받기는 했지만 김혜옥이 이전에 출연한 "발리에서 생긴일"에서 김혜옥은 위선적이며 고상떠는 재벌가의 아내 역을 천연덕 스럽게 소화해 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도 김혜옥은 이제까지의 어머니의 모습과는 상당히 차별되는 어머니를 연기했다. 오바스럽고 활달한 어머니. 그러나 딸들을 지극히 아끼는 친구같은 어머니는 일면 만화 같은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만화스러움에 국한 되지 않은 채, 극의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개성과 호흡을 모두 살려내는 능력은 김혜옥이 가진 경험과 연륜이었다.
그리고 "경성 스캔들"에서 그녀가 "사치코"를 맡았을 때 그 능력은 최대로 빛을 발했다. 김혜옥은 "사치코 여사"의 캐릭터를 200%증강 시키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연기자 였다.
"사치코"는 사실 평범한 역할이 아니었다. 마치 일본 만화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오바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어야 했고 때때로 일본 만화에 나오는 장면까지 패러디 되었다.
김혜옥이 "소년탐정 김전일"을 패러디 한 장면에서 "범인은 이 안에 있다!" 하고 소리칠 때, 10대들 조차도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감성이 철저히 만화적이며 연극적인 것에까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손을 살포시 올려서 박수를 치며 "브라보"라고 오묘한 미소를 짓는 연기도, "무능한 남자, 귀여운 남자"를 연발하며 우에다를 꼼짝 못하게 한 연기도, "바람직한 기럭지를 가졌군요"라는 대사가 어색하지 않았던 것도 김혜옥이라는 연기자의 입을 통한 연기가 중년배우들이 내뿜는 분위기를 뛰어넘어서 10대의 감정까지도 건드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부분이다.
그 역할은 김혜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많은 매니아 군단을 거느린 경성스캔들에서 김혜옥은 사건 전반에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코믹함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캐릭터였다. 김혜옥은 자신은 분명한 "사치코"로서 극의 전반적인 코믹함과 긴장감을 쥐락펴락 하는 숨은 주인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혜옥이 오버스러운 연기만 하는 배우라는 착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김혜옥은 삶의 치열함과 아름다움을 너무나 잘 표현해내는 작가로 칭송받는 "노희경"작가에게서도 많은 불리움을 받는 인정받는 배우이다.
비교적 최근작인 4부작 "기적"과 노희경과 여러 작가들이 합심해 만들어 호평받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가지 질문"에서도 김혜옥에게 작지만 큰 역할이 맡겨졌다.
김혜옥은 그 드라마들에서 만화적인 캐릭터를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중풍걸린 남편을 수발해야 하는 삶에 지친 여인이었고 마음 따듯한 약사였다. 그 곳에서 그녀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푼수 엄마가 아니라 그냥 우리네 삶을 같이 살아가는 여인이었고 일상의 커다란 부분을 가족을 위해 비워둔 아줌마였다. 표정에서 조차 일상적임이 묻어나온 김혜옥의 연기는 감탄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만큼 김혜옥은 다른 이미지를 자유롭게 변주해 낼 수 있는 뛰어난 연기자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김혜옥은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는 영부인역할을 맡아 유감없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도 했다.
그런면에서 김혜옥에게 맡겨지는 역할들이 조금은 특별한 역할이 많다는 것 또한 놀랄일이 아니다. 닥터 깽에서 아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버리는 약간은 모자른 어머니, "수제비 아줌마", 가족의 탄생에서 병으로 죽어가지만 끝내 울지 않는 잔인하리만큼 자신과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도 모두 김혜옥이었다. 김혜옥은 "어머니"라는 틀에 정형화된 어머니가 아니다. 모자르고 푼수같지만 때로는 어머니이기에 강철같은 심장을 가장해 냈다.
그것은 낯설었지만 김혜옥이라는 이름으로 재 탄생된 또다른 어머니였던 것이다.
최근 김혜옥은 "며느리 전성시대"와 "미우나 고우나"에서도 이전의 이미지를 활용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며느리 전성시대"에서 부잣집 못된 시어머니는 발리에서 생긴일에서의 연장선상이고 "미우나 고우나"에서는 올드미스 다이어리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다른점이 있다면 전작들에 비해 김혜옥이라는 연기자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만큼 김혜옥에게 거는 기대는 이전보다 훨씬 늘어나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들에서 김혜옥에게 카메라가 집중할 때, 때때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의 몰입도가 생겨나는 것 또한 김혜옥이라는 배우의 저력이 인정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여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슷한 와중에서도 김혜옥은 또다른 감성을 가지고 연기를 한다. 못된 시어머니역할을 할 때도 김혜옥이 발현하는 연기의 스팩트럼은 또한번 놀라울 때가 있고 소녀같은 엄마를 연기할 때도 김혜옥의 푼수연기는 그만큼 더 귀여워지기도 한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언제나 불평하나 없을 정도로 소화해 내는 배우는 무섭다. 그것이 어떤 역할이라도 다른 감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배우는 굉장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배우인 것이다.
그녀는 작품속에서 때때로 착하고 때때로 나쁘고 때때로 부자고 때때로 가난하고 또 때때로 할머니고 때때로 어머니다. 또한 그녀는 때때로 일상을 살며 화내고 소리치고 가끔은 따듯한 미소를 품으며 또 다른 때는 만화속을 거닌다. 그런 김혜옥에게 여기저기서 "팔색조"라며 부산을 떤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범주에 완벽히 들어 맞을 수 있는 소름끼치는 내지름과 상냥함, 그리고 부산스러움과 우아함까지도 갖춘 배우가 있음에, 그리고 그간에 역할들이 "김혜옥"이라는 배우였기에 감사하다.
특별한 배우로부터의 특별한 인생
“남편과 남동생 잇달아 떠나보낸 후 마음의 병 얻어 꼬박 3년을 누워만 지내기도 했어요”
김혜옥이 내뿜는 특별한 아우라는 아마도 김혜옥이 가진 슬픔에 기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혜옥의 연기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내재된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김혜옥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3남 1녀중 유일하게 수입이 잇었던 그녀에게 가족들이 거는 기대는 상상 이상이었다.
“‘전원일기’에서 10년 동안 빨래하는 아낙 역을 했어요. 오랫동안 같은 역할만 하니까 어떤 PD가 ‘그 역할 아니면 못 먹고 사냐?’고 농담처럼 물은 적이 있는데 그때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정말 그 배역이 아니면 먹고살지 못했거든요.”
그렇게 단역에 매달려야 했던 처절함이 있었기에 오늘날 그녀에게 맡겨진 배역들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된것인지도 모른다. 두가지 느낌도 어색함 없이 전혀 다르게 표현해 낼 줄 아는 김혜옥의 이면에는 이렇듯 인생의 애환과 고통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먼저 간 사람들이 저한테 참 많은 걸 베풀고 떠났고 지금도 제 곁에 남아 저를 도와주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예쁘지도, 잘나지도 않은 제가 이만큼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모두 먼저 간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슬픈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가슴이 따뜻해지죠.”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눈물을 참는게 더 힘들다고 말하는 김혜옥은 정녕, 슬픔의 무게를 표현해 내는 것 조차 특별한 배우이다.
그녀에게 있어 고통이란,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더 밝아진 것이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을 옳바른 곳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했다. 진주를 품은 조개의 아픔같은 그녀의 인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그녀의 연기를 마주할 수 있게 됨에 시청자의 입장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가진 모든것들이 아직 완전히 분출되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앞으로 보여줄 아픔과 웃음 사랑을 언제나 마주하며 같이 웃고 울고 따듯해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나이에 걸맞는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빛나게 할 수 있는 배우 김혜옥. 그녀의 힘찬 발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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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Ψ 퐝메뤼강대규 작성시간 07.11.13 사치코...보다가 며느리 전성시대 보면 다른분 같으시고 박수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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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자벨아 자니? 작성시간 07.11.13 사치코는 정말 최고였어요. 이런 역할 잘 어울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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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바니마니 작성시간 07.11.15 이 분 가족의 탄생 얘기가 안 나왔네... 여기서 최고였는데...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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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사랑스런여자야 작성시간 07.11.16 요즘 며느리전성시대 에서도 진짜 잘보고있어요 ㅋㅋㅋㅋㅋ 경스에선 진짜 말도필요없구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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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짜장의추억x 작성시간 07.12.08 정말 보면서 연기 참 잘한다고 생각해요 .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