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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라는 갈림길

작성자성창일목사|작성시간26.06.21|조회수25 목록 댓글 0

 

왜 유대교는 예수를 거부하고, 기독교는 그를 메시아로 믿는가

 

예수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수십억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약속된 메시아로 믿는다. 반면 예수를 낳은 민족인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같은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몇 개의 예언 본문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사야 7장의 처녀 탄생,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다니엘 9장의 칠십 이레 예언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림길은 특정 구절 하나에 있지 않다.

 

그 갈림길은 결국 한 사건에 있다.

 

예수는 정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는가.

 

기독교는 이 질문 위에 세워져 있고, 유대교는 이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논쟁의 시작도, 끝도 결국 여기에 있다.

 

 

유대교가 기다리는 메시아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어 "마시아흐"에서 온 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원래는 왕과 제사장에게 사용되던 표현이었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하나님의 통치를 역사 가운데 드러낼 왕이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시대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세계를 공의로 판단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심판할 것이며" (이사야 11:4)

 

또한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이사야 11:6)

 

라고 말한다.

 

예레미야는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예레미야 23:5)

 

고 기록한다.

 

에스겔은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에스겔 37:24)

 

라고 예언한다.

 

이 본문들을 종합하면 유대교가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은 분명하다.

 

그는 이스라엘을 회복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세운다.

 

열방 가운데 평화를 가져온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만든다.

 

그런데 예수의 생애를 보면 이 기대와 충돌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수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지 않았다.

 

세상에 정치적 평화를 가져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

 

그래서 유대교는 묻는다.

 

"메시아라면 왜 죽었는가?"

 

"메시아라면 왜 세상은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는가?"

 

유대교의 거부는 단순한 고집이나 무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전이 말하는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더 깊은 이유

 

사실 유대교의 거부는 메시아 문제만이 아니다.

 

더 깊은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있다.

 

유대교 신앙의 중심에는 신명기 6장 4절이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를 흔히 쉐마라고 부른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하나라고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성육신 교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삼위일체 역시 마찬가지다.

 

유대교 입장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하나의 문제는 율법이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토라가 영원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갈라디아서 2:16)

 

유대교 입장에서는 이것이 매우 급진적인 주장으로 들린다.

 

따라서 유대교가 예수를 거부하는 이유는 단순히 예언 몇 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언약, 율법에 대한 이해 전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도 처음부터 예수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의 제자들 역시 처음에는 유대교적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 역시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들의 희망도 함께 무너졌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누가복음 24:21)

 

그들의 기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십자가는 승리가 아니라 실패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후 제자들은 놀라운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선언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2:32)

 

초대교회의 출발점은 예수의 윤리가 아니었다.

 

산상수훈도 아니었다.

 

그들이 붙들었던 핵심은 부활이었다.

 

 

바울이 모든 것을 건 한 문장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어디인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람은 바울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바울은 놀라운 말을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14)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린도전서 15:17)

 

심지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린도전서 15:19)

 

고 선언한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부활을 상징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그는 예수를 단순한 윤리 교사로 만드는 길도 선택하지 않는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 전체를 버려도 된다고 말한다.

 

자신이 거짓 증인이 되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한다.

 

이보다 더 강한 표현은 찾기 어렵다.

 

 

예언은 출발점이 아니라 해석의 열쇠였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변증은 예언 성취를 강조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순서는 반대다.

 

사도들은 먼저 예언을 연구해서 예수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먼저 부활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사야 53장이 새롭게 보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이사야 53:5)

 

시편 22편도 새롭게 읽혔다.

 

"그들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18)

 

스가랴의 말씀도 새롭게 이해되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스가랴 12:10)

 

즉 예언은 부활 신앙의 원인이 아니라 부활 신앙을 설명하는 열쇠가 되었다.

 

 

왜 논쟁은 끝나지 않는가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 논쟁도 있다.

 

다니엘 9장의 "기름부음 받은 자" 논쟁도 있다.

 

이사야 53장의 종이 민족인지 개인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다.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설득하지 못한다.

 

왜일까?

 

이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본문을 그 방향으로 읽는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

 

본문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는 논쟁이 끝나지 않는다.

 

결국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예수는 정말 살아났는가.

 

 

부활이라는 갈림길

 

결국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장 깊은 차이는 구약 해석이 아니다.

 

그 차이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된다.

 

만약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많은 주장들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바울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승리가 된다.

 

예언들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메시아에 대한 이해 자체가 바뀐다.

 

그래서 기독교는 결국 예언 몇 개가 아니라 한 사건 위에 서 있다.

 

빈 무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증언된 한 사람.

 

나사렛 예수.

 

유대교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린다.

 

기독교는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고 믿는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수많은 논증이 아니다.

 

결국 하나의 질문이다.

 

"그는 정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는가?"

 

 

그렇다면 부활은 믿을 만한 사건인가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을 부활 위에 세운다면, 그 부활은 정말 믿을 만한가?"

 

이 질문은 결코 무례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스스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믿음을 증명되지 않는 감정 위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매우 특별한 내용을 기록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고린도전서 15:3-6)

 

많은 신약학자들은 이 구절을 바울 자신의 창작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이미 사용하던 매우 오래된 신앙 고백으로 본다.

 

예수의 죽음 이후 불과 몇 년 안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부활 신앙이 수십 년 후에 만들어진 전설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적어도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그가 살아났다"고 믿었다.

 

문제는 그들이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빈 무덤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운 것

 

기독교 변증에서는 종종 빈 무덤을 강조한다.

 

물론 빈 무덤은 중요하다.

 

그러나 초대교회를 탄생시킨 것은 빈 무덤 자체가 아니었다.

 

만약 무덤만 비어 있었다면 다양한 설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누군가 시신을 옮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위치를 착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자들의 주장은 훨씬 급진적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무덤이 비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식사했다고 말했다.

 

그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손과 옆구리를 만졌다고 말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누가복음 24:38-39)

 

요한은 의심 많던 도마의 이야기를 전한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한복음 20:25)

 

그러나 결국 도마는 무릎을 꿇고 고백한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물론 역사학은 이 장면을 그대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설명해야 할 사실은 남는다.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확신에 이르게 했는가.

 

 

무엇이 제자들을 바꾸었는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제자들은 생각보다 위대한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주 오해했고,

 

자주 다투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망쳤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

 

다른 제자들도 흩어졌다.

 

예수께서 체포되셨을 때 그들은 승리의 군대가 아니라 패배한 무리처럼 보였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들은 예루살렘 거리 한복판에서 예수를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한다.

 

체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베드로는 공회 앞에서 선언한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행전 5:29)

 

무엇이 그들을 바꾸었을까.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그 가르침은 이미 십자가 이전에도 들었다.

 

기적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이미 보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망쳤다.

 

초대교회가 제시한 설명은 단 하나였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믿었다.

 

 

바울이라는 가장 불편한 증인

 

부활 논의에서 종종 놓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바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원래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나 바울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는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갈라디아서 1:13)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는 예루살렘 지도부의 촉망받는 젊은 율법학자에서 박해받는 선교사가 된다.

 

명예를 잃고,

 

안전을 잃고,

 

재산을 잃고,

 

결국 목숨까지 잃는다.

 

왜였을까.

 

바울은 스스로 이유를 설명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8)

 

그는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이 곧 증명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설명은 필요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바꾸었는가.

 

 

증명과 신앙 사이

 

여기서 정직해야 한다.

 

역사학은 예수의 부활을 수학 공식처럼 증명하지 못한다.

 

실험실에서 반복 검증할 수도 없다.

 

역사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사건 이후에 남겨진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제자들의 변화.

 

초대교회의 탄생.

 

바울의 회심.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운동.

 

박해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공동체.

 

이 모든 사실들은 설명을 요구한다.

 

기독교는 그 설명을 부활에서 찾는다.

 

반면 다른 학설들은 환상 경험, 종교적 체험, 집단 심리 등 다양한 설명을 제시한다.

 

역사학은 여기까지 갈 수 있다.

 

그 이후는 각 사람이 내려야 할 판단의 영역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판결

 

그러나 신약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을 하나님의 최종 판결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를 정죄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신성모독자로 보았다.

 

로마는 그를 반역자로 처형했다.

 

세상은 그를 실패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전혀 다른 판결을 내리셨다고 초대교회는 믿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선언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36)

 

부활은 단지 죽은 사람이 살아난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기독교 신앙은 결국 여기서 출발한다.

 

복잡한 계산 때문이 아니다.

 

몇 개의 예언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고백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림길도 결국 여기에서 만난다.

 

그는 정말 살아나셨는가.

 

바울은 여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초대교회는 여기에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기독교는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참고문헌

 

1.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저자: N. T. Wrigh 박문재 역,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2.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저자: N. T. Wrigh 박문재 역,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3. 예수는 역사다 저자: 리 스트로벨 윤관희, 박중렬 역,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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