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와 깨달음은 무엇이 다를까?
처음에는 둘이 비슷해 보인다. 깨달음도 진리를 아는 것이고, 계시도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둘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그리고 출발점이 다르면 여정도 달라지고, 도착점도 달라진다.
많은 철학과 종교는 인간에게서 출발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인간이 그림자의 세계를 벗어나 진리의 세계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진리는 인간 밖에 존재하지만 인간은 사유와 탐구를 통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양의 전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선종의 6조 혜능은 말했다. 깨달음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성(自性)을 보는 것이다. 그는 평생 글을 읽지 못했지만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임제 의현은 더 직접적이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라는 말이었다. 선종에서 깨달음은 스승도 경전도 궁극적으로는 넘어서야 할 방편일 뿐이다. 직접 보아야 한다. 직접 통찰해야 한다.
현대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진리는 어떤 조직이나 종교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모든 조건화된 사고를 벗어날 때 진리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형태는 달라도 공통점이 있다.
인간이 묻는다.
인간이 탐구한다.
인간이 수행한다.
인간이 깨닫는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진리는 저 높은 곳에 있고 인간은 그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스승이 도울 수는 있지만 대신 깨달아 줄 수는 없다. 결국 내가 보아야 하고 내가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깨달음은 진리에 이르는 통로이며, 동시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열쇠가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그 깨달음을 누가 검증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참된 깨달음인지 아닌지를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체험은 강렬할 수 있다. 확신은 깊을 수 있다. 그러나 강렬함과 진실은 같은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는 자신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확신했지만 결국 자신과 타인을 파괴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깨달음의 마지막 판단자는 자기 자신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쉽게 속이는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깨달음의 종교에도 정통과 비정통의 구분이 있고 여러 종파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 체계 안에서의 문제다. 순수한 개인의 깨달음 자체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반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같은 계시 종교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다.
성경의 첫 문장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증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선포한다.
철학이 질문으로 시작한다면 성경은 선언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의 사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계시는 단순히 출발점이 아니다.
계시는 목표이기도 하다.
많은 깨달음의 전통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해탈을 추구하고 열반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해탈과 열반이 무엇인지는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같은 깨달음 안에서도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목적지는 있지만 그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는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계시됨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목적지를 먼저 보여 주셨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구원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셨다.
우리는 종말의 모든 비밀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신앙은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추측하며 걷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요한계시록 22:13)
계시는 시작이자 종말이다.
신앙인은 계시에서 출발하여 계시가 가리키는 하나님께 이른다.
그렇다면 기독교에는 깨달음이 필요 없는가?
오히려 그렇지 않다.
기독교에도 깨달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역할이 다르다.
깨달음의 전통에서 깨달음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깨달음은 이미 주어진 진리를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하셨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누가복음 24:45)
성경은 이미 있었다.
말씀도 이미 주어졌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 했다.
사도 바울도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 2:14)
기독교에서 깨달음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 이미 주어진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다.
창문 밖의 풍경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있던 풍경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정통 기독교는 언제나 새로운 계시를 경계해 왔다.
교회사 속 대부분의 이단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교회가 지금까지 몰랐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성경에 없는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보다 더 높은 진리가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8)
복음은 교체되지 않는다.
복음은 수정되지 않는다.
복음은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해는 깊어질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바뀌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생긴다.
계시 종교에는 이단이 존재한다.
왜 그럴까?
계시라는 객관적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기준이 있으니 벗어남도 존재한다.
그러나 순수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이단이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각자의 깨달음이 최종 권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시 종교의 강점이자 부담이다.
기준이 있으니 검증이 가능하다.
동시에 그 기준 앞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반대로 깨달음의 전통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만큼 검증의 어려움도 따른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신앙의 핵심은 새로운 것을 아는 데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이미 주어진 진리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살아내는가에 있다.
깨달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계시를 대신할 수 없다.
깨달음은 계시를 이해하기 위한 눈이다.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진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순례다.
그리고 그 순례의 처음도 하나님이시며, 마지막도 하나님이시다.
계시는 시작이자 목적이다.
깨달음은 그 계시 안에서 눈을 뜨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