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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는가

작성자성창일목사|작성시간26.06.23|조회수33 목록 댓글 0

은사중지론과 은사지속론의 논쟁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이 반복되는 이유 중 하나는 질문 자체가 잘못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방언이 있는가", "지금도 예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현상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 오셨는가, 그 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성령의 은사를 묻는 것이다.


1. 구약: 성령은 항상 역사하셨다, 그러나 아직 모두에게는 아니었다

성령의 사역은 신약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브살렐에게 성막을 지을 지혜를 주셨고, 기드온과 삼손에게 능력을 부으셨으며, 선지자들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그러나 구약의 성령 사역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성령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임하셨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게 제한적으로 부어졌고, 때로는 떠나기도 하셨다. 다윗이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은 것은 그 불안정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 구도가 바뀔 날을 예언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28)

이것은 단순한 은사의 확장이 아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약속이다. 제사장 한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가던 시대가 끝나고, 모든 백성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시대가 열린다는 예언이다.


2. 오순절: 새 시대가 열렸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단순한 기적으로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다. 베드로는 방언과 불꽃의 현상 앞에 선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엇인지를 즉시 설명한다.

"이것은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사도행전 2:16)

오순절은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수백 년 전 예언된 새 시대가 드디어 도래했다는 선언이다.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진다는 약속이 현실이 되었다.

이 사실이 은사 논쟁에서 갖는 무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오순절은 교회의 출발점인 동시에 구속사의 전환점이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바뀐 것이다. 율법 돌판이 아니라 성령이 직접 내주하시는 방식으로, 제사장 계급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성령을 받는 방식으로.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이 전환이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다시 이전 시대로 되돌아갔는가.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진다는 요엘의 예언은 불과 몇십 년 동안만 유효했는가.


3. 에베소서 2:20, 기초가 끝났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중지론의 핵심 논거는 에베소서 2장 20절이다.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는 말씀에서, 기초가 완성되면 기초 공사는 끝난다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이 논리가 보존하려는 진실은 분명하고 중요하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특별한 증인들이었다. 신약 성경은 그들을 통해 주어진 계시다. 그 권위는 반복될 수 없고, 어떤 현대의 예언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논리적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사도라는 직임의 단회성과, 성령의 은사 전체의 중단은 다른 문제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그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4:12-13)

은사의 목적지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다. 그 목적지에 우리는 이미 도달했는가. 교회는 이미 온전한 사람을 이루었는가. 분명히 아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을 위해 주어진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볼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4. 고린도전서 13:10, 온전한 것은 무엇인가

이 논쟁의 성경신학적 결정타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린도전서 13:10)

중지론은 이 "온전한 것"을 완성된 신약 성경으로 읽는다. 그러나 바울이 바로 이어서 쓴 문장이 그 해석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3:12)

신약 성경이 완성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의 앎은 완전한가. 바울이 말하는 "그때"는 역사 안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역사의 완성, 곧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약 전체의 구도와 일치한다. 신약의 구도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몸의 부활은 아직이다. 죄는 이미 정복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죄와 싸운다.

성령의 은사도 이 구도 안에 있다. 성령은 이미 부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회복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교회가 이 광야를 걷는 동안 성령의 도우심은 끝나지 않았다.


5. 성령의 은사는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은사의 실제 기능을 직시해야 한다.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교회의 살아 있는 현실로서.

바울은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서 은사의 목록을 제시한다. 이 목록들은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은사가 고정된 제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나누어 주시는 것임을 보여준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 사람에게, 이 공동체에 어떻게 살아 역사하는가를 선포하는 사역이다. 바울은 예언의 목적을 이렇게 정의한다.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4:3). 예언을 통해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고, 오래 굳어 있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너진다. 바울은 예언하는 자의 말을 듣고 불신자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 고백하게 된다고 말한다(고린도전서 14:25). 예언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게 하는 통로다.

방언은 인간의 언어로 다 담기지 않는 영의 기도다. 바울은 "내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리라"고 말하며 방언 기도를 자신의 실제 기도 생활로 소개한다(고린도전서 14:15). 로마서 8장 26절은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한다. 방언은 우리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까지 성령께서 이끄시는 기도의 깊이다.
바울이

"나는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전서 14:18)

말한 것은 그 깊이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몸을 고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선언이다. 야고보는 병든 자를 위해 교회의 장로들이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명한다(야고보서 5:14). 이것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특별 명령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를 향한 지침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병든 자를 고치며"를 사명의 일부로 주셨고(마태복음 10:8), 마가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따를 표적 중 하나로 병자에게 손을 얹는 것을 명시한다(마가복음 16:17-18). 하나님은 지금도 고치신다. 모든 기도가 즉각적 치유로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이 신유의 은사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때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는 증거다.

위로와 돕는 은사들도 있다. 가르치는 자, 권위하는 자, 구제하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로마서 12:7-8). 이것들은 초자연적 표적처럼 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일상을 지탱하는 것은 이 은사들이다. 낙심한 자를 찾아가 손을 잡는 것, 필요를 발견하고 조용히 채우는 것, 말씀을 삶에 연결하여 가르치는 것. 성령은 화려한 현상만이 아니라 이 조용한 사역들을 통해서도 교회를 세우신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가장 풍성한 교회였다. 동시에 바울에게 가장 심하게 책망받은 교회였다. 은사의 풍성함이 영적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 사이에 13장 사랑 장을 놓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은사는 사랑의 맥락 안에서만 본래 목적을 이룬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를 금지하지 않는다.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린도전서 14:39)

남용을 교정하면서도 은사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울의 일관된 입장이다.


6. 말씀과 성령은 하나다

교회사에서 반복된 오류가 있다. 말씀과 성령을 분리하는 것이다.

한쪽은 성령을 강조하면서 말씀의 권위를 흐린다. 체험이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새로운 계시가 성경 위에 군림하려 한다. 2세기 몬타누스가 그랬고 오늘날 일부 신사도 운동이 그렇다. 성령의 은사는 언제나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 작동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반하는 현상은 분별되어야 한다.

다른 쪽은 말씀을 붙들면서 성령의 역사를 닫아버린다. 교리는 정교해지지만 기대가 사라진다. 간구가 사라지고 성령께 의존하는 삶이 사라진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들의 골짜기가 그 모습이다. 형태는 있으나 생기가 없다.

에스겔 37장에서 뼈들이 살아난 것은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났을 때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고, 사방에서 생기가 들어왔다. 말씀 없는 성령 사역은 방향을 잃고, 성령 없는 말씀 사역은 생명을 잃는다.

성령은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분이며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며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이 둘은 경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하나였다.

성경은 이것을 명령으로 남긴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0-22)

멸시하지 말고, 헤아리라. 이 두 동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만 남기면 성경이 아니다.

교회는 지금 광야를 걷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 완성은 아직이다. 이 긴 여정 속에서 성령은 교회를 버려두지 않으신다.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세우시며, 우리가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탄식까지 대신 아뢰신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되 말씀으로 분별하고, 기대하되 우상화하지 않으며, 말씀의 권위 위에 굳게 서되 성령의 자유로운 주권을 제한하지 않는 것.

온전한 것이 오는 그날까지, 그것이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리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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