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주변 이야기

남대문교회 2대 이시형 목사-고읍교회 전임목사

작성자불꽃|작성시간03.05.23|조회수339 목록 댓글 0
남대문교회의 태동과 형성과제(1884-1918)
URL http://www.namdaemoon.or.kr/2nd/history/h079-083.htm
검색어 고읍

79-83페이지
4. 정착하는 남대문교회
(1) 제 2회 경충노회가 남문밖교회에서
1912년 6월 25일 상오9시에 경기충청노회 제2회 정기회를 경성 남문밖제중원 예배당에
서 개할새 회장 민로아 목사가 승석한 후 데살로니가 전서2장 1절로 12절 말씀을 김규
석장로로하여금 본 후에 회장이 그 말씀을 가지고 잠간 권면하고 서경조 목사기도로
개회하였다. 이 때 노회원들을 살펴보면 선교사들을 제하면 서경조, 한석진, 박정찬
녹사와 함태영, 김규식, 이여한, 박승봉, 이원긍, 차상진등 당대의 민족지도자들이 모
인 노회이었다. 남대문교회에서 경기도와 충청도를 합하여 조직한 조선예수교 장로회
의 두 번째 성회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 노회에서 청주읍 당회장 박정찬 씨의 1년
쉬는 것을 허락하고 쉬는 방법은 충청북도 목사들에게 위임한다는 정사위원의 보고를
받기로 하였다. 박목사는 이 때 이미 남대문교회 부임을 준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리고 각 당회 보고를 받았는데 연동, 남문밖, 경기서편보고는 첫날 오후 2시에 있었
다. 남대문교회가 조직교회로서 경충노회의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
다. 노회가 끝나기 직전 회원일동은 "남문밖교회에 대하여 본 노회를 금번에 성대히
대접하였으므로 감사함을 표시함이 좋은 줄로 건의하고 회뭗이 기립함으로서 표
하였다.
(2) 용산교회의 개척
남대문교회가 구리개에서 남대문 밖으로 이전한 후 조직과 체계를 이루어 가면서 교회
개척에 착수하게 되었다. 또한 남대문교회가 남대문 역앞에 위치함에 따라, 경인선을
이용하는 지역과의 빈번한 왕래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용산지역의 복음 전파가 용
이해 지게 되었던 것이다. 용산교회의 시초는 1908년경 그 지역에 살던 김 성학의 세
형제가 전도를 받아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서 시작되었다. 이들을 전도한 사람
은 동막교회의 교인 천 광신과 민 홍삼 두 사람이었다. 이렇게 김 성학의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려 오던 중 1912년경 남대문외교회 교인 최 웅천, 최 응구 두 사람과 용산의
김 성학, 김 성태 그리고 동막교회의 교인 엄 덕경이 함께 예배처소를 위한 헌금을 하
였다. 헌금한 70만원으로 여섯간 크기의 [솟점]초가를 한遁 채 사서 정식으로
교회(현재 원효로 3가 195번지에 소재)를 설립하게 되었다. 당시 남대문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던 에비슨 박사와 쉴드여사의 전도는 용산교회의 설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용
산교회는 교회가 설립된 후에도 오 택관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게 되는 1925년까지
남대문교회의 목사가 용산교회의 당회장을 맡아 교회를 처리하여 왔는데 박 정찬, 이
재형, 김 익도 목사가 수고하였다. 그 후 1930년 오 건영 목사가 제1대 위임목사로 부
임하기까지 남대문교회는 지교회로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931년에는 건평 40평 규
모 및 목조 예배당을 건축하고 용광 유치원을 개설하였다. 현재 담임목사로 있는 유
호준목사는 일본신호 중앙신학교 출신으로 1941년 전도사로 부임하여 제2대 위임목사
가 되었고 지금까지 40년간 이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3) 왕손 이 재형 목사 제 2대 목사로 부임
남대문교회는 목회자로, 박정찬 목사의 후임으로 1918년에 부임하였던 함 태영 조사가
삼일 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게 되자 1920년 니재형 목사를 청빙하게 되았다. 그는 1918
년 평양신학교 11회 졸업생으로 그해 양평읍, 고읍, 대심리, 묘곡 네 교회의 전임목사
로 목회하고 있던 중 남대문쇼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손 이재형 목사는
남대문 교회의 제2대 목사가 되었다.
그는 1871년 12월 16일(음력) 경평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만약 그가 고종황제와 나
이가 거의 같았더라면 철종의 대를 이러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는데 고종보다 18년이
나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고종이 1863년 12세의 나이로 즉위할 때는 세상에 태어 나지
도 않았었다. 이러한 귀족이며 왕위에 오를 뻔한 왕손이 예수를 믿고 우리 남대문교회
에 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교육을 대궐 안에서 받았는데 그보다 두 살 아래인 고종
의 맏아들, 즉 27대 왕 순종과 네 살 위인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과 셋이서 같
이 공부를 했다. 이리하여 그는 어릴적부터 궁궐 안에서 자랐다. 이재형이 26세 때에
과거에 급제하자 고종은 그를 풍기군수로 임명하였다. 이재형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때는 1907년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였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왕위에서
붸겨나고 순종이 즉위한 해이다. 왕손인 그도 이제부터는 왕손의 지위에서 내려
앉기로 결심한 셈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일평생 남을 위하여 살다가 고요히 죽자
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이재형 목사는 왕손으로서 예수를 믿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순조의 외가집의 직계자손인 박승봉은 이재형보다 먼저 예수를 믿고 안동교회의 창설
자가 되었고 윤 보선 전 대통령의 선친 윤치소는 안동교회의 장로가 되었던 것이다.
이재형 목사를 비롯한 이 두사람은 동갑이었다. 출신으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당대의
세력가들이며 교회안에서는 제일높은 귀족출신의 교인들이었다. 아무리 기독교가 계급
을 초월했다해도 무슨 문제가 일어났다하면 저절로 패가 갈리는 수가 있었다. 그들은
양반의 성격을 완전히 버릴수가 없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거나 못마땅할 때에는
벼락같은 호령이 터져나오곤 했다. 이재형 목사가 우리교회에 시무할 당시 장로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던 원인도 양반의 성격을 버릴수 없었던 이재형 목사와 에버슨
박사의 가마를 끌었던 신분의 박중근 장로와의 인간관계에 있어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
른 진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재형 목사의 남대문교회 목회는 1920년에 부임한지 1년이 지난 후 난관에 봉착하였
다. 1921년 6월 노회의 경성시찰 보고는 남문밖 교회에서 이재형 목사와 최장수 장로
의 사면한 일과 박중근 장로는 1년간 휴직 됨으로 인하여 임시 당회장으로 차재명 목
사가 시무하게 된일과 장로 2인의 청원과 함께 목사의 청빙을 협의 사건으로 보고하였
다. 남문박교회 당회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노회 임사
부에서도 상당한 진통을 겪게 하였다. 임사부의 보고는 남문외교회목사 이재형씨의 사
면 청원은 회중에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 보고를 접수하여 낭독하여 채용하기로 한
결과 남문외교회 목사 사면 청원한 일은 유안하고 그 교회와 화해하도록 권면위원 3인
을 택하기로 결의되었다.
그러나 이재형 목사는 1921년 교회를 사임하였고 최장수 장로는 복직하였다. 왕손 이
재형목사의 남대문 목회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재형 목사가 남대문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을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으니 노년기에
들어섰을 때였다. 하지만 교회봉사에 헌신함으로서 젊은날의 방탕했던 죄를 속죄받으
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목회를 하되 봉급을 받지 않았다. 도리
어 그는 자기의 돈을 쓰면서 목회를 했으니 일생동안 남에게 주면서 살았지 남에게서
받으며 살지않은 셈이었다. 연보는 한 달에 20원씩 꼭꼭 바쳤는데 그당시 쌀 한 가마
니에 5원에서 10원 정도 했으니 매달 쌀 다섯가마니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연보뿐 아
니라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주머니 돈을 털어 주기도 했다. 고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어
주었고 유능한 청년이 있으면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이 덕흥 목
사로 이재형 목사의 도움을 받아 고오베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숭동교회 목사가 되었
다.
이재형 목사와 가까이 지내던 김우현 목사가 이러한 생활을 보고 감탄하여 한시 한 줄
을 지으니 , 즉 남에게 주면서 사는 것처럼 통쾌한 일이 어디있으며 남에게 받으며 사
는 것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있는가 라는 명시였던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