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분처바위 고대 기독교 전래사
분처(分處)바위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이름)
명칭 : 영주 강동리 마애불
주소 :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1리 782번지
거리 : 대전서 180Km 2시간 40분 소요
30여년 전 크리스찬 라이프지에서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칼럼이 연제되어 난 역사에 관심있어 정기 구독하게 되었는데
영주 어느지역 암벽 칡덩쿨속에 암각화와 함께 히브리어가 발견되었다고 소개를 했다 그 후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보고 그 곳을 꼭 가보고 싶었는데 30년만에 2017 0515 연우회 모임 회원들과 가게되었다. 최근 자료가 없어 내비아가씨가 자꾸 뺑글뺑글 돌린다, 평은 면사무소를 찾아가 준비한 자료를 보이면 이곳 주소좀 알려 달라하니 중년의 남자 직원이 가본곳이라며 인터넷에서 한참 검색해 주소를 적어준다 강동리782번지 왜 평은 초등학교를 못 찾냐 했더니 수몰지역이란다 햐 네비아씨 술취한줄 알았더니만. 한적한 시골길을 가다 논물을 대기위해 화물봉고차가 정차 한다 아는길도 물어가자 자료를 드밀었더니 이곳을 안다고 따라 오란다 하 감사
이길 주소가 두산큰들길 51 전신주번호 8678S 에덴동산교회 방향으로 좌회전 꽤 경사가있는 산(고개)을 넘으면
강동1리 마을 초입에서 좌회전 농노 작은 길을 따라 2-300미터 위치에 있다
앞서가던 화물봉고차가 손짓하는 곳 도로변에 분처바위 가 있다
‘분처바위’는 ‘처용(處用)바위’와 이 바위벽에 마애된 ‘분처상(分處像)’과 그 남측의 <화왕(花王)바위>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 손 모양은 다소 독특해 보이나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가슴위에 올려놓고 있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가슴 위에서 손바닥이 밖을 향하는 자세를 하고 있는데 오른손에 연꽃가지로 보이는 곳을 왼쪽 가슴위에 올려 놓은 듯 하다.
이 암각상의 발견자인 유우식씨(고교 교사 발견일1987년8월)는 이 문자를 히브리어로 단정 짓고 이것이 도마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라는 한자 명문의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며, ‘인도자’는 사도(제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도마의 상’이 되는 것이다.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있다 하는데 마모가 심해 보이질 않음
센달을 신은 분처상
발아래는 연화문 대좌가 그려저있음
십자가 양각이 있었다 하나 마모로 흔적이없음
뒷편 바위면에는 광배의 조각선이 남아있고
1. ‘처용바위’의 명문
‘분처상’의 배경바위 ‘처용바위’에 보이는 명문은 한자 대명문 “처용(處容)”과 히브리어문자 명문 “타-우 멤- 요-드 아인”(‘도마 손 눈’의 뜻)과 “알-렙”이다. 한자 명문 “처용(處容)”은 좌상견 시에 ‘처용바위’ 전체에 묘사되었으며, 히브리어문자 명문은 ‘처용바위’ 정견 시 우(남)측 4m 높이의 암벽에 140cm × 40cm 크기로 서화병각 되었다.
이는 ‘분처상’의 형태에서 도마의 양손과 우측 도포자락에 거꾸로 조각된 얼굴상의 눈과 또 좌측 어깨 상부에 보이는 앙천인면상의 눈이 “알-렙” 즉 한 사람의 것임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2. ‘분처상’의 명문
‘분처상’의 한자 명문은 “명전행(名全行)”의 좌우 및 하부에서 판독되었으며, 그 내용은 “야소화왕인도자상도마(耶蘇花王引導者像刀馬) · 명수목(明手目)”, “분처상(分處像)”, “명전행(名全行) 기유작성(己酉作成)”, “다물(多勿)”이다.
명문의 크기는 탁본지가 42cm×65cm 이며, 음각상태가 뚜렷한 명문 “명전행(名全行)” 석자의 전체 길이가 42cm, ‘명(名)’자가 9×7cm, ‘전(全)’자가 15cm×9cm, ‘행(行)’자가 10cm×9cm이다.
그 외의 명문은 ‘명전행(名全行)’의 우측 및 좌측과 그 하부에 서화병각 되었으며, 한자명문 중 ‘者’(놈 자;‘문(文)’자와 ‘일(日)’자가 상하로 배치된 이체자임)자가 10cm×10cm, 서화 병각된 “기유(己酉)”가 각각 7cm×7cm이다.
한자 명문의 뜻은 ‘분처상(分處像)’이 야소화왕(耶蘇花王) 인도자(引導者)의 상(像)이며, ‘분처상’조각이 ‘刀馬’(도마)·‘刀明’(도메)의 손(手) 및 눈(目)이며, 이 ‘분처바위’를 ‘명전행(名全行)’이 기유년(己酉年)에 작성(作成)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유(己酉)”는 고구려 광개토왕 18년(영락 19년, 서기 409년, 기유)으로 단정되며, “다물(多勿)”은 상하로 연접된 “명전(名全)”자부분에서 ‘다(多)’자를, “도마·명(刀馬·明)”자 부분에서 ‘물(勿)’자를 판독했으며, “다물(多勿)”의 뜻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麗語 謂復舊土 爲多勿”(여어 위복구토 위다물)이라 했으므로 고구려가 이 유적지를 “攻取”(공취)했음을 뜻한다.
※ 지전행(地全行) 땅(지 완전(전 가다(행 땅끝까지 가다(사도행전 1:8)
야소화왕두석상(耶蘇花王頭石像)
평은면사무소에서 도마분처상이라 하니 중년남자 손사래다 아 왜그랬지 이래서 이랬군
특이 한 점은 이 지역 사람들이 이 분처바위에서 토속 무속행위를 안한다는 점이다
이 불상은 평은면 강동리 왕유(왕머리) 마을에서 당곡골로 넘어가는 산기슭에 있다. 왕유 마을은 고려말 중국으로 부터 처들어온 홍건적의 난을(1361년) 피해 안동으로 가던 공민왕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초체 유행하던 거석마애불 계열의 불상으로 전체 높이가 5.76m이다. 불상의 머리는 없어졌으나 목 부분에 턱의 일부가 남아있어 원래는 몸체와 한 돌에 조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위 면의 상태에 따라 어깨와 가슴 부분은 고부조로 새기고 아래는 선으로 조각하였다. 발 아래는 구름 문양과 세겹의 연화좌가 조성되어 있으며.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또한 불상 좌측부에 있는 4개의 감실형 조각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이어서 매우 주목된다
감실형 : 부처나 신주를 모시는 작은 방의 모양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74호 (2005.1.10지정)
어딜 바라보고있을까 궁금하여 올라가봤더니 구멍 폭파할려던 것일까 물먹은 나무쐐기를 박아놓으면 툭 잘려나가는데 무슨 용도일까 아님 인공 구조물을 설치위한 용도일까
▲톱으로 썰듯 잘려진 것 같음 (머리는 원래 만들지 않았다 함 연구결과)
몇몇 주민의 얘기로는 임란 때 왜군이 상의 목을 잘랐는데, 3-40년 전만해도 두부가 상 앞에서
딩굴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곳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석상의 조각연대는 1-2세기가 아니라 9~10세기 경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기를 의미합니다. 불교미술에서는 그 당시 석탑 조성능력이 대단히 발전했던 시기라고 합니다.
분처상을 기독교와 연관 짓게 되는 근거는 첫째 조형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세인데, 왼손가락 끝은 빗장뼈에 댄 채 손등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외반(外反:바깥쪽으로 돌림)하고 있어 불상의 수인(手印)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세는 1908년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景敎)의 인물상(당나라 말 제작,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상이라고 주장)에 나타나는 수세와 비슷하다. 수세뿐만 아니라, 상의 구도나 복장의 화려함도 두 상이 서로 유사하여 불상과는 구별된다. 발가락의 노출도 기독교(예수)상의 보편적 기법이다. 특기할 것은 필자의 초보적 관찰로는 상의 가슴 부위에
경교(景敎)의 영향을 받은 유물 ‘훈춘 삼존불상’의 십자가.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보인다는 점이다.
둘째 문양에서도 그 근거가 엿보인다. 상의 옆구리와 하부에 음각된 문양 중에는 목단이나 장미, 백두옹(할미꽃) 같은 꽃무늬가 보인다. 그리고 분처상의 고리형 목걸이 문양과 겉옷의 가로줄 문양은 둔황 경교화상의 목걸이나 겉옷 문양을 방불케 한다. 이와 함께 히브리어의 ‘토마’란 글자나, 한자의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은 비록 그 암각 시기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 상이 기독교와 관련된 상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셋째 인근 주민들의 전언도 기독교상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상을 지켜봐 온 주민들은 종래 이 상 앞에서만큼은 물상숭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일치하게 증언한다. 사실 현장에서 그러한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불상이나 기타 상서롭지 않은 대상물만 있으면 예외없이 불공을 드리거나 기복하는 한국인들의 전래 관행에 비춰보면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물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의 몇 가지 근거로 미루어 분처상이야말로 기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암각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아가 이 상을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를 시사하는 증거유물로 일단 추정해 봄직하다. 그러나 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서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포착되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명문의 내용이다.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토마’란 음각자는 현대 히브리어 문자라고 한다. 여기서의 ‘토마’는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시대인 1세기 중엽에 인도 서남부와 중국까지(중국까지 왔다는 설은 부정됨) 와서 전도활동을 했다는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일 것이다. 따라서 분처상을 도마상으로 본다면 히브리어, 그것도 현대 히브리어로 글자를 새겼다는 것은 시기상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의 조성 연대가 9~10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발견된 토마 관련유물 중에는 히브리어로 명기된 유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547년 남인도 서해안의 성 토마산에서 발굴된 석비에는 십자가와 함께 현지어인 펠레비어로만 비문이 씌어있다. 그리고 토마의 시대는 물론, 11세기에 이르러 동서 교회가 결별할 때까지만 해도 고대 히브리어가 상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토마’라는 현대 히브리어 암각문은 상이 조성된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토마‘라는 글자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이른바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이다.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칭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된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의 출현시기가 문제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다.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쓰게 된다. 한국의 경우, ‘원효문집’에서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法王子)’라고 칭한 실례는 있으나, ‘야소’로 한역하거나 음사한 적은 없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전무하다. 따라서 한자 명문도 히브리어 글자처럼 상이 조성된 후에 보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명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400년께 고구려 광개토왕이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황론적으론 그럴 법한 설이다. 그러나 전행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어서 단정은 이르고 숙고가 요망된다. 그밖에 ‘전행’을 ‘전차(향기나는 풀에 버금가다라는 뜻)’라는 석장 전행의 호로 해석하는 이도 있는데, 증거가 미흡하다.
분처상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은 짙지만, 아직 연구가 미흡해 무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분처상의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인 두부(頭部)가 떨어져나감으로써 실체를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몇몇 주민의 얘기로는 임란 때 왜군이 상의 목을 잘랐는데, 30~40년 전만해도 두부가 상 앞에서 뒹굴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곳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두부가 제비원미륵상(안동시 이천동 소재)이라고 하기도 한다. 앞으로 관련학계의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글쓴이 : 지곡로 따온글
참조 : 유우식씨는 탁본물에서 多勿 두글자와 耶蘇花王引導者 刀馬明이라는 열글자를 찾아 냈고 다시 탁본하던 중 분처상이라는 글자를 찾아냈으며, 그후 계속 像, 手, 目이라는 글자를 확인했습니다. 그리하여 분처상을 조각한 사람은 전행이며, 야소는 예수이고 화왕은 목단이며 인도자는 도마로서 분처상은 바로 도마의 상을 가르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후 그는 88년 1월 19일 다시 현장에 가서 히브리문자를 발견하였는데 눈, 손, 마, 도를 가르키는 글이었습니다. 이는 한자인 刀馬名手目과 일치합니다. 분처바위는 서기 419년보다 10여년이 앞선 호태왕 때 전행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유우식씨는 한국의 기독교가 2000년전 신라 파사왕 때인 서기 84년경이전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참고 : 신라의 초기 국호 사라벌(徐羅伐)과 시라(斯盧)의 뜻
이 ‘시라’가 주후 8세기 시리아 사본에 ‘시르’(쉬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안디옥 계열의 이 시리아 사본에는 동방박사들의 고국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아주 먼 곳으로 ‘시르’라고 불리는 땅”이라고 기록돼 있다. 란다우 박사가 소개한 ‘동방박사의 묵시’는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된 주후 8세기 시리아 사본에 기록된 동방박사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비록 시리아 사본은 주후 8세기의 것이지만, 시리아 사본의 원본은 주후 2세기 중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란다우 박사는 믿는다. 만약 그렇다면 시리아 사본의 원본은 마태복음이 기록된 지 1세기 후에 기록된 것이다.
한편 시리아 사본에는 동방박사들이 도마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한다.
한국기독청장년 75년 면려운동사 발간에 즈음하여
김 장 섭 대전노회 22회 회장역임
한국 CE.75년사편집위원장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서서히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이기 시작한다. 서쪽에선 동방을 향해 죽음의 바다(주1)를 정복하고 사막을 건너 황금과 향신료(주2)를 찾아 수탈과 침략으로 마리아(?)像을 세우며 서녘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고 동쪽으로부터는 잠자는 해의 바다를 넘어 눈부신 아침을 맞게 된다.(주3)
◉부제 : 중국에 기독교 전래
먼저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오기까지의 주변정세를 살펴보고자 한다.635년경 당의 황제 태종(太宗)은 아가본(아브라함의 중국명)이라는 네스토리안 선교사의 말씀을 받고 파사사(波斯寺)(주4)라는 교회당을 세우게 된다. 당의 경교(景敎) (기독교를 뜻하는 말로 ‘광명의 종교라 함’) 번성기는 714-781년 전후이며 781년 이 당시의 한반도는(주5) 신라가 삼국을 통일키 위해 당나라와 외교가 빈번한 시기임을 유추해 보며 또한 모든 학문을 전승하길 원한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해 이 당시의 중국 내의 선교현황을 736자로 중국말과 시리아 어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가 1625년 발견되고
AD781년 중국 당나라 장안의 경교(景敎)사원인 대진사에 건립된 비석, 중국에 전래한 경교의 교리와 역사를 적어 그 유행을 기념한 내용
똑같은 모조비가 191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되고 불국사의 다보탑 또한 이질적인 건축양식과(주6) 석제 십자가 더 거슬러 올라가서 김수로왕의 부인 허 황후는 서기 48년에 인도에서 시집 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인도와의 무역이 빈번한 것으로 확인되며 인도에 온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주7) 칼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AD72년경 인도 첸나이에서 이교도 원주민들의 창이 몸을 관통해 순교) 우리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칼도마, 어떤 연관성을 지어보면 한반도에도 기독교의 유입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1987 8월 경북 영주시 왕류동에서 발견된 도마의 분처상등)
경주 다보탑
741년경에는 1만명의 당군을 인솔하고 파밀 산맥을 넘어 티베트를 방어하고 아랍의 침략을 봉쇄한 당 유수의 명장 고선지(한국인) 장군이 활동하던 시대이다. 16,000피트 산맥을 넘어 2,000마일 사막을 1만의 대군을 이끌고 넘어감은 군사 역사사의 또 하나의 비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몽고의 징기스칸은 근동으로 진출 모슬렘국가를 침공 십자군이 매번 탈환치 못한 성지 예루살렘을 간단하게 점령하여 기독인들에 순례를 자유롭게 함,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구의 천주교는 사절을 파송 다수 중 루부르크 선교사는 압록강까지 왔다가 보고 들은 바를 교황청에 기행문을 포함한 편지 속에 카울레(Caulej 고려)라는 말로 한반도를 소개하여 후에 Coree로 세계 속에 한국을 소개하고 한국의 고유 명칭이 되는 계기가 됨
주7)AD 48년 인도 아요타국 왕실 허황옥 가야국 김수로왕(김해김씨 시조)과 혼인 아들10딸2
그 중 두아들을 허씨(許) 仁川李氏로 사성하여 대를 잇게함
허왕후가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중요한 증거는 신어문양이다. 2000여년 전 인도의 아요디아는 고대 코살왕국 수도로써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왕의 탄생지로 두마리 물고기를 숭배하던 나라였다.아유타국은 1세기경 북방 월지족의 지배를 받게 되자 지배층은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촉나라)에 정착을 하게 된다.
인도 출신 브라만계급의 허왕후는 미얀마,운남성을 거쳐 사천성 안악에 장착한 민족의 후손으로 15세때 출생지를 떠나 중국무안에서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황해를 건너와
서기 48년 7월 27일 김해 가락국에 도착하여(수행20명) 수로왕과 결혼하게 된다.허왕후의 이동지역을 이어주는 증거가 쌍어신앙이다.인도 아요디아사원,중국의 안악(구 보주)허왕후의 오라버니 장유화상이 세운 은하사,김해 수로왕릉에도 쌍어문양이 새겨져 있다.
한편 고향에서 갠지스강에 배를 띄워 동풍을 타고 바다로 이동하여 가락국으로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들과 함께 온 일행이 아닐까?
아기예수님 찾아간 동박박사들에게 예수님의 12제자중 도마가 세례를 준 인연일까?
참조 : http://cafe.daum.net/npov1/Ah2p/7
편집자주) 히브리어 :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었으며 BC 3세기경에 아람어의 서부 언어로 대체되었으나 의식어나 문학어로는 계속 사용되었으며 19, 20세기에 이스라엘의 공식어가 되면서 구어로 부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