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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해설사님들께 인문운동가의 한 사람이 드리는 덕담(德談)

작성자남곡|작성시간17.09.28|조회수248 목록 댓글 0

숲 해설사님들께 인문운동가의 한 사람이 드리는 덕담(德談)

 

1. 녹색은 미래입니다.

 

지금의 반생명적 문명을 지양하여, 지구가 존속하고 그 속에서 인류가 자연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녹색은 광활하게 열려 있는 미래를 그려보게 합니다.

녹색은 생명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여러분은 역사의 순()방향에 서 있습니다.

순천자(順天者)입니다.

 

2.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까요?

 

인문운동가로서 나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서, 이러한 인문운동이 생태운동과 융합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라고 믿고 있습니다.

반생명적인 문명으로 되고 있는 근본 원인을 보면 인간의 가징 큰 특징인 물질생산력관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것에 지배되는 현상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을 제대로 돌리는 의식·문화운동을 나는 인문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가 올바르게 배합되어야 합니다.

 

물질은 과거에 비해 비할 수 없이 풍부해 졌는데, 사람들은 그 만큼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불행하기까지 합니다.

그 원인은 양극화·불평등·차별 등과 생태계파괴·환경오염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요즘 와서 더 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물질을 활용하지 못하고 물질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생존의 제1요건이며, 행복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을 사람이 활용할 때 이야기이고, 물질에 지배되어 버리면 오히려 불행의 원인으로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이 풍부해 진 것은 행복을 위해 좋은 조건입니다.

이제 물질과 정신의 올바른 조화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빛살이 퍼져가듯 넓혀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탕이 될 때라야 여러 가지 제도나 시스템 등을 변혁하는 것이 비로소 의미 있게 됩니다.

더구나 이런 물질 중심의 문명은 생태계를 교란하고, 오염된 환경으로 쾌적한 삶을 해치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존속 자체를 치명적으로 위협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이야기해도 물질 중심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바꾸기가 지극히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편의가 너무 몸에 베어 버렸습니다.

물욕을 억제하거나 가난을 권하는 방식으로는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가난을 피하고 편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억제하기보다는 더 큰 욕망으로 확대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을 즐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가피한 가난은 원망하거나 비굴해지거나 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즐기는 것은 도()입니다.

이 도()를 오늘에 말한다면 정신적·예술적 가치를 신장하는 것입니다. 즉 욕망의 질이 달라지고 물질적 가치보다 더 큰 욕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물욕은 감소합니다.

즉 락도(樂道)라야 안빈(安貧)할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발적 풍요가 됩니다.

무언가를 탐내고 챙기고 모으는 것에서 느끼는 기쁨보다 나누고 베풀며 양보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꾸고 보존하는 기쁨, 직접 재배하는 텃밭 농사의 기쁨 , 자연과 잘 조화된 도시에서 꽃피는 예술적 감성 등은 삶의 패턴을 바꿀 것입니다.

아름다운 생태도시는 조금만 가려고 해도 자동차를 이용하려는 육체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걷거나 자전거로 상쾌하고 따뜻한 도시의 공기를 호흡하고 싶은, 즉 사람들과 따뜻한 시선의 교환, 주고 받는 정다운 인사를 즐기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사람들 간의 사이가 좋아야 되겠지요.

 

이렇게 욕망의 질을 바꾸는 것이 인문운동의 중요한 분야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2) 관념에 지배되지 않고 관념을 활용합니다.

 

인간의 특징으로 높은 물질적 생산력과 함께 관념을 들 수 있습니다.

생산력 못지않게 인간은 관념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수많은 새로운 지식·경험·신념·가치관 등이 관념계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관념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에 지배될 때 그것이 불행의 원인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관념에 지배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생각이 틀림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나는 진리를 안다는 등의 단정(斷定)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단정을 해야 신념도 확신도 생기고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등을 살리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고, 그 것이 오랜 문화로까지 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단정을 하면 관념을 활용하는 상태로부터 관념에 지배되는 상태로 됩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말이 잘 들리지 않고, 나아가 화가 납니다.

이 화에 휘둘리는 것이야말로 관념에 지배되는 현상을 가장 잘 나타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나 미움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따뜻한 세상입니다.

말로는 또 생각으로는 이웃과 사이좋아야지 하면서도 자기 생각이 단정(斷定)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 의식하지 못할지 몰라도 마음 한 편에 비수를 숨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틀림없다는 즉 자기가 사실을 알고 있다는 단정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현대 과학은 인식의 메카니즘을 밝힘으로서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교육만 받아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자신의 판단에 따른 하나의 상()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과학적 상식이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 사회적 실천과 사회운동에는 별로 응용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지식들은 단지 주입되고 있을 뿐 실제 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이미 오래 전 인류의 선각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탐구하며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 (논어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논어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와 같은 무지(無知)의 자각을 바탕으로 탐구 소통하는 방법은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보편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각을 일반화하고 사회화하는 것이 인문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의 하나입니다.

 

3. ‘대긍정에 바탕을 둔 새로운 문명국가의 건설이 아마도 시대정신이 아닐까요?

 

대긍정(大肯定)이란 역사를 통째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통째로라는 것은 그 모순과 그 모순에 대한 투쟁의 역사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바탕 위에 서지 않으면, 새로운 문명국가로 나아갈 사다리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일체관(一體觀)이라는 철학적 바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분절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청원유신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원래 본질이란 존재의 한계 짓기, 즉 존재의 부분적·단편적· 국소적 한정을 의미한다. 부분적 존재 응고의 중심적 거점을 이루는 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규정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사물이 조립된다. 그러한 사물의 전체가 분절의 세계다. 상식은 그것을 경험적 세계라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망념의 세계, 허공 꽃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망념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분절 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 즉 진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의 세계는 그 성립과정에서도 내적구조에서도 분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분절 를 분절답게 만들고 분절로부터 확연히 나누는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무분절과 직결되고 있다, 혹은 직결된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수행자가 무라든지 공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에는 유(),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분절하는 것이다. 무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의 존재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이상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진한 글씨는 내가 임의로 한 것입니다.

나에게는 상당히 탁견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분절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습니다. ‘일체(一體)’, ‘온생명’, ‘한생명’, ‘한살림’,‘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 일체(一體)를 자각하는 삶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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